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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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요나 1:1-4
“말씀 앞에서”
2023. 9. 22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말씀 앞에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종해야죠. 이것은 상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선지자가 한 명 등장하는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런데 그가 말씀 앞에서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주죠.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에요.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봐 볼까요?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지금 이 말씀이 우리가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있는 말씀인데요. 사실은 다른 선지서와 차별되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서는 “누구누구의 말이라” 혹은 “누구누구가 무엇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런 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어떻게 시작을 해요?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렇게 시작을 해요. 이것은 히브리 문법에서 주로 사용하는 관용굽니다. 그런데 이 관용구를 언제 쓰는가 하면,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 써요.
예를 들면, 사무엘상 15장 10절 말씀과 같은 겁니다. 사무엘상 15장 10절을 봐 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요나서 1장 1절하고 형식이 똑같죠? 이처럼 하나의 사건이 끝나고 새로운 사건이 시작될 때 이런 관용구를 쓰는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누게에게 임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건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요나서 1장 1절에 썼어요. 상당히 이상한 일이죠. 왜냐하면 1장 1절 앞에 다른 에피소드가 없잖아요. 앞에 아무 내용이 없고 처음으로 에피소드를 시작하는데 연결관용구를 썼어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요나서 1장 앞에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용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말대로 한다면, 사실은 요나서 1장이 요나서 2장이고, 그 앞에 우리가 모르는 1장이 존재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말에 반대합니다. 지금 요나서 1장이 1장이 맞다. 그러면서 왜 1장 1절을 이렇게 연결관용구를 썼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요.
요나서 1장 1절을 이렇게 마치 하나의 사건이 끝나고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는 것처럼 쓴 이유. 그것은 이 요나서 전체가 요나의 사역에 있어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요나의 사역이 일단락되고, 새로운 사역의 에피소드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전까지 요나의 사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사역이었겠죠. 그런데 그 사역이 새롭게 바뀌는 거예요. 어떤 사역으로 바뀝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민족에게 선포하는 사역으로 바뀌는 것이죠. 그것도 그냥 이방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선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요나의 사역이 송두리째 바뀌는 전환점입니다. 아니, 그의 사역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그의 가치관, 그의 신앙관이 완전히 뒤바뀌는 전환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1장 1절을 이렇게 관용구로 써놓은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이제 이어서 오늘 본문 2절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나오는데요. 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의 새로운 사역이죠. 하나님이 이 새로운 사역을 맡기신 거예요. 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 3가지의 명령이 들어있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
그런데 사실은 그동안에 요나가 했던 사역과 다를 게 없어요. 지금까지 요나가 했던 사역입니다. 그동안에도 계속 이스라엘을 향해 일어나 가서 외쳤어요. 사마리아에 가서 외치라고 하면 사마리아로 가서 외치고, 실로에 가서 외치라고 하면 실로에 가서 외치고.
오늘 새롭게 주시는 사역도 똑같아요. 다만 그 장소가 조금 색다를 뿐이죠.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동안에는 이스라엘 내에서 외쳤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밖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요나가 받아들이지 않아요. 새로운 사역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제국이 이방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던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민족에게 향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이 가축만도 못한 이방민족, 그것도 우리의 원수인 니느웨를 향해서 갈 수 있단 말인가.” 요나의 입장에서는 이 명령을 따를 수가 없죠. 따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요나서 4장 3절에 보면, 실제로 요나가 그런 말을 합니다. 요나서 4장 3절에 요나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해요.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했으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라고 말을 해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나를 그냥 죽여주십시오.” 이런 말이죠. 그 정도로 이 사역이 하기 싫은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역자가 하고 싶은 사역만 할 수 있습니까? 저도 사역자로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어요. 잘하든 못하든 맡겨주신 사역을 수행해야 됩니다. 주일학교도 하고, 설교도 하고, 찬양인도도 하고, 방송실도 하고, 또 때로는 건축도 하고. 도대체 이런 일까지 해야 되나? 싶은 일까지도 해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죠. 우리 인생도 똑같아요.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돈도 벌어야 되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되고, 듣기 싫은 소리도 들어야 되고. 똑같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동안에 하고 싶은 사역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내 민족, 이스라엘을 향해서 마음껏 말씀 선포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 그에게 새로운 사역이 임했는데, 그 사역이 정말 하기 싫은 사역이에요.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해야죠. 사역자가 사역을 가려가면서 할 수 없어요. 하기 싫으면 교회를 떠나야지 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나가요 어지간히 하기 싫었던 모양이에요. 떠나버립니다. 3절 말씀을 같이 봐 볼까요?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아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요나가 한 행동입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는 따랐죠. 일어나 가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일어나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이죠.
1차적으로 어디를 향하여 갔습니까? 욥바를 향하여 갔어요. 그런데 그의 최종목적지는 다시스였습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에서 서쪽으로 무려 4,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아마도 다시스는 요나가 아는 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을 겁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자기가 아는 가장 먼 곳으로, 이스라엘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선지자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듣자마자 신속하게 말씀이 임한 자리를 도망친 거예요.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고, 듣기 싫은 말씀은 거부하는, 내가 하고 싶은 사역만 하고, 하기 싫은 사역은 피하는, 이런 모습은 결코 선지자의 모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의 자격이 없는 거예요.
