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응답
Notes
Transcript
<유초등부 헌신예배>
창세기 32:24-32
“하나님을 만난 사람”
2023. 10. 29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유초등부 헌신예배에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참 감사하고 또 감회가 새롭습니다. 올해로 2년째 제가 유초등부를 맡고 있는데요. 우리 아이들이 많이 부흥이 됐습니다. 코로나를 지나 지금은 주일에 평균 30명이 출석을 합니다.
아이들이 친구들을 전도하고, 또 우리 선생님들이 학교 앞에서 매주 전도를 해요.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부흥이 되고 있습니다. 작년 목표가 출석 30명이었는데, 작년 말에 목표를 달성했어요. 그리고 올해는 50명이 목푭니다. 사실 재적수는 거의 60명 가까이 됩니다. 그런데 누가 나오면 꼭 누가 안 나와요. 그래서 30명 이쪽저쪽으로 출석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안에 반드시 50명이 출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유초등부와 다음세대를 위해서 계속 관심 가져주시고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제가 창세기 32장 24절부터 32절 말씀으로 잡았는데요. 제목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정해보았는데요. 제목을 한번 따라해보실까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한 명 등장합니다. 바로 야곱이죠. 여러분은 야곱을 어떤 사람으로 알고 계십니까?
야곱의 인생을 잠깐 살펴볼까요? 야곱은 그 이름이 발 뒤꿈치를 붙잡은 자 라는 뜻이죠. 엄마 뱃속에서 형보다 먼저 태어나고 싶어서 형의 발 뒤꿈치를 붙잡았어요. 그래서 이름이 “야곱”이 됐어요. 발 뒤꿈치를 붙잡은 자, 야곱.
야곱은 히브리어로 “야코브” 라 발음합니다. 야코브. 야코브는 “아케브”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인데요. 아케브는 “발꿈치”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발꿈치를 붙잡은 자, 아케브를 붙잡은 자, 라고 해서 “야코브”가 된 겁니다.
야곱은 그 이름처럼 자기 앞에 누가 앞서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도 형을 이기고 싶어서 발꿈치를 잡은 것처럼, 소년이 되어서는 형이 갖고 있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훔치잖아요. 내가 장자가 되어서 장자의 권리를 갖고 싶다는 욕심이 그에게 있었던 겁니다.
또 나중에는요, 염소 가죽을 입고 형인 것처럼 행세를 해요. 형이 털이 많았기 때문에 염소 가죽을 입고 아버지를 속여서 본래 형이 받아야 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지 않습니까? 그 일 때문에 형이 죽이려고 하니까 결국에는 살기 위해서 도망쳐야 했어요.
자기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이고 도망자가 된 겁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야곱이에요. 그래서 야곱이라는 이름이 나중에는 “속이는 자, 사기꾼” 이런 뜻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처음에는 자기가 속였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속아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라반의 둘째 딸 라헬에게 한눈에 반해서 7년을 일하지 않습니까? 7년을 일하면 내 딸 라헬을 주겠다, 라고 해서 7년 동안 열심히 일했어요. 그리고 밤에 라헬과 동침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라헬이 아니에요. 라헬이 아니고, 그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사기를 당한 거죠.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되 거냐고 따지니까, 언니보다 동생이 먼저 시집을 갈 수 없기 때문에 레아가 밤에 들어간 것이라고 핑계를 대는데, 이것은 명백한 사기결혼이에요.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속은 놈이 잘못이지. 본인도 사기를 쳐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아요. 속은 놈이 잘못이라는 걸.
화가 나지만 일을 되돌릴 수가 없죠. 어쩔 수 없이 레아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7년을 일해요. 라헬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진짜 라헬을 주겠다고 7년을 더 일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7년을 일합니다.
이처럼 야곱은 인생 자체가 속고 속이는 인생이었습니다. 피곤한 인생이죠. 남을 속이는 것도 피곤하고, 또 누가 나를 속일까봐 걱정하는 것도 피곤해요. 매사에 의심하고, 계산하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면서 사는 겁니다.
그렇게 20년을 라반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도 많이 낳고, 재산도 많이 모았어요.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재산을 다 챙겨서 고향으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걱정이 돼요. 20년 전에 내가 형을 속이고 도망쳐 왔는데, 형이 아직도 그것을 잊지 않고 나를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나. 너무나도 두렵고 마음이 답답해요.
