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고의 숨은 맛집을 공개합니다

마가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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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평생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저는 곰곰히 생각해보니 유학시절 아내가 만들어준 짬뽕이었습니다.
그 맛도 맛이지만 그때의 행복했던 마음을 도저히 잊을수가 없습니다.
물론 유명 짬뽕집 맛보다 더 좋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제게는 힘들고 어려운 시절 먹었던 가장 맛있는 추억의 음식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호텔 뷔페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있었느냐, 어떤 감정상태였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억은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볼 말씀에도 음식이 등장합니다.
아마 제자들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 모두에 등장합니다.
바로 빵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무엇이 제자들에게 이토록 기억에 남는 음식이 되게 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30-33절입니다.
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그때에 예숚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거기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들인줄 알고 여러 마을에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 곳으로 함께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 곳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막 전도여행을 다녀온 제자들이 쉴수 있도록 다른 곳으로 이동하십니다.
그러나 언제 소문이 퍼졌는지 사람들은 그곳까지 몰려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을까요?
모두 삶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굶어죽기 일보직전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말하기 힘든 아픔과 고통에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살기보다 죽는게 더 낫다고 여기는 자포자기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날이 저물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습니다.
35절입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로 ‘빈들’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광야’로도 많이 등장합니다.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대통령의 서재에 뽑힌 ‘광야를 읽다’라는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산에 오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이 올라가지 않은 산에 올라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런데 사실 인생은 산에 오르는 것보다 광야를 지나는 것과 더 많이 닮았다. 결혼하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결혼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다.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직장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다. 이처럼 광야를 지나는 것이 인생인데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것처럼 등산화를 신고 로프를 들고 있다. 인생에서 광야가 더 많이 펼쳐져 있음을 안다면, 사람들은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고 발버둥 치지 않을 것이다. 더 빨리 올라가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광야인줄 모르고 산을 오르는 것처럼 살고 있기에 힘들고 지치고 낙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적막한 광야, 빈들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찾아온 군중들처럼 여러가지 삶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는 속이 텅비어 버린 것처럼 무력감과 공허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 세상은 결국 홀로 살아가는 곳이라며 깊은 외로움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또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엇인가 결핍된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빈들의 마른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이 약속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지금 예수님을 따라온 군중들이 바로 빈들의 마른풀 같은 사람들입니다.
빈들, 광야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빈들이자 광야는 무엇인가 결핍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 결핍이 배고픔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제자들도, 사람들도 모두 배고파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사람들이 흩어져 알아서 저녁을 사먹을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척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전도 여행을 마치고 막 돌아왔는데 또다시 사역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굉장히 지쳤을 것입니다.
이제 저녁이 가까워지니 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사람들을 흩어버리고 자신들도 좀 어디가서 먹으면서 쉴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좀 이상합니다.
37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보고 이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남자들만 5천명이니까 여자들, 아이들까지 합치면 거의 2만명 정도입니다.
그러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들을 먹일수 없으니 알아서 각자 먹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수많은 사람들을 제자들에게 먹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를 사다가 먹이라는 것입니까?
이백 데나리온이면 얼마일까요?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입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노동자 하루 품삯이 10만원이라면 이백데나리온이면 2000만원입니다.
2000만원어치 음식을 어떻게 살수 있으며 어떻게 먹이겠습니까?
그러니 제자들의 대답은 굉장히 어이없어하는 말투입니다.
예수님, 지금 장난하십니까?
이런 뉘앙스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너무나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곳이 빈들, 광야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광야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실존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광야에서는 각종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수님도 시험을 겪은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얼토당토 않은 질문을 받으면 먼저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고민했어야 합니다.
다른 의도가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이곳이 광야니까 어쩌면 예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심지어 이때는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막 마친 시점입니다.
전도여행하며 수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쳤고, 귀신을 내쫓는 기적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반응은 좀 달랐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자신들의 상식이나 경험으로 반응하면 안됩니다.
그들이 보여야하는 반응은 자신들의 상식과 경험이 아닌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분명 실습은 믿음으로 해놓구선 실전에서는 자기 상식과 경험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너무나 믿음이 없고 우둔하기만 합니다.
우리도 그럴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서는 맨날 믿음, 믿음합니다.
믿음의 고백을 하고, 믿음이 들어간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는 믿음은 뒷방에 숨겨두고 상식과 경험만 가지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표현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의 원래 의미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자식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며 부모가 느끼는 몹시 괴로운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빈들과 같이 갈급한 사람들을 보고 괴로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참목자로서 양들인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먹이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먹이시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겨우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거의 2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 없을수 있을까요?
아이들이랑 함께 찾아온 부모들은 간식이라도 챙겨왔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39-40절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백명씩 또는 쉰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예수님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밖에 없지만 사람들을 푸른 풀밭에 앉게 하십니다.
