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7 views
Notes
Transcript
<수요설교>
민수기 22:21-35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2022. 5. 11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발람의 길을 막으시고,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라고 경고를 하신 내용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발람은 브돌이라는 지역에서 점을 치던 점술가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무당이라고 하죠. 복채를 받고 점을 쳐서 앞일을 가르쳐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발람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발람 외에도 많은 점술가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발람의 고향인 브돌은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유브라데 강가에 있는 비옥한 지역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보더라도, 땅이 기름지고 비옥할수록 그에 비례해서 우상들의 숫자도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가나안 땅만 보더라도 온갖 잡신이 가득했습니다. 비의 신, 풍요의 신, 다산의 신, 전쟁의 신 무슨무슨 신이 많았어요.
이처럼 땅이 기름지면 그만큼 우상들도 늘어나게 됩니다. 발람의 고향도 마찬가집니다. 유프라테스 강이라고 하는 큰 강 가에 위치했기 때문에 매우 비옥해요. 그런 곳이다 보니까 더 엉망이었습니다. 발람은 바로 그런 곳에서 점을 치던 점술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점술가가 아니었어요. 굉장히 유명한 점술가였습니다. 소위 영발 좀 날린다는 점술가였어요. 아마도 근방 지역에 있는 모든 점술가 중에 가장 이름이 높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얼마나 이름이 높았냐면, 브돌에서 640km나 멀리 떨어져 있는 모압의 왕이 그 이름을 알 정도였어요.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발람에게 모압의 왕 발락이 신하들을 보내서 초빙을 하게 됩니다. 발락이라고 하는 이 왕이 근심거리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유명한 점술가를 초빙을 한 거예요.
발락이 무슨 근심이 있었는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에 대한 근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이 아모리 왕 시혼을 격파하고, 또 곧바로 바산 왕 옥을 무찌르면서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와 모압 평지에다가 진을 쳤거든요. 엄청난 숫자를 가진 이스라엘이 자기 앞마당에다가 진을 치니까 겁에 질린 거예요. 이스라엘이 우리한테도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이 내용이 민수기 22장 1절부터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2장 1절부터 3절을 봐 볼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모압의 왕 발락과 모압 정체가 이스라엘 때문에 두려워하고 번민하였습니다. 이것들이 쳐들어오면 어떡하나? 저 많은 숫자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근심을 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이 바로 점술가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무기를 사온다든지, 군대를 빌려온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저주를 내린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런데, 이때 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점을 쳐서 승패를 예언하기도 하고, 또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거나 파도가 잠잠하게 해달라거나 그런 제사를 많이 했어요. 이것은 사실 오늘날에도 하는 것들이죠. 요새는 많이 사라졌지만, 예를 들어서 차를 새로 사면 그 앞에 막걸리 사다가 고사를 지내기도 하지 않습니까? 사고 안 나게 해달라고 바퀴마다 막걸리를 뿌리면서 빌잖아요. 여러분, 그런다고 사고가 안 납니까?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생사화복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생명도 없는 차한테 빌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또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습니다만, 무당의 말을 듣고 정치를 하면 되겠습니까? 나라의 대소사를 무당 말 듣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라가 엉망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발락을 얘기하는 거예요. 발락이 나라의 운명을 무당에게 건 것 아니겠습니까?
발락이 점술가를 초빙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우습지만, 그 당시에는 말 그대로 나라의 명운을 건 결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전쟁이 벌어지느냐 마느냐, 싸우면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중대한 갈림길에서 점술가를 부른 겁니다. 나라의 운명을 점술가에게 건 거예요.
자, 그러면. 과연 어떤 점술가를 불러야 하는가? 한 민족을 저주하는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웬만한 점술가 갖고는 안 되죠. 가장 강대한 능력을 가진 점술가가 필요해요. 그래서 물색을 해본 결과 발람이 선택됩니다. 이 먼 모압에까지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점술의 대가, 가장 영발이 센 무당, 그게 바로 발람이었어요.