그래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거니까 따르기는 따릅니다. 그래서 출발을 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누군가를 만납니다. 누구를 만났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어요. 천사들을 만난 거죠.
창세기 32장 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고향을 향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난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주어를 잘 봐야 됩니다. 야곱이 만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에게 와서 만나준 겁니다. 이것은 이 만남을 주도한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야곱에게 사자들을 보내서 만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때 야곱에게 군대를 보여주셔요. 바로 밑에 창세기 32장 2절에 보니까,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봤죠. 그런데 그 군대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어요. 뒤에 마하나임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마하나임의 뜻이 “두 군대” 혹은 “두 진영”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군대가 하나로 뭉쳐 있는 게 아니라 둘로 나눠져서 따로따로 있었던 거예요. 이것을 야곱이 본 겁니다.
하나님이 군대를 보여주신 이유는 뭐였을까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죠. 내 군대가 여기 있으니까 너는 두려워말고 담대하게 고향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것을 몰랐어요. 그냥 군대가 있네, 그러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이 사건은 그냥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군대와 내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고 그냥 지나쳐 가요. 분명히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군대를 보여주셨을 텐데, 야곱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고 봐야겠죠. 지금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어요. 머리가 복잡해요. 그래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형의 화를 풀고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을 합니다.
혼자서 이런 저런 방법을 생각해요. 그리고 그 결과 여러 방법들을 사용하죠. 먼저 형에게 사자들을 보냅니다. 사자들을 보내서 지금 당신의 동생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게 해요. 미리 에서의 기분이 어떤지 떠보려는 거죠.
그런데 이 사자들이 돌아와서 뭐라고 합니까?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지금 오고 있다는 거예요.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그러니까 야곱이 굉장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죠. 400명을 데리고 온다고? 왜? 혹시 나를 죽이려고 그러나?
너무나 두려워져요. 그래서 창세기 32장 7절에 보면, 야곱의 마음상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야곱이 심히 두려워하고 마음이 답답해졌어요.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 합니까? 지금 있는 사람들과 재산을 둘로 나누죠. 두 떼, 두 진영으로 나눠요. 그래서 에서가 한쪽을 치면 다른 한쪽이 도망칠 수 있게 분산시킨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 진영이라는 말이 낯이 익지 않습니까? 야곱이 만났던 하나님의 군대가 두 진영이었잖아요. 마치 자기가 본 하나님의 군대처럼 자기 진영도 둘로 나눈 겁니다. 한쪽이 공격당하면 한쪽이 도망치도록. 얄팍한 수를 낸 거예요.
그리고 또 다른 수를 쓰죠. 이번에는 에서에게 수많은 선물을 보내요. 자기가 갖고 있는 가축들 중에서 좋은 것만 엄선해서 보냅니다. 암염소, 숫염소, 암양, 숫양, 암소, 황소, 암나귀, 새끼 나귀. 수백 마리의 가축들을 형에게 보내요. 이것을 받고 나를 좀 용서해달라는 거죠.
정말로 형이 너무나 무서워서 어떻게든 살려고 이런 저런 수를 쓰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 하고 나서 밤에 가족들과 함께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강을 건너고 나서 갑자기 야곱이 혼자 남아요. 강을 건넌 뒤에 가족들을 먼저 가라고 하고, 자기는 혼자 남은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24절의 내용이에요. 오늘 본문 2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갑자기 야곱이 가족들 다 보내버리고 혼자 남았어요. 여러분, 왜 야곱이 혼자 남았을까요? 성경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왜 혼자 남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추측을 해볼 수 있죠.
야곱이 혼자 남은 이유. 아마도 야곱이 너무나 두렵고 마음이 답답하니까 혼자서 기도하려고 남았던 것 같습니다. 혼자 생각도 정리하고 마음도 가라앉히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혼자 남은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다르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야곱이 기도하려고 혼자 남은 게 아니라, 사실은 혼자서라도 도망치려고 남았다는 거예요.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혹시 낌새가 이상하면 잽싸게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이죠. 아무리 그래도 가족들을 두고 도망치려고 했을까, 싶기는 한데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니까요.
우리는 이 중에 무엇이 진짜 이유인지 몰라요. 기도하려고 혼자 남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도망치려고 혼자 남았을 수도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야곱이 밤에 혼자 남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밤에 갑자기 야곱이 무엇을 합니까? 갑자기 씨름을 하죠. 24절을 다시 보면,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했다고 말씀해요. 이 말씀에도 보면, 주체가 야곱이 아니라 어떤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와서 야곱과 씨름을 하는 거예요.