마치 시편 23편을 연상케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처럼 참 목자되시는 예수님은 그들을 100명씩 50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십니다.
마치 테이블 셋팅하고 사람들이 먹을 준비를 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노숙자들 무료 급식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참 초라한 야외 잔치이고 참 초라한 음식입니다.
반면 바로 앞에 나오는 헤롯왕의 잔치를 볼까요?
그의 잔치는 너무나 화려합니다.
자신의 궁전에 지위가 높은 귀족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생일 잔치를 벌입니다.
산해진미가 다 나오고 풍악이 울려 퍼집니다.
예수님의 잔치와 헤롯의 잔치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차라리 예수님도 헤롯왕처럼 화려한 잔치를 베풀면 어떨까요?
예루살렘 빵장인이 만든 최고급 케익하고 갈릴리 어부가 잡은 최고급 랍스터를 하늘에서 뿌려주셨다면 어땠을까요?
충분히 그러실수 있는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하필 초라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사용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최선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늘에서 럭셔리한 케익과 랍스터를 내려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가진 최선의 것, 초라한 것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사르밧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최악의 가뭄속에서 그 여인이 가진 것이라고는 밀가루 한줌과 기름 몇 방울 뿐입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먹고 아들하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나타나 그것을 자신에게 주라고 요구합니다.
엘리야가 양심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과부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 음식을, 그녀의 최선을 엘리야에게 줍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녀의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가득 채워지고, 병에 기름이 가득 채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을,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내가 가진 가장 작은 것, 초라한 것일지라도 그것 전부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법사가 아니십니다.
단순히 내가 가진 작은 것을 가져가면 큰 것으로 만들어주신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작지만 나의 전부이며, 초라하지만 나의 최선입니다.
우리는 내 전부도 아닌 겨우 작은 것을 주님께 드리면서도 큰 것을 바랄때가 많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나는 온전히 헌신하지 않으면서 주님은 내게 최선을 다하시고, 최고의 것을 주시기를 바랄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둑놈 심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과연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내놓은 사람들인가요?
이제 예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41-43절입니다.
예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하시고 떡을 떼어 나눠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후 이 부분을 다시 기억하면서 어떤 장면을 연상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성만찬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두고 하셨던 일이 바로 이 일입니다.
성만찬에서 떡은 그 분의 몸을 의미합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주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육적인 양식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참된 양식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 양식이 바로 예수님이 자신입니다.
우리가 먹는 육적인 양식은 어차피 바닥나면 다시 배고파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자는 다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을 먹으라는 초청입니다.
어느 누구나 예수님을 먹고 하나님 나라 잔치의 풍성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헤롯의 잔치에 비하면 겉으로 보기에 참 초라한 잔치입니다.
그러나 헤롯의 잔치와는 비교할수 없는 하늘의 잔치입니다.
헤롯왕의 잔치를 보십시오.
겨우 소수의 귀족들이 음흉한 의도를 갖고 참석한 잔치입니다.
그곳에서 방탕하게 먹고 마시며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살로메, 즉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춰서 침례요한의 목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음식이 올라가야할 쟁반에 피가 철철 흐르는 침례요한의 목이 올라왔습니다.
백성을 돌보고 먹여야할 목자인 왕이 오히려 자기 양을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피로 물든 잔치, 욕망으로 점철된 잔치일 뿐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잔치를 보십시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초라한 잔치입니다.
궁전이 아닌 풀밭에 앉아있고, 산해진미가 아닌 빵과 물고기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잔치는 어느 누구나 올수 있는 잔치입니다.
예수님 생명으로 가득찬 잔치입니다.
쉼과 회복이 있는 하늘의 잔치입니다.
그럼 누가 참 목자입니까?
누가 참 왕입니까?
천국잔치를 베푸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돌봐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픔과 고통이 아에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도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럽고, 힘겨운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 왔을뿐 아직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헤롯의 잔치가 여전히 유혹거리입니다.
화려한 궁전에 살고, 산해진미를 먹고싶은 욕망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누군가를 피 흘리게 하더라도 내가 높아지고 싶어합니다.
과연 우리의 숨은 속마음은 무엇입니까?
헤롯의 잔치에 초청받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초청받기 원하십니까?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빈들이고 광야입니다.
우리를 배고프고, 외롭고, 공허하고, 방황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우리를 빈들의 마른풀로 만드는 곳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얘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셔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서 내주신 분이십니다.
이제 그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 최선의 것인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믿음으로 드릴때 주님은 일하십니다.
그럼 내가 가진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소유일수도 있고, 내가 가진 능력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온전히 주님께 드릴때 주님은 일하십니다.
빈들,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회복과 쉼의 풍성한 생명의 잔치를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이 땅에 이미 온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누리고, 아직 오지 않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 잔치를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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