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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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요한복음 16:1-3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022. 10. 21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정말로 실족을 하게 되는 큰 문제들도 있어요. 실족은 헬라어로 “스칸달리조”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장애물을 놓아서 걸려 넘어지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넘어지기 싫다고 해서 안 넘어지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나를 넘어뜨리려고 장애물을 놔 둡니다. 장애물 하나 넘어서 안심하고 있으면 앞에 또 있어요.
여러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오늘도 사단은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아무리 담대하고 은혜가 충만한 사람도, 문제를 계속해서 만나다 보면 실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우리보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우리가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 동안에 사단은 두 개를 준비해요. 두 개를 해결하면 다섯 개를 준비합니다. 그러니 실족할 수밖에 없죠.
우리를 실족하게 만드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중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지키고자 할 때 다가오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1 더하기 1이 2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1더하기 1이 2라고 했다가 핍박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2인 것이 당연한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2가 아니라고 한다면, 더이상 2라고 말할 수 없게 되겠죠.
이처럼 너무나도 부당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납니다. 과거 19세기 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19세기 초, 1840년대에 유럽 오스트리아에 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 의사의 이름은 제멜바이스였어요. 그는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그가 일하는 산부인과에는 분만실이 두 개가 있었는데, 유독 한 분만실에서 아이를 낳은 산모들의 사망률이 다른 분만실보다 세 배 가까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하고 봤더니, 산모가 더 많이 죽는 분만실은 주로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돌보고 있고, 덜 죽는 분만실은 여자 산파들이 돌보고 있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무래도 의대생들이 다 남자다보니까 좀 더 투박하고 거칠게 산모를 돌봤기 때문에 더 많이 죽는 것이 아니냐, 라고 생각을 했어요.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전문적으로 의술을 배운 의대생들인데, 산모를 더 죽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제멜바이스는 다른 생각을 했어요. 그가 가만히 관찰을 해보니까, 의대생들이 분만실에 들어오기 전에 해부실에서 시체를 해부하는 실습을 하고 오거든요. 그러니까 시체를 만진 손으로 산모를 돌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시체로부터 뭔가 좋지 않은 것이 의대생들의 손에 옮겨붙어서 산모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오늘날에 우리가 볼 때는 정확한 생각이죠. 시체로부터 옮겨온 것. 이게 뭡니까? 바이러스죠, 바이러스. 그것이 산모들에게 전달되니까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당시만 해도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바이러스라는 이름도 없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위생에 대한 개념도 없죠.
오늘날에 우리는 코로나 감염을 막기 위해서 여러 방역수칙들을 지키는데, 그 중에 가장 첫번째로 하는 게 뭡니까? 손을 씻는 겁니다. 비누칠해서 손 깨끗이 씻고, 또 곳곳에 손소독제가 구비되어 있어서 그걸로 손을 소독합니다. 그렇게 해서 손에 묻은 바이러스를 제거해요.
하지만 1840년대에는 사람들이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손을 씻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손을 씻으면 손을 보호하는 어떤 보호막 같은 것이 씻겨나가서 전염병 같은 게 손으로 쉽게 들어온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리고 뿐만 아니라, 특히나 의사들에게 있어서 손은 더러우면 더러울 수록 고결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환자들을 돌보느라 손에 피가 묻고 고름이 묻어서 더러워지면 더러워질 수록 열심히 헌신을 한 참된 의사의 상징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손을 씻어야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손을 씻어야 된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때 제멜바이스가 손을 씻자고 주장을 합니다.
의사의 손에 뭔가 좋지 않은 것이 옮겨와서 환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가 손을 씻자. 이것을 주장했어요. 우리에게는 이 주장이 당연한 말이죠. 당연히 손을 씻는 것이 맞아요. 그가 아주 올바른 말을 한 겁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제멜바이스의 말이 미친 사람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비난을 했어요. ‘손을 씻는다고 병에 안 걸린다는 것이 말이 되냐? 손을 씻으면 더 병에 잘 걸리고, 허약해진다!’ 이러면서 제멜바이스를 핍박했습니다.
