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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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15:11-32
“아버지의 사랑”
2022. 9. 14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돌아온 탕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의 제목을 흔히 “돌아온 탕자 비유”라고 알고 있지만, 성경의 소제목을 보면,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이 사건의 중심이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한 제목도,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함께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세 가지가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먼저 등장하는 비유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이고, 두 번째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오늘 본문인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비유를 순서대로 말씀하시면서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 오는 기쁨”에 대해 강조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뭔가를 잃어버렸다가 그것을 되찾으면 기쁨을 느끼지요. 요새 특히 잘 잃어버리는 게 핸드폰인데요. 카페나 식당에 갔다가 놓고 나와서, 나중에 헐레벌떡 찾으러 간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겁니다. 혹시 누가 갖고 갔으면 어떡하나, 근심하면서 카페에 돌아갔을 때, 핸드폰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음에 안심이 되면서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 작은 핸드폰도 이토록 기뻐하는데, 하물며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요? 이루 말할 수 없겠죠. 집을 나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던 아들이 비록 다 망한 모습이 되었지만,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기뻐해요. 그 기쁨에는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아들이 금의환향해야 한다거나, 큰 명예를 가지고 돌아와야지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들이 돌아온 것 자체만으로 기쁨이 충만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내 자식이 잘났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처럼 자식을 사랑하는 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사랑하는 두 아들이 등장해요. 먼저 등장하는 아들은 둘째 아들이죠.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둘째 아들이 맹랑하게도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분깃을 요구합니다. 12절을 봐 볼까요?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분깃을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유대법에 의하면, 집에 아들이 둘이 있을 때, 둘째 아들은 아버지 분깃의 3분의 1을 갖습니다. 그리고 장자가 3분의 2를 가져요. 지금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인 3분의 1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미 자기 몫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그만큼을 미리 달라는 거예요.
만약에 아버지가 그 요구를 허용한다면 재산을 아들에게 미리 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불법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해주는 아버지가 있을까요? 유대 사회에서 어느 아버지도 미리 재산을 나눠주지 않아요.
성경에는 없지만, 과거 유대인들이 자주 읽었던 집회서라는 책에 보면, 재산분배에 대한 조항이 나오는데요. 집회서는 삶에 대한 지혜나 생활방침과 같은 여러 지혜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성경이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만큼이나 이 책을 유대인들이 자주 읽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재산분배시 금지사항이 기록되어 있어요. 집회서 33장 20절에 있는 구절인데요. “아들과 아내에게, 형제와 친구에게 네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에 대한 권리를 넘겨주지 말고 네 재산을 남에게 넘겨주지 마라…너의 재산을 아무에게도 주지 말아라 나중에 그것이 아쉬워 후회할 것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제가 간추렸는데요. 간단히 말해서 절대로 자식이나 다른 누구에게 미리 재산을 나눠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미리 나눠줬다가는 그것을 후회할 일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드라마를 보면, 종종 자식들이 나이 많은 아버지에게 와서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아양을 부리고 효자처럼 굴지만, 상속을 받고 나면 요양원에 데려다 놓고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 그런 장면들이 나오잖아요. 재산을 나눠줬다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찬밥신세가 되는 거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산을 미리 나눠주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절대로 재산을 미리 나눠주지 않습니다. 자식에게 상속될 분깃의 몫이 법적으로 미리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는 한은 그것을 미리 받을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허락하거나, 혹은 아버지가 죽어야만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둘째 아들이 아주 맹랑하게 자기 분깃을 요구하죠. 만약에 아버지가 분깃을 나눠주면, 이것은 아버지에게 불명예가 됩니다. 아버지가 자기 권위도 내팽개치고 아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팔푼이로 소문이 나요. 아들도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잘 알았을 겁니다. 나에게 분깃을 나눠주면 아버지가 불명예를 얻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에게 분깃을 요구해요. 아버지 사정이야 어떻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말겠다는 심보죠. 이것은 정말로 이 둘째 아들이 막돼먹은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지금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둘째 아들에 대해서 분통을 터트렸을 거예요. ‘아니, 그런 나쁜놈이 있나?’ ‘그런 막돼먹은 아들은 잡아다가 다리몽댕이를 분질러야 돼!’ 이렇게 생각하면서 화를 냈을 겁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 가관이에요. 오늘 본문 12절 끝을 다시 보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 막돼먹은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살림을 그냥 나눠 줬어요. 몽둥이로 때려도 시원찮을 판에,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버지가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도 사람인데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화가 났겠죠. 또 이 일로 인하여서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요구를 들어준 겁니다. 왜요? 사랑하니까.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제쳐두고 아들의 요구를 들어준 거예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 둘째 아들이 자기가 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버립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니까,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아들이 며칠 동안 재산 챙기고 떠날 준비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습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서 먼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가던 요나처럼,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모든 재산을 다 써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는 남은 재산도 없고, 또 하필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삶이 궁핍해졌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자리를 알아보는데, 나라가 흉년이 드니까 직장 구하기가 어렵죠. 구조조정을 하는 판국에 직장 구하기가 쉽겠습니까?
