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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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디모데후서 4:9-18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2022. 6. 1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믿음의 아들이자 에베소 교회의 젊은 목회자로 사역을 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고 있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여러 서신들 가운데 디모데서는 특별히 디모데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다른 서신들에 비해 사적인 내용이 많아요.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 데살로니가서 이런 편지들은 그 교회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이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문장이 딱딱하고 공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면, 디모데서는 디모데에 대한 사랑과 걱정이 담긴 따뜻한 문장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서신들과 비교를 해보자면, 대표적으로 각 편지를 받아보는 대상을 부르는 호칭에서 차이가 있는데요. 다른 서신들에서는 교인들을 향해서 “형제들아” 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디모데는 내 아들이라고 불러요. 디모데후서 1장 2절에 보니까,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또 디모데후서 2장 1절에는,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이처럼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각각의 편지에 담긴 바울의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평소에 디모데를 부를 때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 디모데야. 이렇게 친숙하게 불렀을 겁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영의 아들이자, 제자이자, 동역자인 디모데. 에베소 교회를 믿고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디모데.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편지를 통해서 지금 바울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부터 4장 8절까지는 목회에 대한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9절부터는 바울이 사사로운 부탁을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다른 서신들과 차별되는 점이에요.
다른 서신들은 일반적으로 ‘누구누구를 문안하라’ 이런 공적인 부탁을 담고 있다면,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에는 아주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부탁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인 디모데후서 4장 9절을 보면, 디모데에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하고 부탁을 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지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한지를 볼 수 있어요. 어서, 속히. 빨리 오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됐죠. 이 9절 말씀을 보다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직역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는 나를 향하여 급히 오도록 서둘러라.”
급히 오도록 서둘러라. 급히 오는 것만으로 안 되고, 그마저도 서두르라는 겁니다. 그만큼 지금 바울의 마음이 조급해요. 여러분, 왜 이렇게 바울의 마음이 조급할까요?
그것은 바울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의 목숨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두 번째 투옥이죠. 그동안에 바울이 다른 지역에서도 감옥에 여러 번 갇혔었는데, 그때마다 무사히 풀려났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라요. 이번에는 감옥에서 살아서 나가지 못하리라고 바울이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앞에 디모데후서 4장 6절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여기서 전제는 희생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의식으로서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전제가 부어졌다는 말은 제사가 다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바울이 지금 자신의 생명이 마지막 순간에 다다랐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뒤이어서 직설적으로 말을 하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울이 떠날 시각, 죽음을 당할 시각이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지금 갇혀 있는 감옥에서 살아 나가지 못하게 죽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직감하고 있어요. 그래도 그에게 후회는 없었습니다. 이 바로 밑에 7절 말씀을 보면, 그는 달려갈 길을 다 마쳤어요. 유명한 구절이죠. 디모데후서 4장 7절과 8절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멘.
그는 사역을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다 마쳤어요. 본인 입으로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할 정도로 그에게는 사역적인 미련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홀가분해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아주 홀가분하게 그것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역을 다 마치고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에 어서 속히 오라고 조급한 마음으로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 뒤에 편지의 마지막 절인 22절 바로 앞에, 21절에 가서 다시 한 번 어서 오라고 강조를 해요. 디모데후서 4장 21절을 봐 볼까요?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편지를 끝마치기 전에 다시 한 번 어서 오라고 강조할 정도로 지금 바울은 마음이 조급해요. 왜냐하면,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죽기 전에 디모데를 꼭 한 번 보고 싶은 겁니다. 사역적으로는 달려갈 길을 마쳤지만, 인간적인 정이 남았다는 것이죠. 그 역시도 육신을 가진 연약한 한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영의 아들인 디모데를 보고 싶은 겁니다.