다른 민족을 구원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도망쳤다는 것만으로도 요나는 너무나 실망스럽고 한심한 사람입니다.
애초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가 뭡니까?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났죠. 순종하려고 일어난 게 아니에요. 피하려고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욥바로 가고, 거기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서쪽으로 4,000킬로미터나 떨어진 멀고 먼 곳으로 도망치려고.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로 가라고 하셨어요? 니느웨. 니느웨는 이스라엘 동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정 반대편, 서쪽으로 서쪽으로 전력을 다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본래 가야 할 니느웨보다 다섯 배나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말이죠.
그런데 요나의 불순종이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하신 명령 중에 세 번째가 무엇이었습니까? 외치라. 외치라고 하셨어요. 말씀사역을 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요나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밑에 5절에 보면, 요나가 뭘 하고 있어요? 자고 있잖아요. 말씀을 전하라고 했는데 잠을 자요.
우리 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5절, 시작,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아멘.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그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듭니다. 깨어서 말씀을 선포해야 할 사람이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죠. 어떻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행동일 수가 있는지, 신기할 정돕니다. 참으로 이런 사람이 선지자인가, 하고 탄식이 절로 나와요.
그런데 우리가 더 탄식해야 하는 것은, 지금 이 요나가 보여주는 한심한 모습이, 단지 요나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요나는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런 백성들이 바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백성들 전체가 요나랑 똑같았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하고, 또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지지리 말도 안 듣고, 말썽만 피우면서 욕심은 또 얼마나 많은지, 다른 민족한테 조금만 신경을 쓰면 화를 내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막말을 하잖아요. 이런 백성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 아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심한 백성들을 대표하는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 하나 정반대로 행동하면서 욥바에서 배를 탑니다.
그리고 그런 요나를 하나님이 계속해서 쫓아오시는데요.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요나를 하나님이 내버려두지 않으세요. 바람을 던지고 폭풍을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여기 4절을 보면, 상당히 재밌는 표현을 볼 수가 있는데요. 4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4절 마지막에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이 문장을 일반적으로는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다” “거의 깨졌다” 이렇게 번역을 하는데요. 이 “거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힛셰바”라는 말입니다. 힛셰바, 이 말은 “생각하다, 판단하다, ~라고 여기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번역을 보다 단어 본래의 뜻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상당히 재밌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이 되는데요. “배가 깨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번역이 돼요. “배가 깨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이 깨지다 라는 말을 더 깊게 그 의미를 보면 “산산조각 나다” 라는 뜻이거든요. 어디가 좀 깨지고 부서지는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박살이 난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보면, “배가 산산조각 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말이에요.
이렇게 번역을 해서 4절을 다시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매우 색다르게 보여지죠. 마치 배가 하나의 인격체인 것처럼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하나님이 바다에 큰 바람을 던지셨고, 그로 인해서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폭풍은 배를 깨지도록 몰아가는데, 그 가운데 배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 완전히 깨질 것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망치는 판국에, 생명도 없는 한낱 미물에 불과한 배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깨지는 것을 원하시는구나, 그래 그러면 내가 깨져야지.’ 즉시로 순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배가 가진 사명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게 아니에요. 깨지는 것이 사명입니다. 산산이 깨져서 요나를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케 하도록 하는 것이 지금 배가 가진 사명입니다. 배에게도 사명의 전환점이 온 것이죠. 실어나르는 사명에서 깨지는 사명으로 바뀐 겁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충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비록 한낱 배에 불과하지만 선지자가 불순종하는 때에 배는 사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신을 내던져서 스스로 깨어져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배와 같이, 교회로서의 사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요나의 입장이었다면, 요나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볼까요. 하나님은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쿰” 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삶의 방식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습성으로부터 일어나서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쿰,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41절에서, 예수님이 회당장의 딸을 향하여 “달리다굼” 이라고 하셨을 때, 달리다굼, 굼이 바로 쿰입니다. 그리고 “달리다”, 본래 “탈리타”라는 말인데, 이 말은 소녀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달리다굼은 “소녀야 일어나라.”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죽어 있었죠.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미 소녀는 죽고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소녀를 향하여 탈리타쿰, 일어나라고 하셨을 때, 소녀는 생명을 얻고 죽음에서 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고민과 문젯거리에서, 인간관계에서, 질병에서, 모두 떨쳐버리고 쿰! “일어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그 말씀이 임할 때에 우리 모두가 그 말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인생의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는 겁니다. 새로운 에피소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에요.
그러면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비록 그 말씀이 따르기 싫고 거부하고 싶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리도전서 9장 27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아멘.
바울이 기껏 남들에게 복음 전해서 구원 받게 하고 나서 정작 내가 버림을 당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말해요. 왜냐하면 내 몸은 시도 때도 없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날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에요? 말씀에. 내 몸을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는 거예요. 여러분, 이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토록이나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게 얼마나 어려웠으면 자기 자신을 치겠어요.
쉬운 게 아니에요.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한낱 미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잖아요.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내 안락한 생활과 옛 습성을 따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록 깨지고 부서진다 할지라도,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