그러니까 일자리를 찾다가 찾다가, 결국에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3D 중에 3D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게 뭐예요? 돼지를 치는 일이죠. 오늘날에는 양돈이 큰 사업이고, 괜찮은 직종이지만. 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돼지를 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에요. 먹지도 않을 뿐더러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돼지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됐으니, 이 아들의 처지가 얼마나 형편없는 지경에 처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아들의 수치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져요. 16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돼지를 치는 것만도 수치스러운 일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이제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비참함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죠. 먹을 것이 없으니까 돼지 사료라도 먹으려고 해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비참해진 아들에게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어요. 돼지가 먹는 것에서 조금만 덜어다가 줘도 될 텐데,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이 아들의 가치가 남들에게는 돼지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굶어 죽든지 말든지 돼지가 더 귀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비참한 결과입니다. 집에서는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누리고, 무리한 요구라도 아버지가 다 들어주었는데. 집을 나오고 나니까 누구 하나 그를 돌아보지 않죠. 돼지만도 못해요. 그것이 집을 나간 아들의 현실입니다.
그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리니까 그제서야 아들이 깨닫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 품에 있을 때가 행복했구나.’ 그것을 깨달은 아들이 이제 자기가 왔던 길을 돌이킵니다. 자기 재산을 가지고 희희낙락 걸어왔던 그 길을, 이제 다 망한 몸으로 돌아갑니다.
이제는 자기 처지를 알아요. 떠날 때는 자기 주제도 모르고 재산을 요구하던 철없는 아들이었지만, 돌아갈 때는 자신이 돼지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도 이전과 같이 아들로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버지가 부리는 품꾼의 하나로서 돌아가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19절을 봐 볼까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죠.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그가 형편없는 처지에 있어요. 또한 자기가 그런 처지에 처하게 된 이유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 역시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19절 위에 18절을 보면,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는 변명하지 않고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고백합니다. 사회통념을 위반하고 아버지께 불명예를 끼쳐드리면서까지 재산을 요구해서 먼 나라로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산 자신의 죄를 고백해요. 내가 비참한 자가 된 것이 다른 누구의 탓이 아니라 모두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아버지께 너무도 큰 죄이기 때문에, 차마 아들로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저 품꾼의 하나로만 받아주셔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들이 왔던 길을 돌이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속으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나를 반기지 않고 다시 내쫓으면 어떡하나? 집안의 수치라면서 손가락질하면 어떡하나? 품꾼으로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런 많은 걱정과 불안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오늘 본문 20절말씀인데요. 2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돌아올 때에, 아버지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직 집에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멀리서 아들의 모습을 한 번에 알아보고, 아들에게 달려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아요. 재산은 다 어쨌냐고 추궁하지도 않고, 너 때문에 내가 수치를 당했다고 책망하지도 않아요. 그저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 기뻐합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았다는 사실 하나로 아버지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와 같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과 같이,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한시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어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밥은 잘 챙겨먹고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항상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기도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 거리가 먼데도 아들을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든 알아볼 수 있어요. 잘돼서 부자가 되든, 망해서 거지가 되든, 아버지에게는 똑같은 아들이에요. 그에게 무슨 죄가 있든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도 다 똑같은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있든지, 아니든지. 정직하게 살든지, 아니든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온 기쁨에 겨워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는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모습이든 아버지의 눈에는 변함없는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선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십니다. 먼 데서부터 우리를 알아보시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리를 끌어안아 주셔요. 잔치를 벌이고 풍악을 울리십니다. 나 같은 것이 뭐라고. 아버지 가슴에 말뚝을 박고 떠나버린 나를 영접하시고 이토록 기뻐하시는지, 우리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기쁨의 잔치 가운데 참여하지 않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장남이죠. 장남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보니까 집이 떠들썩해서 한 종을 불러 물어봅니다. 그리고 정황을 다 파악하고 나서 화를 내며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나와서 아들에게 권하죠. 아들아, 여기서 뭐 하고 있니? 죽은 줄 알았던 네 동생이 돌아왔다. 우리가 함께 들어가서 기쁨을 나누자. 이렇게 아들에게 권했어요.
