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열릴 때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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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1:57-66
“입이 열릴 때”
2023. 9. 13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입이 열릴 때”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열 달 전에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서 그 벌로 벙어리가 되었던 사가랴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정한 때에 입이 열린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천사가 사가랴를 찾아와서 좋은 소식을 전했죠. 그때 사가랴가 들은 말이 뭐였어요?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네 아들이 주 앞에 먼저 와서 백성들을 준비하는 일을 할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죠.
하지만 사가랴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사가랴가 너무 늙었고, 또 그 아내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천사가 사가랴를 책망하면서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죠. 누가복음 1장 20절이 그 내용이에요. 한번 봐 볼까요? 누가복음 1장 2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사가랴가 안 믿은 대가로 벙어리가 됐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벙어리가 된 것은 아니고, 기한이 있어요. 언제까지인가 하면, “이 일이 되는 날까지”입니다.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벙어리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언이 성취되는 날까지죠. 이 일이 되는 날까지.
여기서 이 일은 무슨 일일까요? 당연히 아들이 태어나는 일이죠. 보다 정확하게는 아들이 태어나서 그 이름이 요한으로 정해지는 일입니다.
천사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이 요한으로 정해지는 것까지가 성취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사가랴가 언제 입이 열립니까? 아들이 태어나고 8일이 지난 뒤에 그의 이름이 정해졌을 때 입이 열리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의 예언은 하나도 허투루 내려오지 않습니다.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이 정확하게 내려오고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천사가 전해준 예언이 하나하나 정확하게 성취되고 있죠. 그리고 그 뒤에 했던 말들도 마찬가지로 성취됩니다. 요한이 주님 오시기 전에 백성들을 준비하는 일을 하리라. 이 역시도 나중에 성취되잖아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예언성취의 세밀함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는데요.
오늘 본문 57절을 보면,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 달이 찼다는 말이죠. 아기가 뱃속에서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서 열 달 뒤에 태어난 겁니다.
그리고 밑에 58절에 보면, 이웃과 친족이 출산 소식을 듣고 축하하기 위해서 찾아옵니다. 이 58절을 우리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아멘.
엘리사벳이 오랫동안 아이를 못 낳은 여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이웃과 친족에게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는 것이 가장 큰 기도제목 중에 하나였을 겁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이 더 나이를 먹고 아이를 낳기가 거의 불가능한 나이가 되면서 더이상 기도를 하지 않았겠죠.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사벳이 어느날 갑자기 아이를 낳은 거예요. 이웃과 친족들은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몰랐습니다. 누가복음 1장 24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임신 사실을 숨겼어요. 1장 24절에 보니까,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다섯 달 동안 임신한 것을 알리지 않고 집 안에 숨어 있었다는 겁니다. 아마도 혼자서 잠잠히 기도하면서 자신을 정결하게 지켰겠죠. 출입을 금하고 이 아이를 위해서 온전히 시간을 쏟은 겁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엘리사벳의 임신사실을 까맣게 몰랐어요. 아마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도 몰랐을 겁니다. 오직 엘리사벳의 친족인 마리아만 그것을 알았어요. 그것도 어떻게 알았냐면, 천사가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몰랐어요.
그러니 어느날 갑자기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오늘 본문 58절을 다시 보면요.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아기를 낳고 나서야 그 소식을 들은 겁니다.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낳으리라는 기대도 다 사라졌었는데,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보니까 정말로 예쁜 아들을 낳은 거예요.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사람의 힘으로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놀라운 마음을 안고,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은 또 한편으로 예언의 성취였어요. 누가복음 1장 14절에 보면,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런 말을 했거든요.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요한이 태어난 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함께 기뻐하리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대로 지금 이웃과 친족들이 와서 함께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출생부터 모든 것이 다 하나하나 예언을 성취해 가고 있어요.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의 성취를 향해 가는데요. 바로 아이의 이름에 대한 예언이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이것을 성취해야 돼요.
밑에 59절에 보면, 요한이 태어난지 8일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다시 사가랴의 집에 찾아오는데요. 유대인들의 관례에 따르면 아기가 태어난지 8일째 되는 날에 아기에게 할례를 해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죠. 그런데 이때 아기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할례를 행하고 나서 직후에 이름을 지어줘요. 딸은 할례를 하지 않기 때문에 딸은 태어나자마자 지어주지만, 아들은 할례 후에 지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전통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지을 때는 보통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적인 의미가 담긴 이름을 짓게 되는데요. 그렇다고 꼭 그런 이름만 짓는 것은 아니에요. 동물의 이름을 붙여주기도 합니다. 성경의 유명한 인물들 중에 드보라 선지자가 있죠.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뜻이에요. 또 선지자 요나,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이죠. 이처럼 동물의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식물의 이름이나 어떤 물건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식물의 이름으로는 다말이 있어요. 다윗의 딸이죠. 다말. 다말은 종려나무라는 뜻입니다. 또 물건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데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백부장 고넬료, 고넬료는 뿔이라는 뜻입니다.
