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승리하게 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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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역대하 25:1-16
“나를 승리하게 하시는 분”
2022. 10. 26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누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가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셔요. 하나님이 우리를 승리케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이 얻은 승리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방 신들이 준 것이라 착각을 하고 그 신들을 자기의 신으로 세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남유다의 아홉 번째 왕인 아마샤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아마샤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요. “아마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지금 말씀을 보면, 아마샤가 이십오 세가 되었을 때 왕이 되었고, 이십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남유다의 왕을 소개할 때 꼭 들어가는 것들이 있는데요. 왕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첫번째는 몇 살 때 왕이 되었는가, 두번째는 몇 년을 다스렸는가를 기록을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어머니가 누구인가를 기록합니다. 이 왕의 어머니가 누구인가? 이것은 남유다 왕조만의 독특한 점이에요. 북이스라엘의 왕을 소개할 때는 어머니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남유다의 왕들만 어머니를 소개해요. 왜냐하면 남유다의 왕조가 다윗 왕조이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가 중요해서 기록을 한 겁니다.
북이스라엘은 엄밀히 따지면 다윗 왕조가 아니죠. 솔로몬의 신하가 왕이 되면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여기는 왕조 자체가 정통성이 없어요. 그래서 왕의 어머니가 누구든 상관이 없는 거죠. 반대로 남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 쭉 이어서 내려오는 정통 다윗 왕조이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남유다 쪽에만 어머니를 기록하고 있어요.
여러분, 왜 왕의 어머니가 중요할까요? 다윗 왕조를 지켜나감에 있어서 어머니가 왕의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누구인가, 어머니가 어느 지역 출신인가, 누구의 딸인가. 이러한 어머니의 정체성이 왕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큽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보면 그 밑에서 자란 왕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를 대략적으로 간파할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마샤 왕, 이 왕의 어머니를 보니까, 이름은 여호앗단이고 출신지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냥 딱 이것만 놓고 봐도 어머니가 신앙적인 사람이었을 것으로 우리가 추측을 할 수가 있죠. 왜냐하면 예루살렘 출신이고, 또 이름을 보니까 여호앗단, 여호앗단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신다” 라는 뜻이거든요. 이름도 아주 신앙적으로 좋은 이름이에요.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면, 모르긴 몰라도 신앙적으로 나름대로 좋은 환경이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짐작대로 아마샤가 꽤 괜찮게 성장을 합니다. 2절을 봐 볼까요?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마샤의 평가가 어떻습니까? 꽤 좋아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물론 그 뒤에 반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정직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영향력입니다.
어머니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왕이 시작부터 엇나가지 않고, 정직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왕들을 한번 잠시 살펴봐 볼까요?
역대하 12장 13절을 보면,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르호보암 왕은 예루살렘에서 스스로 세력을 굳게 하여 다스리니라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 예루살렘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여 그의 이름을 두신 성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르호보암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여인이더라.”
르호보암의 어머니가 누굽니까? 암몬 여인 나아마. 솔로몬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 이방 나라들과 정략결혼을 많이 맺었는데요. 이때 결혼한 여인 중에 암몬 여인 나아마가 있었어요. 이 여인이 르호보암을 낳았습니다.
이것을 본다면, 과연 르호보암의 신앙이 어떻게 됐을지가 보이실 겁니다. 르호보암의 어머니 출신이 어딥니까? 암몬이죠. 암몬은 몰렉 신을 숭배하는 나랍니다. 성경에 몰렉이라고도 하고, 밀곰이라고도 하는 신인데, 르호보암의 어머니가 암몬 출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신을 숭배했을 거예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아들에게 몰렉 신앙을 가르치고 믿게 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 아들이 어떻게 성장을 했겠습니까? 역대하 12장 14절에 보니까,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
이것이 르호보암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악을 행하였다.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하였다.
지혜의 왕인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그 평가가 너무나도 안타까워요. 그가 제대로 된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했다면, 그의 일생이 악하게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만큼 한 사람의 신앙배경에 있어서 어머니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우리가 이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마샤는 신앙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도 알아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좋은 왕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는데요.