그러나 아들은 들어가지 않아요. 그리고 화를 내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 29절과 30절인데요.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첫째 아들의 말은 사실 틀린 구석이 없습니다. 정당한 말이에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명을 충실히 따른 아들과, 아버지의 살림을 삼켜 버린 아들. 둘 중에 누가 더 중요합니까? 당연히 아버지를 섬긴 아들이죠. 그 아들이 아버지의 기쁨이 되어야 하고, 잔치를 벌여도 그 아들을 위해서 해야 돼요. 이것이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이고 송아지를 잡습니다. 집에 있는 아들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준 적이 없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이 첫째 아들의 입장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집에 돌아온 동생을 기쁨으로 맞이할까요? 아니면 첫째 아들과 같이 화를 낼까요?
오늘 우리가 보는 이 본문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계시는가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고 계셔요.
누가복음 15장 1절, 2절을 봐 볼까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지금 말씀에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흉보고 있어요. 왜 이 사람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가? 그들이 생각하기에 세리와 죄인들은 상종할 수 없는 자들인데,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려 교제를 나누니까 그 모습이 좋아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세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다시 찾을 때에 얼마나 기쁨이 큰가. 여기서 잃어버린 것이 누구를 가리킬까요? 죄인들이죠. 죄인들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비유하고,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비유하고, 잃어버린 아들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잃어버린 죄인들을 되찾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하셔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메세지가 분명하죠.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잃어버린 그 한 영혼이 돌아오면, 그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는 기쁨보다 더 크다는 거예요.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죠.
특히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더 큰 기쁨일 수가 있느냐? 세 살배기 어린아이한테 물어봐도 죄인보다 의인이 좋다고 대답을 할 겁니다. 세상 누구도 죄인을 의인보다 우선순위에 두지 않습니다. 그것이 상식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을 볼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일찍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분명하게 죄인을 위하여서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죽고 썩어질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잃어버렸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다시 찾으려고 생각하지 않는 잃어버린 영혼들, 누구도 상종하려 하지 않는 죄인들. 그들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들을 찾을 때에 기쁨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기쁨에 동참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뜻에 합하지 않습니다. 첫째 아들로서 둘째 아들을 미워하고 그가 살아 돌아왔음에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질투를 하고 화를 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현실이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봐도, 첫째 아들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동생과 더불어 기뻐하였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32절에 어떻게 끝이 납니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의 말씀으로 끝나요. 어디에도 첫째 아들이 회개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어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을 업신여겼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금식도 여러 번 하고, 율법도 잘 지키는 의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하고, 내가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죄인들은 집 밖으로 쫓아내어야 할 이방인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의 집 밖에 머물러 있는 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 하는 첫째 아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여러 해 동안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나, 그는 결국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고 집 밖에 머물렀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온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밖에 머물러 있어요. 죄인과 상종할 수 없기 때문에, 함께 식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면 죄가 옮아서 똑같은 죄인이 될 것 같기 때문에. 아버지의 권유도 뿌리치고 집 밖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아들의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도 내 형제이고 한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서로 믿음의 배경이 다르고 신앙의 환경이 다르다 할지라도, 주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가 과거에 무슨 죄를 저질렀든, 그가 어떤 흉측한 삶을 살아왔든.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온 이상. 그는 우리의 형제요, 한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다를까요? 죄의 경중은 있을지라도, 죄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모두 집 밖으로 내쫓겨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십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시고, 살진 송아지를 주셔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까지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 우리는 그 사랑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았습니다. 첫째 아들이라서 받은 것도 아니고, 당연히 받을 분깃이라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감히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는 품꾼에 불과해요.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아들이라 불러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아버지의 이 사랑을 오늘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격 없는 나를 자녀 삼아 주시고, 감히 구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고, 세상에서 허랑방탕하여 살아가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 사랑이 강물처럼,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밀려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참된 평안과 자유함을 얻고, 나 또한 여전히 밖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그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우리 국동제일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