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워 가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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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수요예배 순서
1. 기도인도
오늘 예배를 위해서, 또 말씀 전하실 OOO를 위해서 함께 주여 한 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2. 대표기도
오늘 예배를 위해서 이선미 집사님 나오셔서 기도하시겠습니다.
3. 성경봉독
누가복음 2장 40절로 52절
신약 91쪽
<수요설교>
누가복음 2:40-52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2022. 6. 22
조 정 수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서, 먼저 그 구조를 살펴보면, 일종의 샌드위치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면,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고, 맨 밑에 52절을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라고 비슷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비슷한 문장이 위 아래에 있고, 그 사이에 오늘 본문 사건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두 문장에는 동일한 헬라어 단어가 들어가는데요. 그것은 “카리스”라는 단어입니다. 카리스는 은혜라는 말이에요. 이것을 40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52절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52절에서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좀 더 단어의 본래 뜻에 집중해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받으시더라. 이렇게 번역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 이 두 문장을 통하여서 우리는 어린 시절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52절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이 매우 사랑스러워 가셨어요. 아기 때에도 사랑스러우셨고, 오늘 본문의 사건이 지난 뒤에도 역시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두 문장이 위 아래에 있습니다. 마치 샌드위치 빵처럼 위와 아래에서 같은 말로 에워싸고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있는 한 사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예수님이 사랑스러우셨고, 또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 그 과정 속에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한 사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일까요? 도대체 어떤 사건이길래, 예수님이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것을 이렇게 위 아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 사건은 별로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건은 아니죠. 어떤 사건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실종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스러워 가시던 중에 갑자기 사라져버렸어요. 무려 사흘 동안이나 부모 품을 떠나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실종사건이 예수님이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살펴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어린 예수님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절기를 다 마치고 다시 집으로 내려가는데, 예수님이 가족을 따라서 가지 않고 성전에 그대로 남았어요. 나중에야 아들이 사라진 것을 알고 요셉과 마리아가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다시 예루살렘까지 거슬러 왔을 때에야 비로소 아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게 오늘 사건의 정황이에요.
부모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겠죠. 경건하게 절기를 다 지키고 친척들과 함께 집으로 가는데, 아들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마다 유월절만 되면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절기를 잘 지켰는데, 오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 사회는 공동체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 집 자녀만 자녀가 아니고, 다른 집 자녀도 내 자녀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이 잠시 보이지 않더라도 당연히 다른 집에서 밥 먹고 보살핌을 받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마 친척 누구 집에 있겠지, 하고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돌아올 생각을 안 해요. 한 번도 속 썩인 적 없고, 말을 거역한 적도 없는 착한 아들이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요. 마땅히 돌아와야 할 아버지 요셉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집은 노상에 설치한 임시 장막이었겠죠. 이 장막에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4절에 기록된 것처럼,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아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집, 저 집. 우리 다엘이네 집에도 가보고, 수호네 집에도 가보고. 가볼 만한 데는 다 가서 찾아봤어요. 그런데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아들이 없었고, 또 아들을 본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찾고 또 찾았습니다. 처음엔 이 아들이 말도 없이 어디로 갔나, 화도 나고 속도 상했을 테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제발 무사히만 있어 달라는 간절함이 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어린 아들이 율법선생들 가운데 앉아 토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흘 만에 발견한 아들은 부모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해맑게 신이 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듣는 자가 다 놀랄 만한 지혜의 말을 율법선생들에게 들려주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말을 듣고 그 부모도 놀랐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찾고 찾던 아들을 율법 선생들 가운데서 찾게 된 놀라움과 더불어 아들이 하는 지혜의 말에 놀랐어요. 율법에 해박한 율법선생들마저도 놀랄 만한 지혜를 말하고 있으니 그 부모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죠. 우리 아들이 다른 아이들 같지 않고 특출나다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 이렇게까지 지혜가 자랐을까.
그러나 놀람도 잠시, 마리아가 아들에게 다가가 물어봅니다. 48절인데요.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이 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놀람, 기쁨, 분노, 안도, 책망. 여러 감정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은 데서 오는 기쁨과 안도감도 있고,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아들에 대한 분노도 있고, 지혜의 말을 하고 있는 아들에 대한 놀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 속에서 물어봅니다. “왜 이렇게 했니.” 왜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니. 왜 여기에 남아서 이렇게 우리 속을 태웠니.
그리고 이 말에 뒤이어서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근심하였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뒤나오” 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본래 “괴로워하다, 고통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들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했다는 겁니다. 너무도 괴로웠다는 거예요.
오뒤나이. 누가복음에 이 단어가 또 한 번 나오는데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오죠. 이때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죽어서 각자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부자가 지옥에서 괴로워합니다. 그 괴로움 속에서 부자가 부르짖어요. 누가복음 16장 24절에 그가 부르짖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지옥의 불꽃 속에서 부자가 부르짖고 있는데, 이때 그가 “괴로워하나이다” 라고 부르짖는 말이 바로 “오뒤나이”입니다. 지옥의 불꽃 가운데 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겠습니까? 그 고통을 “오뒤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의 고통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겁니다. 아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지옥불에 있는 그 부자가 당한 고통에 못지 않은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는 동안 걱정이 사무쳐서 마음이 너무도 괴로웠어. 오뒤나이, 마음이 너무도 고통스러웠어. 그러니 다시는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아라.” 이렇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어요.
