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맛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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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사무엘상 1:12-18
“기도의 맛을 알라”
2022. 2. 25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한나의 기도 장면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기에 앞서서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면, 한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니까,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의 지금 마음 상태가 어때요? 마음이 괴롭다는 것이죠. 마음이 괴로워서. 여기서 괴롭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마라” 라는 말입니다. 마라. 출애굽기에 보면, 마라가 나오죠. 백성들이 사흘 동안 물을 먹지 못하고 광야 길을 걷다가 어느 지역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땅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마라는 ‘쓰다’라는 말입니다. 사흘 동안 물도 못 마시고 걸었다면 갈증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바닷물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일 텐데, 써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면, 그 물이 얼마나 고약할 정도로 썼겠습니까? 입에 대지도 못할 정도로, 혀를 대지도 못할 정도로 썼다는 것이죠. 그게 마라입니다.
또 룻기에 보면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나오는데요. 나오미가 남편도 잃어버리고, 두 아들도 다 잃어버리고, 처량하게 며느리와 함께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죠. 베들레헴에 가니까 주민들이 나오미를 알아보고 “나오미가 아니냐” 수군거리니까, 나오미가 ‘앞으로는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불러라.’ 이렇게 말을 해요. 나오미는 본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이 너무도 괴로워서 앞으로는 나를 기쁨이라고 부르지 말고, ‘괴로움’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겁니다. 나를 ‘마라’라 불러라.
마음이 너무도 괴로워서, 남편도 잃고 자식도 잃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여인의 그 쓰디쓴 마음을 “마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너무도 괴롭고 써서 누구도 그 마음에 손을 대지 못하고 위로하지 못합니다. 쓴 물에 혀를 대지 못하는 것처럼, 그 마음에 손을 대지 못해요. 그래서 그녀의 남편도 그를 위로하지 못하죠.
사무엘상 1장 8절을 보면, 남편 엘가나가 어떻게든 한나를 위로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사무엘상 1장 8절을 봐 볼까요?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지금 보면 엘가나가 얼마나 남편으로서 훌륭합니까? 100점짜리 남편이죠. 매년 여호와께 올라가 예배하는 모범적인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자상한 남편이에요.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함에도 내치지 않고 오히려 더 챙겨주고, 그녀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이 말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이 말은 한나의 현재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위로하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현재를 위로하는 말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위로를 해요. ‘우리 낙심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분명히 얼마 안 있어서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거야. 소망을 가지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이렇게 위로를 하겠죠. 이것이 현재를 위로하는 말입니다. 현재를 위로하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위로는 자칫 잘못하면 더 큰 아픔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그런 소망을 가졌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결국에 더 큰 절망만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는요. 차원이 다른 위로를 합니다. 현재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위로를 해요. 어떤 위로입니까? ‘당신이 앞으로 영영 아들을 낳지 못한다 해도 상관 없다. 당신에게 내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나만 보고 살아. 내가 열 아들보다 더 큰 기쁨과 사랑을 줄게.’ 이런 위로를 하고 있어요. 현재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미래에도 아들을 낳지 못할 것을 생각해서 한나의 앞으로의 인생까지도 위로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때 당시에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은, 집에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어요. 그럼에도 엘가나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한나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남편이죠.
그러나 그런 훌륭한 남편의 위로에도 한나의 마음이 위로받지 못해요. 너무도 마음에 괴로움이 커서. 말로 하는 위로로는 그녀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아까 10절에서 봤던 것처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기도를 하나님께 하고 있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한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등장을 하죠. 바로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나가 그곳으로 와서 기도하며 통곡을 했어요.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엘리가 한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12절에 보니까,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엘리가 한나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왜 입을 주목했을까요? 지금 한나의 모습이 이상하거든요. 13절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요. 13절을 봐 볼까요?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한나의 입을 주목한 이유는 바로 이겁니다. 한나가 입술은 달싹달싹 움직이는데, 음성이 들리지 않아요. 무슨 립싱크 하는 것도 아니고, 뻥끗뻥끗 입술만 움직이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겁니다. 분명히 조금 전만 해도 통곡을 하고 소리 내면서 울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벙어리는 아니라는 건데, 벙어리도 아니면서 입만 뻐끔뻐끔 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만히 입을 주목하여 보다가 내린 결론이 뭡니까?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는 한나가 포도주를 먹고 취해서 지금 주사를 부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통곡을 하다가 입만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엘리가 한나를 오해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도 있었는데요. 그것은 이때 당시에 제사를 드리는 문화에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제사는 거룩하고 엄숙하게 드리는 것이죠. 그런데 이때 당시의 제사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지금, 엘리 제사장이 있는 시대는 시대적으로 구분을 할 때 사사 시대로 분류가 되는데요. 사사 시대 하면 한 마디로 어떤 시대입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 자기들 멋대로 사는 시대가 바로 사사 시대였어요.