동료의사들도 그를 비난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어요. 손을 씻자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결국에 제멜바이스는 산부인과에서 해고를 당했고, 정신병원에까지 갇히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병원에서 다시 나오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19세기 초에 한 의사에게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외쳤지만, 그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정신병원에까지 갇히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단지 그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깁니다. 우리도 지극히 당연한 일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많이 완화가 됐지만, 몇 달 전만 해도 굉장히 힘들었죠. 이 코로나 시국에 무슨 예배를 드리냐? 교회 때문에 더 코로나가 확산되고 문제가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교회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말도 일리는 있어요. 방역수칙도 어기고 무조건 집회하면서 확진자를 발생시키는 그런 교회들도 더러는 있습니다. 그런 것은 잘못된 거죠. 국가의 방침과 사회질서를 따르면서 이웃들에게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도록 지혜롭게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뉴스로 많이 접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안전하게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방역을 하고 거리두기를 하고, 유튜브로 병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비난해요. 그 사람들은 그저 교회가 싫은 거죠. 코로나 이전에도 교회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코로나라고 하는 좋은 핑계거리를 가지고 더 비난을 합니다. 마치 교회를 비난하는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 것처럼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에요. 예배를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굳이 예배를 드려야 하냐고 말하지만, 예배는 삶의 목적이에요. 목적을 버리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저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핍박하고 손가락질해도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제멜바이스가 진실을 말했다가 정신병원에 갇힌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목적인 예배를 지킴으로써 핍박을 받습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죠.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로 받게 될 고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지금 보면 제자들이 당할 고난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출교를 당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먼저 출교는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로, 유대인들은 마을마다 회당을 만들어서 회당에서 예배를 하고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회당에서 재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은 예배당임과 동시에 지역사회의 중심이었어요.
따라서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지역사회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지역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속된 말로 왕따가 되는 것이죠. 저들과 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당에 출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면 결국 따돌림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교를 당하는 것은 무엇보다 두려운 징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출교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와 관련이 있는 것을 감춘 일화들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된 한 아들을 예수님이 보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바리새인들이 그 아들의 부모에게 찾아가서 너희 아들이 어떻게 해서 다시 보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 부모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뻔히 예수님이 고치신 것을 알면서도 모르겠다고 거짓말을 해요. 왜냐하면 이 당시에 예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은 출교를 당했거든요. 출교를 당할까봐 그게 두려워서 모르겠다고 한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9장 21절, 2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자기 아들을 예수님이 다시 보게 하셨는데, 출교당할 것이 무서워서 사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알면서도 부인하는 거예요. 출교를 당할까봐.
요한복음 12장 42절에도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관리들 중에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누구 하나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 못해요. 출교를 당할까봐. 그만큼 유대인들은 출교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냥 회당 그까짓 것 안 나가고 말지,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면 공식적인 모든 집회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유대인들과 물건을 사고 팔 수도 없습니다. 경제활동이 제한되는 거예요. 또 식사교제도 할 수가 없어요. 누가 집에 찾아오지도 않고, 내가 다른 사람 집에 찾아갈 수도 없어요. 인간관계도 제한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출교를 당하는 순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처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교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어요. 일반백성들은 물론이고 관리들까지도 다 두려워해요. 그런데 그 무서운 일을 제자들이 당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출교를 당할 것이다.
그런데 출교를 당하는 것만 해도 무섭고 떨리는데, 이걸로 끝이 아니죠. 또 무엇을 당해요? 죽임을 당합니다.
2절을 다시 봐 볼까요?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출교가 사회적인 죽음이라면, 이후에 당하는 고난은 실제적인 육신의 죽음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해요.
그런데 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제자들을 출교하고 죽이는 자들이 조금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기며 기뻐해요.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그래서 머지않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그 후에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또 예루살렘 교회가 파괴되고 잔멸되는 사건들이 벌이지게 되는 것이죠. 교회를 파괴하는데 앞장 섰던 사울이 나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박해하고 제자들을 잡아 죽이는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그들을 막을 수가 없어요.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데 누가 감히 그것을 막겠습니까? 오히려 모두가 다 칭찬하고 부추깁니다. 더 열심히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해라, 다 잡아서 출교하고 죽여라.
이것이 제자들이 당할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담담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끔찍한 내용이죠. 출교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이것은 제자들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일 겁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누가 크냐고 싸웠었거든요.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이 아니에요. 각자 바라보는 목적이 다릅니다. 기다리던 메시아, 그분이 이 나라를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다윗왕국을 재건하면 그 밑에서 명예와 권세를 얻고자 하는 각자의 목적이 있어요.