지금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교회를 어떻게 양육하고 치리해야 하는지, 어떻게 경건생활을 해야 하는지 다 가르치고 있지만, 그 외적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얼굴을. 편지는 편지고, 얼굴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어서 속히 오라고, 내가 죽기 전에 얼른 오라고 채근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왜 이토록 디모데를 보고 싶어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가 있는데요.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니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지금 말씀에 보면 바울의 동역자 세 사람이 나오는데요. 문제는 이 세 사람이 지금 바울 곁에 없다는 것입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에, 그레스게는 갈라디아에, 디도는 달마디아에 갔어요. 특히 그 중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데마는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빌레몬서 1장 24절에 보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함께 동역하고 있는 동역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데요.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이때는 바울이 로마에서 1차 투옥을 당한 시점입니다. 연수로 치면 약 4년에서 5년 전이에요. 이때만 해도 데마는 바울 곁을 지키면서 그의 사역을 충실히 돕는 동역자였습니다. 또 골로새서 4장 14절에도 그의 이름이 나오는데요.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골로새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데마는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도 약 4년에서 5년 전입니다. 바울이 1차 투옥됐을 때예요. 이때에도 데마가 바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에서 풀려났다가 또다시 로마 감옥에 2차로 투옥을 당하게 되자, 이제는 바울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그가 왜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기를,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라는 것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바울보다, 사역보다, 복음보다. 그래서 소중한 동역자 바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난 겁니다.
바울이 서신에 이름을 언급할 정도로 믿고 의지하던 소중한 동역자 한 사람이 그렇게 바울 곁을 떠나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이때 바울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죠. 또 다른 동역자 두 사람도 떠났어요. 본문 10절에 기록된 다른 두 사람, 그레스게와 디도. 디도는 우리가 잘 알죠.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고 있던 귀한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디도는 데마의 경우와는 달라요.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떠났지만, 디도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디도는 그레데 섬에서 목회를 마치고 한동안 로마 감옥에 찾아와서 바울과 머물렀어요.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사역지인 달마디아로 파송되었습니다. 바울이 파송한 거죠. 그래서 디도도 바울의 곁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인 그레스게. 그레스게는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이름이 나와요. 그레스게가 누구일까? 우리는 그저 바울의 복음사역에 합력하던 동역자였을 것이라고만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알 수가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역시도 지금은 바울 곁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오늘 본문 16절도 보면, 바울의 처지가 정말 딱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6절도 봐 볼까요?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라는 것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을 당할 때 로마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한 때를 가리킵니다. 그 때만 해도 데마를 비롯해서 많은 동역자들이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다 나를 버리고,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곁에 있던 동역자들이 지금은 없어요. 그 사실이 그에게 너무나도 큰 외로움으로 찾아왔을 겁니다. 마음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고.
지금 바울의 상황을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성도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 여러분, 성도의 교제는 크게 세 가지를 포함합니다. 첫째는 영적인 교제이고, 둘째는 육적인 교제, 셋째는 나눔의 교제입니다. 영적인 교제는 영적 사역을 함께하는 교제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주의 일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육적인 교제는 곧 삶의 교제입니다. 함께 만나서 인사하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돕고 위로하며 돌보는 것입니다. 또 나눔의 교제는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겁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양보하고 나누는 거예요.
이 세 가지를 통틀어서 성도의 교제라고 합니다. 이 중에 하나만 끊어져도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은 지금 어때요? 한 영으로 동역하던 데마가 떠났죠. 영적인 교제가 타격을 입었습니다. 또 그레스게와 디도 두 사람이 곁을 떠났어요. 삶의 교제도 일부가 사라졌습니다. 나눔의 교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애초에 뭘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본다면 바울은 지금 성도의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누가 한 사람이 바울 곁을 지키면서 그를 보살피고 있어요. 가까스로 성도의 교제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오라고 재촉을 하는 겁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죽음은 가까이 오는데 사람들은 하나 둘 멀어지고, 떠나버리고.... 그 외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절실하겠습니까?
혹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아니, 바울이 이제 사역도 다 마치고,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데.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할 일이지, 말년에 너무 궁상맞은 거 아닌가? 사람이 왜 이리 짠하고 초라해졌지? 내가 알던 바울이 맞나?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헬라 땅과 본도와 아시아 온 땅을 다니면서 성령충만한 사역을 펼치던 위대한 바울이 왜 이렇게 연약한 사람이 되었을까? 실망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실망할 이유가 없어요. 바울이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초인도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똑같은 감정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육신의 나약함이 있습니다. 그가 이룩한 사역의 결과물이 너무나도 놀랍고 위대하지만, 그도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에요.
우리는 주로 바울의 사역에 집중을 합니다. 그가 역경을 이겨내고 교회를 세우고, 놀라운 이적을 행하면서 수많은 회심자를 만들어낸 그 엄청난 사역에 집중을 해요. 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바울의 인간적인 고뇌와 아픔과 약함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죠.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이러한 데에는 사실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이 서신을 보낸 교회의 교인들도 그랬을 거예요.