마리아의 심정이 느껴지시죠? 여러분, 이토록 어머니가 괴로워하면서 혼을 내시는데, 만약에 우리라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까요? 당연히 용서를 빌면서 약속을 하겠죠. “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여기서 사람들과 대화 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집에 가야하는 것도 잊어버렸어요.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앞으로 절대는 그러지 않을게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겁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의 반응은 일반적이지가 않아요. 특별합니다.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49절에 대답을 하시는데요. 누가복음 2장 4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아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엄마를 책망해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지금까지 요셉과 마리아가 아들을 찾느라 고생한 것, 마음 상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부모가 자식을 찾는 그 간절함을 전혀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이 적반하장 격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뭐라고 말해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적반하장이죠.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당연히 알아야지 왜 모르고 헛수고를 하셨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죠. 아니, 이 놈의 자식이 잘못했다고 빌지는 않고. 매를 때려도 할 말이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말이 있어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여러분, 지금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예루살렘 성전이에요. 그런데 이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집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죠.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나? 아버지 요셉이 여기 있는데, 요셉의 집에, 요셉의 장막에는 오지도 않고 지금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0절에 보면,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들을 혼을 내야 하는데 혼을 못 내고 어리둥절 한 채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사렛으로 돌아가요.
그런데 나사렛으로 돌아간 뒤에는, 예수님이 언제 성전에서 그렇게 밉게 대꾸했었냐는 듯이 부모의 말에 순종합니다. 51절에 기록되어 있죠.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님께서 부모님을 “순종하여 받드셨”어요. 이 말은 일시적으로 잠깐 순종했다는 말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부모에게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육의 아버지인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진심을 다해 순종하였고 그 뜻에 따라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바로 밑에 52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문장을 보게 됩니다.
결코 사랑스러울 수 없는 실종이라는 사건과 또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부모의 괴로운 심정, 그리고 그런 부모에게 버릇 없이 대꾸했던 말. 이 모든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실종사건과 예수님이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 사건이 매치가 되십니까? 잘 되지 않죠.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사랑스러운 분으로 그려가고 있는가. 왜 예수님이 실종사건을 통하여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그 답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9절을 다시 봐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예수님은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씀하셔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에 머물러 있음이 당연하다는 말씀이에요.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해요. 하나님의 아들, 신의 아들로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 이유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셨어요. 하나님의 본체로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사명의 길 또한 아셨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 될 것이지만,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길이에요. 그리고 그 길이 자신이 죽음으로써 완성되리라는 것 또한 분명하게 아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언제 아셨는가 하면, 고작 열두 살 나이에 이미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열두 살에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이미 시작하셨다고 말합니다.
열두 살에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아시고, 벌써부터 행동으로 보여주셨다는 거예요. 절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 예수님은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 아버지 집에 머무시면서 그곳에서 놀라운 지혜의 말씀을 사람들과 나누셨습니다. 듣는 자가 다 놀랄 정도로 그 말씀이 지혜로웠어요. 말씀 사역을 시작하신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여러분은 열두 살 때 뭘 하셨습니까? 저는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만화영화나 봤었던 것 같은데. 예수님은 자기 사명의 길을 벌써 걷기 시작하신 겁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이 그것을 시작하시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그의 부모가 찾으러 오고 난 뒤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즉시 멈추고 부모를 따라서 나사렛으로 내려가셔요.
예수님께서 마땅히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 놓고는, 그 즉시 부모를 따라서 갑니다.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을 멈춘 겁니다. 하늘 아버지 집을 떠나서 육의 아버지를 따라 가셔요.
이상한 일이죠. 여기 계속 머물러 계셔야 맞지 않을까요? 왜 예수님은 기껏 사역을 시작하셔 놓고, 나사렛으로 돌아가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 51절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 우리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아멘.
여러분, 예수께서 왜 나사렛에 내려가셨습니까? 순종하여 받드시기 위하여 내려가신 겁니다. 순종하여 받드시기 위하여. 그 순종은 누구를 향한 순종이겠습니까? 당연히 부모에 대한 순종이겠죠. 그리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정체성을 아셨고, 아시는 바대로 행하신 것 역시도 너무나 중요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아들로서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에 머물며 사역하셨고, 그리고 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미 율법 선생들까지도 놀랄 정도로 지혜로우신 예수님이 선한 것이 없는 나사렛 촌동네에서 사역에 대한 욕심을 다 내려놓고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쉽지 않죠.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을 사용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유명해지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본성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 내려놓으신 겁니다. 얼마 동안요? 무려 18년 동안이나.
열두 살 때부터 나중에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서른 살까지, 열여덟 해를 나사렛에서 내려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18년 동안의 시간을 자기절제의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자기절제의 시간.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 하셨을까요? 지금이라도 얼른 가서 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온갖 이적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 내려두고, 가정에 충실하며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동안에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린 나이에 이미 아시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열두 살에 성전에 머물렀던 것도,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도, 그리고 부모를 따라 나사렛으로 내려가 18년 동안이나 순종하여 받드셨던 것도,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셨어요. 그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본문에 비추어 본다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주의 교회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고, 주의 일을 행하는 그 안에 먼저 순종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것을 잃어가고 있어요.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주를 믿는 거룩한 성도라는 아름다운 향기가 사라지며, 단지 모양만 남은 껍데기 신앙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의 풍파와 어려움에 휩쓸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하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채로 현실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껍데기 신앙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예수께서 먼저 본을 보이신 모습을 따라,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뜻대로 순종하며 받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뜻을 순종하여 받듦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혜와 키가 자라며, 우리의 신앙도 날로 날로 성장하여서, 참으로 하나님과 세상 만민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국동제일교회 모든 성도님들 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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