역대하 25장 3절과 4절을 봐 볼까요? “그의 나라가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하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지금 이 장면은 아마샤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장면입니다. 아마샤가 왕이 되기 전에 아마샤의 아버지인 요아스 왕이 죽었는데요. 어떻게 죽었는가 하면,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요. 그래서 침상에서 자다가 칼에 맞아 죽었어요. 그런데 반란으로 왕은 죽였지만 신하들이 정권을 장악하는데는 실패합니다. 그래서 다행히 요아스의 아들인 아마샤가 왕이 되어서 복수를 하는 거죠.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할까요? 신하들이 역모를 일으켜서 임금을 죽였어요. 그러면 이 신하들을 어떻게 합니까? 신하들을 다 죽이고, 그 가족도 죽이고, 삼족을 멸하고, 심한 경우에는 구족을 멸하기도 하잖아요.
그만큼 역모는 엄청난 죕니다. 다시는 누구도 역모를 꿈도 꾸지 못하도록. 아주 끔찍하게 본보기를 보여야 돼요.
그런데 아마샤는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감정대로 행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반역의 당사자들만 죽였습니다. 반역을 일으킨 신하들만 죽였어요. 아마샤의 입장으로서는 최소한 그 자식들까지라도 다 죽여야 마음이 놓이지 않겠습니까? 이 자식들이 커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또 반역을 일으킬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식들을 살려뒀어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를 따른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감정보다, 또 앞으로 찾아올지 모를 위험보다, 말씀을 우선하고 따른 것. 이것이 아마샤가 정직하게 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바른 신앙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가 어머니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정직함을 배웠기 때문에 이처럼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믿음의 유산을 잘 전수해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땅도 좋고 집도 좋지만, 가장 먼저 믿음을 물려주어야 돼요.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신앙의 유산을 잘 전수해주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마샤 왕은 어머니 덕분에 정직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2절에 어떤 평가가 뒤에 덧붙었어요?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과정 가운데 신앙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가 막 임기를 시작했을 때는 아주 정직하고 훌륭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믿음이 점차 흐려졌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 믿음을 잃어버리고 악을 행하는 모습이 나오게 됩니다.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보자면, 오늘 본문 5절에 보니까, 아마샤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 군대를 소집합니다. 에돔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군대를 소집해요. 5절에 보면요. “아마샤가 유다 사람들을 모으고 그 여러 족속을 따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을 세우되 유다와 베냐민을 함께 그리하고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여 창과 방패를 잡고 능히 전장에 나갈 만한 자 삼십만 명을 얻고.”
아마샤가 군대를 소집하는데 그 숫자가 몇 명입니까? 삼십만 명. 어마어마한 숫자예요. 웬만한 작은 나라 정도의 규몹니다. 그런데 군대가 삼십만이 끝이 아니에요. 밑에 6절을 보면 북이스라엘에서 은 백 달란트를 주고 용병을 십만 명 고용합니다. 그러니까 총 40만 명이죠. 40만 명이면 정말 어마어마한 숫잡니다.
우리 여수시 인구가 작년 10월 기준으로 27만 7천명입니다. 그리고 광양 인구가 15만 천 명이거든요. 여수하고 광양을 합치면 42만 8천명쯤 되는데, 여수시민과 광양시민 전체를 합쳐야 40만이 채워지는 거예요. 그만큼 많아요.
그 많은 군사가 광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든든합니까? 아마샤도 그랬을 거예요. 내가 이 군대를 이끌고 승리하리라! 승리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이 가득했을 겁니다. 그 부푼 가슴을 안고 이제 출정을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아마샤를 찾아옵니다.
본문 7절을 봐 볼까요?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이스라엘 군대를 왕과 함께 가게 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곧 온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나니.”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를 찾아왔는데,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 고용해 온 용병 십만 명이 있죠. 그 십만 명과 함께 가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곧 온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이 됐죠. 이때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남유다의 왕이 됐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됐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왕이 되자마자 죄를 지었는데, 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어서 경배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왕이 되자마자 우상을 만들고 우상숭배를 한 거예요. 이것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왕을 평가할 때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났는가를 평가합니다. 남유다는 어머니가 소개된다면,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죄를 소개해요.