이 밖에도 직업을 이름으로 붙이기도 하고, 신체적인 특징을 이름으로 짓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중구난방이에요. 특별한 규칙이 없이, 그냥 부모가 짓고 싶은 대로 짓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남유다가 멸망을 하는 대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 이름을 짓는 전통이 바뀌게 돼요.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자녀에게 친족의 이름을 물려주는 전통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갑자기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끌려가면서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고 혈통이 끊어지는 일들을 겪게 되니까 어떻게든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자녀에게 친족의 이름을 물려주게 된 거죠. 비록 가문이 보잘것 없이 쪼그라든다 할지라도, 조상들의 이름이 아들과 아들에게 이어지면서 계속 보존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이 갖고 있던 신앙과 명예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토록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친족들이 와서 아이의 이름을 뭐로 지으려고 합니까? 59절에 보니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아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주려고 하죠. 이때 당시에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친족들이 대신 지어주기도 했다고 그래요. 보통은 아버지가 이름을 짓는데, 때로는 어머니가 짓기도 하고, 또 친족들이 짓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친족들이 와서 이름을 짓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는 지들이 뭔데 왜 마음대로 남의 자식 이름을 짓고 그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보통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주거든요. 왜냐하면 그래야 헷갈리지 않으니까. 철수야, 하고 불렀는데 아버지하고 아들이 동시에 돌아본다고 생각해보세요. 너무 이상하잖아요. 아버지도 철수, 아들도 철수. 아버지가 죽었으면 모르겠는데, 아직 살아있단 말이죠.
지금 사가랴가 살아있거든요. 그런데 왜 아들에게 사가랴라는 이름을 주려고 했을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제가 이 이유에 대해서 많이 찾아봤는데, 명확한 답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뭔가 이유가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뭔진 모르겠는데, 뭔가 이유가 있어서 아들의 이름을 사가랴라고 지으려고 했나보구나.
그런데 이때 엘리사벳이 그것을 반대하죠. 내 아들을 사가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반대를 했어요.
그런데 그랬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어때요? 이상하게 생각을 해요. 61절을 봐 볼까요? 61절에 보니까,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아들에게 친족의 이름을 물려줘야 하는데, 우리 친족 중에는 요한이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아버지의 이름이 싫으면 다른 친족의 이름도 많은데, 도대체 요한은 누구냐?
사실 성경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신약에서 처음 등장을 하죠. 구약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없어요. 왜 없는가 하면, 요한이 헬라식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당연히 이름이 헬라식으로 쓰여질 수밖에 없어요. 요한을 헬라어 발음대로 하면 “이오안네스”라는 이름이 됩니다. “이오안네스” 빨리 하면 “요안네스”가 되겠죠.
그런데 요안네스는 헬라식으로 썼을 때의 이름이고, 실제 이름은 요안네스가 아니겠죠. 실제로는 당연히 히브리식 이름을 썼을 거예요. 지금 엘리사벳과 친족들도 히브리어로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의 이름을 말할 때도 당연히 요안네스라고 하지 않고 히브리식 이름으로 불렀을 겁니다.
자, 그러면 요안네스를 히브리어 발음대로 하면 어떤 발음이 될까요? 히브리어 발음대로 하면, “요하난”이라는 이름이 됩니다. 요하난. 본래는 요하난인데 헬라어로 바꾸다 보니까 요안네스가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죠? 요한의 이름이 본래는 히브리어로 요하난이었다. 그런데 헬라어로 번역을 하면서 요안네스라는 헬라어 발음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에 이 요한이라는 이름이 근본이 없는 이름이 아니라는 거죠. 구약성경에 요하난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인들이 종종 썼던 이름이에요. 그래서 어쩌면 사가랴의 먼 조상 중에 요하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족이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다만 최근에는 그 이름을 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소하게 생각을 했다는 거죠.
요하난? 우리 친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엘리사벳하고 친족들 간에 갈등이 일어난 거예요. 엘리사벳은
요하난이라고 짓겠다고 하고, 친족들은 그 이름은 안 된다고 하고.
그래서 이제 친족들이 이 집안의 가장인 사가랴에게 물어봅니다. 네 아들의 이름으로 무엇으로 지을까? 오늘 본문 62절을 보면, 사람들이 사가랴에게 물어볼 때 어떻게 물어봅니까? 말로 물어보지 않고 몸짓으로 물어봐요. 왜 몸짓으로 물어보는가 하면, 사가랴가 귀도 안 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순히 말만 못하는 게 아니라 귀까지 안 들려요.