야곱 입장에서는 황당하죠. 지금 안 그래도 마음이 답답하고 심란한데, 웬 미친놈이 와서 나랑 씨름을 하자고 하니까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그런데 야곱이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같이 씨름을 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 역시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갑자기 어떤 사람이 씨름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왜 야곱이 그 씨름을 받아줬는지, 배경설명이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런 건 몰라도 됩니다. 야곱이 왜 혼자 남았는지, 왜 갑자기 씨름을 하게 됐는지, 성경에 없다면 굳이 알려고 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그런 것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성경이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와서 씨름을 시작했죠. 이 씨름은 야곱이 시작하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이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이 씨름이 날이 새도록 계속됩니다. 밤부터 새벽까지, 최소 여섯 시간 이상 했다고 봐야겠죠. 씨름을 여섯 시간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야곱이 그걸 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적당히 져주고 보낼 법도 한데, 야곱이 끝까지 붙잡고 버티는 겁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오늘 본문 25절을 봐 볼까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씨름이 너무 길어지니까 이 사람이 갑자기 반칙을 해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탈골을 시켜버립니다. 아마도 사타구니 아래 허벅지 안쪽을 때려서 골반 뼈가 빠진 것 같아요.
정정당당하게 씨름을 하다가 갑자기 너무 심한 반칙을 쓴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씨름을 계속해요. 반칙을 하든지 말든지, 뼈가 빠지든지 말든지, 잡고 안 놔줍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이제 야곱에게 부탁을 하죠. 야, 그만하자. 나 좀 이제 보내주라.
이게 26절 말씀이에요. 26절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날이 새려고 하니까 이 사람이 마음이 급해졌어요. 아마도 이 사람은 날이 샐 때까지 야곱과 함께 있으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이것도 과감하게 넘어가겠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날이 새기 전에 빨리 가야 돼요.
하지만 야곱이 못 가게 막죠. 그러면서 뭐라고 말을 합니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이 요구조건을 말해요. 가고 싶으면 나에게 축복을 해주라. 축복을 안 해주면 안 보내주겠다. 이런 말이죠.
우리는 야곱의 이 말을 통해서 왜 야곱이 날이 새도록 이렇게 끈질기게 씨름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 사람에게서 축복을 받고 싶었던 겁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여섯 시간도 넘게, 다리뼈가 빠지면서까지 씨름을 한 거예요.
야곱은 축복을 원했어요. 왜냐하면 지금 씨름을 하고 있는 상대가 바로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 지금 나랑 씨름하는 사람이 천사구나.’ 처음에는 몰랐죠. 처음에는 정체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으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씨름을 하는 도중에 이 사람이 천사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거예요. 나를 축복해 달라고.
호세아 12장 4절에 보면, 이때 야곱이 축복해달라고 한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2장 4절에 보니까,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야곱이 천사에게 울며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나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 천사라는 것을 알고, 다리뼈가 빠지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매달려서, 울면서 간구한 거예요. 다리가 아파서 운 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처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바라는 간절함으로 운 겁니다.
지금 야곱이 처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죠. 형을 만나기가 너무 무서워서 진영도 둘로 나누고, 가축들도 선물로 보내고, 가족들도 먼저 보냈지만, 여전히 너무 두려워요. 형이 400명이나 데리고 오고 있다는데, 그 400명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당해낼 수가 없어요. 내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십시오. 그 전까지는 보내주지 않겠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뭐라고 했을까요? 축복을 해줬을까요?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천사가 뜬금없는 말을 해요. 야곱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축복을 해달라니까 이름을 물어봐요.
그래도 이름을 물어보니까 대답을 해야죠. 야곱이 대답을 해요. “야곱이니이다.” 야곱, 발꿈치를 잡는 자입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사기꾼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을 뿐이지만, 그 이름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지금까지 속고 속이면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천사 앞에 고백하는 겁니다. 나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이름을 듣고 천사가 야곱의 이름을 바꿔줍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이 바뀌는 중요한 사건인데요. 2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아멘.
야곱이 이스라엘이 됐어요. 이스라엘은 “사라” 라는 말과 “엘” 이라는 말이 합쳐친 말입니다. 사라는 “싸우다” 라는 뜻이에요. 28절 안에 “사라” 라는 말이 한 번 더 나오는데요. 28절 끝에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여기서 “겨루다” 라는 말이 바로 “사라”입니다. 야곱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었다. 싸웠다는 것이죠.