“그가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이런 구절들이 자주 나오죠. 이때 여로보암의 죄가 바로 이겁니다.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 죄.
바로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북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찾아와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가지 말라고 말을 한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군대는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은 커녕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그래서 8절에 이렇게 말을 해요.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적군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가서 힘써 싸워봐라. 그래봤자, 하나님이 당신을 패배하게 하실 것이다. 이런 말이에요.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도 승리를 바라느냐는 말입니다.
군대가 10만 명이 더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느냐 함께하시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아마샤가 그래도 나름대로 말씀을 알고 하나님 경외할 줄을 아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악한 왕이었다면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겠지만, 그래도 아마샤는 귀를 기울여요.
다만 내가 십만 명의 용병을 고용하면서 투자한 돈이 있다보니까 그게 아까운 마음이 있어요. 얼마를 투자했냐면, 무려 은 백 달란트나 투자를 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왕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까…”
어찌할까. 아깝다는 것이죠. 그 돈을 다 어찌할까? 여러분, 은이 한 달란트면 무게가 약 34kg 정도 됩니다. 그것이 백 달란트니까 3,400kg.. 3.4톤이죠. 이 많은 돈을 용병에 투자했는데 이것을 그냥 다 날리라고 하니까 얼마나 아깝겠어요. 그래서 물어보는 겁니다. 백 달란트나 줬는데 이것을 어찌할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뒤에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은 백 달란트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실 수 있다는 겁니다. 돈 그까짓 것 아까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할 수 있어요. 에돔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손해가 있고 피해가 있을지라도, 그보다 더 충만하게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주실 수 있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구하는 대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국동제일교회에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마샤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었어요. 과감하게 은 백 달란트를 포기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고향으로 다 돌려보냈어요. 그리고 자기 군대 30만 명만 데리고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니까, “아마샤가 담력을 내어 그의 백성을 거느리고 소금 골짜기에 이르러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였습니다. 또 12절에 보면, “유다 자손이 또 만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밀쳐 내려뜨려서 그들의 온 몸이 부서지게 하였”습니다.
전쟁을 지금 승승장구 하고 있는 것이죠. 전투를 벌일 때마다 만 명을 죽이고 만 명을 사로잡고, 계속해서 이기고 있어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더니 승리의 영광이 아마샤와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좋지 않은 사건이 하나 발생을 해요. 13절에 기록된 사건인데요. “아마샤가 자기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낸 군사들이 사마리아에서부터 벧호론까지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사람 삼천 명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하였더라.”
아마샤가 돌려보낸 이스라엘 군사 10만 명. 이 군사들이 얌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이 일이 발단이 돼서 나중에 유다와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굉장히 황당하죠. 은을 백 달란트나 주고 일도 안 시키고 돌려보냈으면, 고마워서 동네를 청소라도 해야 할 판에, 오히려 성읍들을 약탈하고 사람을 삼천 명이나 죽이고 물건을 노략해 가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상종하지 말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너무나도 악하기 때문에 가까이 할 수가 없어요. 같이 싸우러 갔다가는 이 사람들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같이 가지 않아서 에돔과의 전쟁은 승승장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돔과의 전쟁 뒤에 곧바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돼요. 우리 성읍들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였으니까, 당연히 복수를 해야죠.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요. 여러분, 누가 이길까요? 남유다가 이기겠습니까? 아니면 북이스라엘이 이기겠습니까?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는 남유다의 기세를 보면, 당연히 남유다가 이기겠죠.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로 일어납니다. 북이스라엘이 이겨요.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북이스라엘과는 함께하지 않으시고, 남유다와 함께하시고 계신데, 왜 패배할까요?
만약에 지금처럼 아마샤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정직함을 지킨다면 당연히 승리할 수 있겠죠.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만약에 지금 붙으면 백이면 백 아마샤가 이겨요. 그런데 문제는 아마샤의 신앙이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섬기지만 이제 곧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섬기는 죄에 빠지게 돼요.
그것이 오늘 본문 14절의 내용입니다. 14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마샤가 전쟁에 승리를 했는데, 갑자기 거기 있던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요. 그리고 그것들을 자기의 신으로 세웁니다. 이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에요.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신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어요. 도대체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이렇게 신앙이 변질되어서 우상숭배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왜 패배한 나라의 신을 섬기게 됐는가?