누가복음 1장 22절에 보면,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고 나서 성전 밖에 나왔는데 말을 못 하거든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여기서 말 못하는 대로 있었다는 말이 헬라어로 “코포스”라는 말입니다. 코포스는 벙어리라는 말인데, 이 말 안에는 귀머거리라는 뜻도 같이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코포스는 벙어리이면서 귀머거리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 사가랴가 그래요. 벙어리이면서 귀머거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가랴에게 몸짓으로 뜻을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가랴가 응답을 하는 거예요. 서판을 달라 해서 거기에다가 글씨를 써서 응답을 하죠.
자, 사가랴가 뭐라고 응답을 합니까? 63절을 봐 볼까요? 63절이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아멘.
사가랴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이때 요한이 쓴 말을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직역을 하면 이런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선포를 해버리죠. 그의 이름을 요한으로 하겠습니다. 이게 아니에요.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딱 선포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죠. 아니, 어떻게 엘리사벳이 말한 이름을 그대로 똑같이 쓸 수가 있을까? 귀가 안 들리니까 방금 우리들끼리 나눈 대화를 듣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알고 썼을까? 놀라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사가랴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요? 애초에 천사가 사가랴에게 찾아왔을 때 말해줬죠.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애초에 그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못해서 벙어리가 되고 말았지만, 정말로 아내가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고,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천사가 전해준 예언이 하나하나 성취되어 가고는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러면 마땅히 아들의 이름이 요한이 되어야 한다는 예언 역시도 성취되어야겠죠.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그 이름도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어야만 합니다. 다른 이름은 필요없어요. 무슨 친족이며, 얼마나 존경 받았던 이름이며, 얼마나 뜻이 좋은 이름이며, 다 필요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이름, 그것이 이 아들의 이름입니다.
요한. 헬라식으로 하면 요안네스, 히브리식으로 하면 요하난. 요하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이런 뜻입니다. 그 이름처럼,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어요. 오늘 본문 58절 말씀과 같이, 크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라는 이름 외에 어떻게 다른 이름을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사가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분의 일하심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친족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죠. 오늘 본문 64절에 기록된 사건인데요. 6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아멘.
사가랴가 서판에 요한의 이름을 썼을 때, 그의 입이 열렸습니다. 아들의 이름이 요한으로 선포됨으로써 확정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는 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을 때, 그의 입이 열린 것입니다.
정말로 천사가 말한 그대로 됐어요.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리라”고 했는데, 그 말씀처럼, 예언 된 일이 성취기 전까지는 벙어리가 되었다가, 마침내 성취되고 나니까 풀려나게 된 겁니다.
무려 열 달 동안 말도 못 하고 귀도 안 들리는 생활을 했어요.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요? 아내에게 수고했다고 격려도 해주고, 친족들에게 인사도 하고, 그동안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이 있었겠죠.
아, 아아, 어? 이제 말 나오네? 왐마 그동안에 답답해서 미쳐분지 알았어야~. 갑자기 말이 안 나오는 것도 문젠데, 갑자기 말이 나오는 것도 문제예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되죠.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그냥 쏟아내요.
그런데 사가랴는 열 달 만에 입이 열렸을 때, 무엇을 합니까? 그 입으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4절 말씀을 다시 한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아멘.
오늘 말씀 제목과 같이, 사가랴의 입이 열릴 때, 그의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열 달 동안 쌓여 있던 다른 많은 말들 중에서, 그는 가장 먼저 찬송을 드렸어요. 사가랴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입이 열리기를 기다린 거죠. 그래서 입이 열릴 때 아름다운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오늘 본문 밑에 68절부터 79절까지가 바로 사가랴의 찬송이에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약을 성취하시는지, 그 놀라움과 그 감격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신 이 아들이 어떻게 쓰임받게 될 것인지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이것이 입이 열릴 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도 마땅히 찬송이 흘러나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많고, 속에 담아두고 있는 말이 많지만, 그러나 말을 할 기회가 왔다고 해서 무슨 말이든 다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입은 본래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입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지음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때 우리는 본래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가랴가 그렇죠. 다시 그의 입이 열렸을 때, 그는 본래 목적에 충실했어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자기 욕심이 이끄는대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달라야죠. 우리의 입이 열릴 때, 우리 집안에 뭔가 문제가 풀릴 때, 물질의 문제가 풀리고, 관계의 문제가 풀리고, 태의 문이 열리고, 인생의 형통한 길이 열릴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찬송해야 합니다.
친족이 뭐라 하든지, 세상의 그 누가 뭐라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담대하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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