이 싸웠다는 말, “사라”가 야곱의 새 이름에 들어간 겁니다. 이스라, 엘. 그리고 엘은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싸운다는 말과 하나님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이스라엘”이 된 겁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뜻이 될까요? 이것은 우리가 해석하기에 따라서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싸우다” 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싸우신다” 라는 뜻이 될 수도 있어요.
보통은 앞의 해석으로 봅니다. 하나님과 싸우다. 왜냐하면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잖아요. 28절에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천사가 인정을 한 거예요. 너는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 그래서 너의 이름은 앞으로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싸우는 자, 이스라엘.
그런데 여러분, 엄밀히 따져서,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습니까? 이긴 게 아니죠. 그냥 여섯 시간 동안 버티고 있었던 것 뿐이에요.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고, 천사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랬을 뿐인데도 야곱이 이겼다고 인정해주신 겁니다. 여러분, 왜 야곱이 이겼다고 하셨을까요? 날이 밝아오니까 다급해져서 이제 그만 끝내려고 야곱이 이겼다고 했던 걸까요? 아니면 진짜로 조금만 더 하면 야곱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져주셨기 때문에, 야곱이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깁니까? 이길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져주신다면 이길 수 있겠죠. 하나님이 야곱에게 져주신 거예요. 여섯 시간 넘게 천사를 붙들고 씨름하며 울며 간구하는 야곱의 간절함을 보시고 져주신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구하는 것을 주셨어요. 야곱이 축복을 구했죠. 그 축복을 주셨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죠.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셨을까? 야곱이 원한 축복은 이름이 바뀌는 게 아니었거든요. 야곱이 원한 것은 형 에서를 만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어요. 지금 400명을 데리고 오고 있는 에서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어쩌면 야곱은 이전에 만났던 하나님의 군대를 원하지 않았을까요? 두 진영으로 나눠져 있는 막강한 하나님의 군대가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군대를 주시지 않았죠. 그냥 새로운 이름을 주셨을 뿐이에요. 이스라엘, 네가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고 하는 이름을 주셨어요.
이것이 형을 만나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무런 소용이 없죠.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잖아요. 기왕에 축복을 주실 거면 이름 말고, 군대를 주시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건강이라도 주시지, 하필이면 이름을 주셨어요. 뿐만 아니라, 지금 야곱의 몸 상태가 어떻습니까?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됐어요. 이제 에서를 만나도 달려서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에서가 죽이려고 하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하나님을 안 만났더라면 다리라도 멀쩡했을 텐데, 괜히 하나님을 만나서 씨름을 하는 바람에 장애인이 됐구나. 그냥 씨름 대충 져주고 보냈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왜 울면서 날이 새도록 붙잡고 있었을까. 이런 후회가 들지 않았을까요?
만약에 우리가 야곱의 입장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될 줄 알고,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오히려 상황이 악화된다면. 후회, 좌절, 분노, 여러 가지 부정적인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당장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죠. ‘왜 하필이면 이런 것을 주셨을까? 왜 나를 더 힘들게 하실까? 아,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려야 돼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밖에 없어요. 죽으나 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여섯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우리는 하나님과 씨름해야 돼요. 언제까지요? 하나님이 져주실 때까지. 그래서 비록 우리 허벅지 뼈가 빠지고 어깨 뼈가 빠지고, 재산이 빠지고, 명예가 빠지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빠져버린다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잖아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셨어요. 하지만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그 날, 불과 열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잖아요. 간절히 기도했는데, 1년이라도 더 살게 해주시지, 너무나 허망하게 죽으셨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뜻에 순종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주시는 응답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분명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환경적으로는 여전히 문제와 고난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내면에는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가 일어나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거듭나는 거예요. 이전까지의 나의 인격과 자존심과 욕망과 습관으로부터 떠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97편 10절, 11절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어요. 시편 97편 10절, 1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아멘.
이것이 거듭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영혼을 보전하시고, 그를 건지시며, 그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고난이 오고, 원치 않는 응답이 온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울며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섯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십시오.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와 함께 오고 있는 400명을 두려워했지만, 사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그 문제는 진작에 해결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뒤에 하나님의 군대가 있기 때문에. 두 진영으로 나눠져 있는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 그를 지키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어요.
비록 야곱의 눈에 지금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뒤에도 하나님의 군대가 있습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건져내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