정말 궁금한데,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안 나오기 때문에. 다만 추측하기로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 수가 있는데요. 하나는 아마샤가 전쟁에 승리한 것을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잘나서 승리한 것이라는 교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싸울 때마다 만 명을 죽이고, 만 명을 사로잡고 하면서 계속해서 이기니까 교만이 싹튼 거죠.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샤가 에돔에 가서 우상들을 보니까 그것이 보기에 좋아보였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일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데,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보니까 재미가 있고 흥분이 되는 거죠. 그래서 유다로 돌아올 때 그 우상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이렇게 추측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에요. 성경에 없기 때문에 여전히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우리만 가진 것이 아니었어요.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아마샤에게 한 선지자가 찾아와서 질문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왜 패배한 신에게 구하느냐는 겁니다. 왕이 구해야 할 신은 여호와 하나님인데, 왜 힘도 없고 생명도 없는 거짓 신을 섬기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이렇게 물어보지만, 사실은 이것은 아마샤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아마샤가 깨닫고 돌이키라는 거예요. “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저 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패배한 것들인데, 왜 내가 저것들에게 구하고 있을까?” 이렇게 깨닫고 회개하도록 아마샤에게 언질을 주고 있는 겁니다.
사실 지금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어요. 빨간색 글씨가 있죠?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지금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단번에 아마샤를 쳐서 죽이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왜냐하면, 그가 본래는 정직한 왕이었기 때문에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가 돌이켜서 다시 정직한 왕이 될 수 있도록 선지자를 보내서 기회를 주신 거예요.
그러나 그 기회를 아마샤가 어떻게 합니까? 걷어차버립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6절인데요. 16절 상반절에 보면, 아마샤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선지자가 아직 말을 하고 있는데, 왕이 말을 탁 자르고 들어와서 자기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쉽게 말해서 이런 말입니다. “네가 감히 왕을 가르치려 들어? 맞을래?”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선지자가 이 뒤에 왕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16절 하반절에,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주신 한 번의 기회를 왕이 걷어차버렸기 때문에 이제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를 쏟으셔요. 어떻게 쏟으시는가 하면, 왕을 멸하시는 진노를 쏟으셔요.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이스라엘과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아마샤를 패배하게 하십니다. 예전 같았으면 북이스라엘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거든요. 그런데 허무하게 패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 여기서 아마샤를 죽이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멸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죽이는 차원이 아니에요.
권력, 건강, 명예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빼앗고 빼앗고, 다 빼앗은 후에 마지막으로 생명까지 거두어가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멸하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실제로 아마샤의 최후가 그래요.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를 합니다. 군대를 잃은 거죠. 그리고 전쟁에 패배한 아마샤는 포로가 되어서 이스라엘로 잡혀갑니다. 이제는 명예도 잃어버렸어요. 왕이 아니라 한낱 포로 신세가 되어서 적국에서 수치를 당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반역이 일어납니다. 자기 아버지 때 반역이 일어나서 아버지가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자기 대에도 똑같이 반역이 일어나요. 역대하 25장 27절을 봐 볼까요? “아마샤가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였으므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반역이 일어나서 권력도 잃고 도망치다가 저 멀리 라기스 땅에서 마침내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이것이 유다의 아홉번째 왕, 아마샤의 최후입니다.
그는 본래는 정직하고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신실한 어머니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이었어요. 그러나 아무리 정직하고 신실하더라도 작은 마음의 빈틈으로 교만이 들어오고, 세상이 들어오면, 그런 사람도 변질되고 맙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아마샤는 마귀에게 삼켜지고 말았어요. 그리고 그 결과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귀에게 삼켜지면 이토록 무서운 결말이 찾아옵니다.
과거에 얼마나 믿음이 좋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나의 믿음이 어떠한가? 지금 내가 은 백 달란트를 쫓고 있는가? 혹은 다른 우상들, 시간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에 시선을 뺏기고 믿음을 뺏기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믿음의 허리끈을 동여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여호와 하나님, 우리 주님만을 바라보고 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