바울이 함께 있으면서 보여준 이적과 기사와 권위에 열광을 하면서도 그의 목회현실이나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그들만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을 하셨어요.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약한 소리를 하신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나니까 아무리 위대한 능력을 보이신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고뇌가 밀려왔어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도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부탁을 하신 겁니다. 같이 기도해 달라는 것이죠.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이 괴롭든지 말든지 자기들의 육신이 피곤하니까 한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이 없이 다 잠이 들었어요. 예수님이 기도하고 오셔서 보니까 다 자고 있거든요. 그래서 하도 기가 막히니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하고 탄식을 하시잖아요. 마태복음 26장 40절에,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제자들의 이 모습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배신입니다. 예수님이 약한 소리까지 하시면서 부탁을 하고 갔는데, 누구도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잖아요. 이게 배신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가룟 유다처럼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것만이 배신이 아닙니다. 데마처럼 세상으로 떠나는 것만이 배신이 아니에요. 다른 이의 아픔을 외면하고, 무시하면 그것 역시도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신을 당하셨어요. 물론 제자들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죠. 그저 예수님의 괴로움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에요. 예수님이 사역을 하시면서 얼마나 힘이 드시는지,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으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놀라운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말을 하시는데도 흘려듣는 겁니다. ‘에이, 예수님이 약한 소리를 다 하시고. 농담도 잘하시네. 어차피 놀라운 능력으로 다 이겨내실 거면서 그러신다.’ 이렇게 농담으로 여기고 무시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돼요. 목회자는 슈퍼맨이 아닙니다.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화가 나면 화도 내고, 슬프면 눈물도 흘리고, 힘이 들면 다른 사람에게 약한 소리도 하면서 의지하는 똑같은 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목회자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어, 목회자가 화를 내내? 목회자가 낙심을 하네?’ 이렇게 쉽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 이것이 꼭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요? 우리 장로님들, 남자 집사님들. 한 가정을 책임자는 가장으로서 얼마나 어깨에 짐이 무거우십니까? 우리 권사님들, 여자집사님들도 다 마찬가지죠.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깨지고, 영업장에서는 손님들에게 갑질을 당하고, 차마 가족들에게 오픈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많지요. 하지만 집에 가서는 혹시 걱정 끼칠까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오늘 하루가 좋았었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참고 참고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툭 하고 속엣말이 나올 때가 있어요. 너무 힘들다, 너무 아프다. 마음이 괴로워서 죽게 될 정도로 너무 안 좋다. 이런 말들이 나도 모르게 흘러 나와요.
우리가 그 말을 그냥 흘려넘기면 안 됩니다. 그 말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그가 툭 내뱉는 말 한 마디, 그의 표정, 그의 몸짓.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보여주는 슈퍼맨 같은 모습 뒤에 가려진 나약한 한 남자, 연약한 한 여인이 있음을 깨닫고. 그의 아픔을 알고, 그 아픔에 공감하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내밀어야 합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어요. 사역의 위대함 뒤에 가려진 인간 바울, 그가 가졌던 아픔과 괴로움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바울의 약함을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약함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그토록 위대한 바울도 아픔이 있었구나. 외로움이 있었구나. 나만 겪는 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아픔과 슬픔과 눈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가졌던 것이고, 우리 주님 예수님도 가지셨던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실망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눈물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사람은 지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천상에 있는 사람일 겁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괴로워서 죽게 된 것을 수치로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의 괴로움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속히 오라고 조급함을 보여줬던 것처럼, 우리들도 나의 아픔과 눈물을 우리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또는 교회에 오픈하고 솔직한 도움을 구하는 용기와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내 가족이, 내 친구가, 내 형제가 그러한 아픔을 우리에게 드러낼 때, 그 아픔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아픔에 관심을 갖고, 그를 위로하고, 그를 위하여 함께 깨어서 기도하는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마지막까지 곁에서 보살피던 누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다 떠난 것 같아도, 반드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앞에 우리 주님이 계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 마지막 18절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고 말씀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 시작.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십니다.
나에게 미래가 없는 것 같고,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할지라도. 우리 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모든 악한 일에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우리 곁에 계신 우리 주님을 의지하고, 나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는 이들에게 감사하며, 나 또한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로하고 기도하며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