240221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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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1–4 (NKRV)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쓰여진 책입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진 시기에 로마 황제는 우리가 잘 아는 ‘네로’ 입니다. 네로시대에 대화재 가 일어났는데 그 불은 매우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6일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불이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화재로 인해 로마의 14개 구역 중 4개 구역만 손상을 입지 않았고, 3개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7개 구역은 상당수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수만명이 죽었고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의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수십만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데 이 화재를 당시 로마의 황제인 네로가 노예와 부하들을 시켜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 학계는 네로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끊임없이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네로는 당시 로마가 너무 지전분하고 촌스럽다며 죄다 허물고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로 황제가 방화범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퍼져 나갔습니다. 네로 황제는 이러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씌우게 됩니다. 그때부터 기독교 박해가 시작됩니다.
당시 박해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 하였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네로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독교인에게 짐승의 가죽을 덮어 씌운 다음 사냥개를 풀어 물려 죽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기독교인을 나무에 매달아 밤에 화형을 시켜 로마를 비추는 등불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 기록된 책이 바로 히브리서 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의 독자는 모진 고난과 환란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 두려워하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유대인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런이들에게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성도님들은 어려움이 닥쳐오고, 환란이 닥쳐올 때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그것이 우리주 에수 그리스도이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수록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믿음의 주이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뇌 과학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우리의 뇌는 부정문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해당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만 입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텐데 제가 말하는대로 하시면 됩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 코끼리를 절대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떠십니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뭐가 생각 나십니까? 코끼리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중독을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끊으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시작하면 됩니다. 우리의 뇌는 부정문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 우리가 염려과 걱정을 하지 않는 좋은 방법은 걱정을 안해야지, 염려를 안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권면하는 것이 너희가 환란과 어려움가운데 있지만, 너희의 눈앞에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너희가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그 주님은 이땅에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더니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러니 우리도 모든 것을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12장에서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달리기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주는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기종목과 격투기 종목과는 달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록격기는 상대방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입니다. 특히 오래달리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나와의 싸움입니다.
많이들 알고 계실 유명한 두마리 늑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그리고 이 두 마리 늑대는 항상 싸우고 있지.”
손자 : 왜 싸워요?
할아버지 : 둘이 성격이 반대라서 그렇단다. 검은 늑대는 악이다. 그 녀석은 화, 질투, 슬픔, 후회, 욕심, 오만, 자기 연민, 죄책감, 억울함, 열등감, 헛된 자존심, 우월감을 가지고 있단다. 그리고 다른 한마리인 흰 늑대는 선이다. 그 녀석은 기쁨, 평안, 희망, 평온함, 겸손, 동정심, 친절, 자비, 공감, 너그러움, 진실, 연민이지. 이 두 마리의 늑대의 싸움은 네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단다.
손자 :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 : 그건 네가 먹이를 많이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안에 계신 주님을 더욱더 바라보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이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주를 앞둔 사람이 하는 것은 잘 달릴 수 있게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조각품이라고 인정하는 작품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윗상’ 입니다. 5.1 미터에 달하는 다윗상을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3년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수 있는지에 대해 질물을 하였습니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다윗상을 만들 대리석을 찾다가 6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대리석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조각상은 내가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대리석 덩어리 안에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 안에 있었고, 나는 필요없는 것을 덜어냈을 뿐입니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조각상에게 필요 없는 부분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 믿음을 얻기 위해 그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하는데 필요 없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을 얻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더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더 버릴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말씀을 듣고 계신 성도님들은 내 믿음을 위해 , 나의 신앙 생활을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속으로 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내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내가 버려야지 버려야지 한다고 그것이 버려지지 않습니다. 우린 다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무리 결심하고 결단한다고 해도 어느순간 실패해 넘어져 있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다이어트에 대해 종종 말씀을 하시는데 강장 공감되는 이야기가 다이어트는 평생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울토마토만 먹는걸 언제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닭가슴살만 먹는걸 평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할 때 평생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결심하면 하루 이틀은 할 수 있습니다. 길면 1주일도 한달도 결심한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평생하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버려야지, 안해야지 한다고 그것이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안해야지 한다고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 보았습니다.
청년들이 수련회를 다녀 올 때마다 해외선교를 다녀 올 때마다 저는 봅니다. 이번 겨울 수련회가 정말 뜨거웠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련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청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죽어야 천국 갈 가능성이 제일 높은데” 이제 청년들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2시간 3시간 동안 기도를 하며 결심하고 결단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나의 결심과 결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혀질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먼저 본문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볼 것을 권면합니다. 이와 같이 3절에서도 동일하게 권면하는데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여기서 말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주님,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뭐하라는 것입니까? “생각하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간 에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은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님을 의식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삶속에서 에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며 신앙생활 하는데 필요없어 버려야 할 것들이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하루 얼마나 주님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아니 얼마나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십니까?
선한목자를 담임하셨던 유기성 목사님이 항상 말씀하시는것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라. 어떤 분은 이 말을 듣고선 불가능 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24시간 항상 주님을 생각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을하면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주님을 생각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사람들은 그렇게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듯 우리가 주님을 매순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악한영이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사탄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면 큰일 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박장, 대형마트, 백화점에 공통적으로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창문과 시계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의 시간 관념을 없애 쇼핑에 빠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쇼핑하라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방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하듯 사탄도 분명히 존재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무엇을 할 때 혹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정말 살 수 있는 방법이라면, 피 흘리기 까지 다시말해 죽기 살기로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청년들에게 요즘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그냥 해” 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해되야, 내가 용납이 되어야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러면 안됩니다. 신앙은 이해 되지 않는 것들이 있을 지라도 ‘그냥 하는 것’ 입니다. 기도가 안된다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안되면 안되는대로 그냥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설교를 하는 저는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솔직히 힘듭니다. 그런데 힘들다는 것이 못하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몇달전부터 시계에 매시간마다 알람을 맞춰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시간부터 밤 12시까지 알람을 매시간 마춰놨습니다. 왜 맞춰놨냐? 알람이 울릴 때마다 주님을 부르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알람을 맞춰놓고 보니 놀라운 것을 발견했는데, 내가 하루의 삶속에서 생각보다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님들이 이제 알람을 시간마다 울리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싸움을 포기하지 말자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님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그 싸움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살수 있는 방법, 우리가 죽고 예수님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매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것, 주님을 의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그 싸움을 쉽게 포기하지 마시고, 그럼에도 우릴 사랑하셔서 두팔벌려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피흘리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 삶을 살아내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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