그런 시대다 보니까 제사의 모습도 상당히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면, 특별히 화목제를 드리고 나면, 그 뒤에 그 화목제물을 그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나눠서 먹을 수가 있는데요. 레위기에 보면 화목제물은 제사장과 그 제물을 드린 사람이 각각 나눠 가지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화목제를 드리고 나면 그 제물을 함께 나눠 먹으면서 즐거운 잔치를 벌였습니다. 화목제는 말 그대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감사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다른 제사들과는 다르게, 보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드려지고, 또 그 제물을 같이 나눠 먹으면서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어요. 모세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입니다. 나쁜 게 아니에요.
엘가나의 집이 드린 제사도 아마 화목제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드리고 나서 계속 먹는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봤던 사무엘상 1장 8절 말씀에 보면,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면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이런 말을 했어요. 또 밑에 9절에 보면,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을 토대로 볼 때, 엘가나와 그 가족이 드린 제사는 화목제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본래 화목제의 의미에 맞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너무 과도하게 즐기지 않는 올바른 잔치를 벌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나가 기도를 다 마치고 돌아가서 “먹었다” 라고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거든요.
오늘 본문 18절을 봐 볼까요?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가 기도를 다 하고 나서 집에 돌아가 먹었어요. 그리고 먹고 나서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습니다. 굳이 여기서 또 먹었다는 말을 쓴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집안 식구들이 화목제물을 먹을 때 혼자 먹지 않고 기도하러 왔다가, 이제 모든 근심이 사라져서 마음 편히 집에 가서 먹었다는 의미인 것이죠. 그리고 그녀가 먹고 나서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다는 표현을 볼 때, 그들의 잔치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잔치였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가나의 집이 연 잔치는 전통적인 올바른 잔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제하면서 올바른 잔치를 하는 집안이 이 시대에 흔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 시대는 사사 시댑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 그래서 제사도 제멋대로, 잔치도 제멋대로 벌이는 시대였어요.
엘가나의 집이 특별한 케이스죠. 거의 대부분의 집은 절제 없이, 무분별하게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과음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일부가 여호와의 전까지 와서 주사를 부리는 일도 있었을 거예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 아닙니까?
사사 시대는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벌어지는 시대였습니다. 사실 술 먹고 성막에 와서 주사 부리는 정도는 어쩌면 애교에 불과한 일이었어요. 나중에 사무엘상 2장에 가서 보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의 신분으로 간음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충격적인 것은 누구와 간음을 하는가 하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간음을 합니다.
사무엘상 2장 22절을 봐 볼까요?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제사장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을 합니다. 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이 정확히 어떤 직무를 맡은 여인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여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들이 제사장들과 동침을 해요. 여러분, 이것이 사사 시대가 얼마나 타락한 시대였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모습입니다. 이 정도로 타락했어요. 그런 시대다 보니까 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정도는 사실 애교죠 애교.
그래도 엘리가 자기 눈앞에 술 취한 여자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디 거룩한 회막 앞에 와서 주사를 부리나? 안 봤으면 몰라도 봤는데 모른척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아주 따끔하게 혼쭐을 내야 겠다 생각하고 한나를 책망합니다.
뭐라고 책망을 합니까? 오늘 본문 14절을 봐 볼까요?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엘리가 한나에게 포도주를 끊으라! 책망을 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취하여 있을래? 포도주를 끊으라!