그런 제자들에게 너희가 출교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셔요. 제자들의 기대를 꺾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안 되죠.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위해서 더 열심을 가지고 경주할 수 있게 격려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더구나 이제 곧 예수님은 잡혀가시거든요. 언제 잡혀가십니까? 바로 내일 잡혀가셔요. 내일 새벽에 감람산에서 잡혀가십니다. 불과 하루도 채 남지 않았어요. 그러면 되도록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남겨진 제자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본분을 지킬 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허황된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어둡고 암울한 미래를 말씀하셔요. 마치 제자들의 기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결코 제자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밝히셨어요. 오늘 본문 1절을 봐 볼까요? 1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이 이렇게 어두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죠. 실족하지 않게 하려면, 희망적이고 밝은 말씀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반대로 너무나도 어둡고 절망적인 말씀을 하셔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미리 알고 대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기대를 하고 있다가 문제를 만나면 더 큰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일지라도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대비할 수 있어요.
출교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이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제자들에게 반드시 다가옵니다. 그 때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대비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밑에 4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셔요.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아멘.
예수님이 고난을 말씀하시는 이유. 제자들이 미리 대비하고 있다가 고난을 당하는 그 때가 올 때에, 이것을 기억함으로써 능히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요. ‘우리가 왜 출교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냐? 이게 지금 무슨 말씀이냐?’
뿐만 아니라 이후에 계속되는 말씀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밑에 5절에 보면, 예수님은 지금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떠나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예수님은 이제 곧 예수님을 보내신 이에게로 가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가셔요. 그런데 예수님은 일찌기 자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하신 바가 있죠. 요한복음 14장 2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실 곳은 저 하늘나라, 하나님이 계신 천국입니다. 그곳에 먼저 가셔서 제자들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밑에 요한복음 14장 5절에서 도마가 말해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가 이렇게 질문해요. 그런데, 지금 도마가 대표로 질문을 했지만, 도마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다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신다는 걸까?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어떻게 알까? 아무도 몰랐어요.
이렇게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나는 이제 곧 떠나야 하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그래서 더 말씀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사역의 시간이 다 끝나버렸어요. 오늘 본문 밑에 요한복음 16장 12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아직 제자들에게 가르칠 것이 많고, 당부할 것도 많고, 훈련시킬 것도 많은데, 지금은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직 그만한 믿음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면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가르치면 될 것 같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요.
이제 내일이면 예수님은 잡혀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끝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제자들이 내 뜻을 알고 기대만큼 쑥쑥 크면 좋겠는데 성장이 너무나 더딥니다. 아직도 누가 크냐고 싸우고 있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말해도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가르치고 싶지만,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할뿐더러 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떠나가셔도, 제자들을 인도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이죠. 요한복음 16장 7절에,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야 너희에게 보혜사가 오실 것이기 때문에,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놓고 떠나시는 일이 무척이나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셨을 테지만, 그러나 그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꺼이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물론 제자들은 이 말씀마저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저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가 하고 근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이 떠나시고 성령이 오실 때, 그때 제자들이 모든 것을 밝히 알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라는 미명하에 출교와 죽음을 비롯한 온갖 박해를 당하게 됐을 때에 그들이 담대하게 믿음을 지키게 되리라는 것 역시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사도 요한 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가 다 순교했어요.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창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잡혀가시고 나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로는 결코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고난을 당할 때는 많았지만, 그때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이 약속하신 것들을 기억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순교였어요. 세상의 관점으로는 실패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은 분명하게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람의 인생의 가치는 죽음에 있지 않아요. 죽음 이후에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천국과 지옥, 오직 두 가지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그 중에 천국에 가는 인생이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입니다. 심한 박해와 환난을 당하고 출교를 당하며 끔찍한 죽임을 당할지라도, 그가 예수님이 예비하신 천국의 거처에 갈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국동제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성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서두에 말씀드렸던 산부인과 의사 제멜바이스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멜바이스는 손을 씻자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함으로써 정신병원에 갇혀야만 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도 아니었고, 돈을 훔친 도둑도 아니었어요. 그저 산모들의 죽음을 막고,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진실을 말했던 것뿐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증언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진리 때문에 온갖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들도 다르지 않죠.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코로나 시국에 예배드리는 것이 맞느냐며, 비난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서 우리 삶의 목적이며 우리의 생명인 예배로 나아가는 것뿐인데도,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의 현실이에요. 장밋빛이 아니라 어두침침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힘든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환난 당할 때에 우리에게 하신 그 말씀들 기억하고, 그 말씀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능력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한다면,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이 도리어 우리를 연단하여 정금같이 나오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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