여러분, 엘리는요. 그래도 나름대로 제사장으로서 할 도리를 한 겁니다. 정말로 타락한 제사장이었으면 술 취해서 주사를 부리든 말든 신경이나 썼겠습니까?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술 취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따끔하게 훈계를 하지 않습니까?
엘리가 백성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일말의 책임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엘리가 성품적으로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었을지라도, 그의 영이 너무도 어두운 상태였다는 사실입니다.
엘리는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나의 진실된 기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아들들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말이 등장하는데요.
15절에 보면, 한나가 엘리에게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하죠. 그러면서 밑에 16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16절을 봐 볼까요?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이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한나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여기서 이 악한 여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빠트 벨리야알” 이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벨리알의 딸’ 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벨리알은 불량한 사람, 이라는 뜻인데요. 행실이 불량하고 믿음이 없이 허랑방탕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한나는 자신이 벨리알의 딸이 아니라고 항변했어요. 나는 벨리알의 딸이 아닙니다. 불량스럽게 세월을 허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뜻인 거죠.
그런데요. 이 벨리알이라는 말이 이 뒤에 사무엘상 2장에 다시 한 번 등장을 하는데요. 누구에게 이 말이 사용되는가 하면, 바로 엘리의 아들들에게 사용이 됩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엘리의 아들들이 행실이 나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베네 벨리야알”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까 한나는 “빠트 벨리야알”이었는데, 지금은 “베네 벨리야알”입니다. 베네는 아들들이라는 말이에요. 따라서 베네 벨리야알이 무슨 말이겠어요? “벨리알의 아들들” 이라는 말입니다.
이 12절 말씀이 너무도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엘리의 아들들이 사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벨리알, 불량한 자의 아들들이라는, 너무도 충격적인 구절입니다.
그는 한나를 벨리알의 자식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의 친자식들이 벨리알의 자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지금 엘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인지를 아시겠죠?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도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이 어떤 상태인지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요.
이것이 한 시대의 영적 리더자라고 하는 엘리의 현주소였습니다. 여러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영적인 리더자가 이토록이나 영적으로 어둡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백성들을 올바르고 이끌어야 할 터인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엘리가 이토록 영적으로 어두워졌을까요?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을 찾아 여호와의 전에 와서 통곡하며 기도하는데, 왜 그의 영이 이토록이나 어두워서 그것을 알아보지를 못할까요?
제가 앞서서 이미 엘리가 한나를 오해한 이유들을 말씀을 드렸는데요. 첫번째는 한나의 모습이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두번째는 이 시대가 너무도 타락해서, 정상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그런 문화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세 번째는 그의 영이 어둡기 때문이었죠.
여러분, 저는 이 세 가지 이유 이외에 네번째로, 엘리가 한나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이유가 왜 엘리가 이토록 영이 어두운지를 포함해서 설명하는 이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엘리가 한나를 오해한 이유, 그리고 그의 영이 이토록 어두운 이유. 여러분, 그 이유는요. 엘리가, 한나와 같은, 그런 기도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나처럼 마음이 너무도 괴롭고 사무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차마 입으로 소리내지 못하고 하나님께 속으로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그런 기도를, 그는 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해봤다면 오해했겠습니까? 아, 이 여인이 마음이 괴로워서 기도하러 왔구나. 진작에 파악하고 가만히 그녀를 위해서 기도해줬겠죠.
하지만 엘리는 그런 기도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기도를 방해하고 책망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그 아픔의 깊이, 마음의 괴로움, 조금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과거에 TV 광고 중에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샘표간장” 이런 광고가 있었는데요. 이 광고 문구처럼, 우리가 기도의 맛을 봐야 기도의 맛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기도의 맛을 알라.”
여러분, 기도의 맛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맛은요, 기도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기도의 맛을 알아요. 저는 우리 국동제일교회가 기도의 맛을 아는,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이의 기도를 이해하고, 그의 아픔을 공감하며, 책망이나 정죄가 아닌, 중보의 기도를 해줄 수 있는 교회, 말로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진정으로 기도로 위로할 수 있는 교회.
저와 여러분이 그런 교회, 그런 기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