그래서 모압 왕이 발람을 초빙하기 위해 신하들을 보냅니다. 그 신하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발람을 찾아가요. 가서 ‘이러이러하니 우리와 함께 갑시다.’ 설명을 했겠죠. 그랬더니 그 마을 듣고 발람이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민수기 22장 8절에 보면, 발람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지금 발람의 말을 보면, 놀랍게도 발람이 여호와를 알고 있을 뿐더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대답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발람은 이방인입니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아마도 발람은 아람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이것이 맞다면, 발람은 아람 사람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아람 사람인 발람이 여호와를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더 의문인 것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대답하겠다고 말한 데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말을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어요. ‘혹시 발람이 비록 먼 이방 땅에서 사는 점술가이지만,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발람은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온갖 잡신이 있는 이방 땅에서 신들의 힘에 기대어 점을 치는 점술가였기 때문에 결코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발람은 능력을 구하기 위해 이 신 저 신 기웃기웃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먼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여호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연구를 했겠죠. 여호와가 어떤 신인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그런데 연구를 해보니까 능력이 대단하거든요. 그래서 여호와를 위대한 신 중에 하나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차에 모압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는 거예요. 발람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겁니다. ‘아,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내가 알아보니까 보통 만만한 신이 아닌데, 그 분이 보살피는 백성을 내가 저주하겠다고 하면 가만히 있을까?’ 도저히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그래서 섣불리 신하들을 따라가지 않고, 혹시 그 분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들어봐야 겠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괜히 잘못 따라갔다가는 불똥이 나에게 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밤에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2장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셔요.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이렇게 단호하게 막으셨습니다.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다. 감히 네가 저주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니 함께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아라.
그래서 발람이 함께 가기를 거절하고 모압의 신하들을 돌려보냅니다. 일이 잘 마무리가 된 거죠.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면 참 좋을 텐데. 모압 왕 발락이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발람에게 신하들을 보내요. 이번에는 더 격이 높은 고관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발람에게 아주 큰 대가를 약속합니다. 밑에 17절 말씀인데요. 17절에 보니까,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이번에는 아주 큰 것을 걸었습니다. 크게 존귀하게 하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랬더니 발람이 여기서 어떻게 할까요? 넘어갈까요? 안 넘어갈까요? 네, 넘어갑니다. 그래서 밑에 18절에 보면 발람의 속마음이 드러나요. 18절에 발람이 이렇게 말을 하죠.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지금 발람의 말에 보면 언뜻 보기에는 거절을 하고 있죠. 하지만 자세히 보면 발람의 말 중에 “은금”이 나와요. 신하들은 은금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발람이 먼저 이 말을 꺼낸 거예요.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겁니다. 은금을 갖고 싶은 욕심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거죠.
애초에 발람은 복채를 받고 점을 쳐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발람에게는 누가 왕인가 하면, 복채를 많이 주는 사람이 왕이에요. 신이고 뭐고 필요 없이 돈이 왕입니다.
겉으로는 마치 자기가 무슨 경건한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은금을 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은금을 바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뒤에 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밑에 민수기 22장 19절에 보니까,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고 합니다. 정말 청렴하고 신실한 선지자라면 여기서 유숙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로 돌려보냈어야 맞죠. “내가 은금도 필요 없으니 너희 다 돌아가라.” 이렇게 했어야 맞아요. 하지만 발람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지금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과 모압이 맞닥뜨려서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특수한 상황이거든요. 한 마디로 전쟁특수 기간이에요.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모압 왕과 같은 권력자가 신하들을 보내서 이렇게 정중하게 초빙을 하겠어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몰라요. 그래서 발람이 신하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하루 유숙하게 한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다시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기다린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함께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서 함께 가라고 하시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고 성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하나님이 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어요. 오늘 본문 20절 말씀인데요. 우리가 20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같이 가라고 허락을 해주십니다. 물론 뒤에 더 중요한 말이 있어요. 그것은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에게는 뒤에 따라온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라는 말이 중요했습니다. 지금 앞에 자막을 보면, 다른 글씨는 검은데 일어나 함께 가라는 말만 빨갛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 말만 눈에 확 들어오죠. 발람도 그랬을 겁니다. 다른 말은 안 들려요. “일어나 함께 가라”는 말만 귀에 선명하게 들렸을 겁니다. 일어나 함께 가라!
그래서 기분 좋게 그 밤에 잠을 자고, 이제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룰루랄라, 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길을 가기 시작해요. 바로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길을 막아섭니다.
민수기 22장 22절을 보면, 정확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분명히 어젯밤에 하나님이 가라고 허락하셨는데, 아침이 되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셨어요. 그리고 못 가게 하려고 사자를 보내서 길을 막았습니다.
왜 밤에는 허락하시고, 아침에는 막으셨을까요? 가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그새 마음이 변하셨나? 왜 갑자기 길을 막으셨을까요?
여러분, 그것은 지금 발람이 가려는 길이 사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2절로 건너뛰어서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하나님은 발람의 길이 사악함을 보셨습니다. 이는 곧 발람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모압 왕이 시키는 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는 것을 아셨음을 의미합니다.
애초에 신앙심이라고는 없는 발람으로서는 하나님이 설마 그의 마음까지 꿰뚫어보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만을 준행하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날 아침에, 발람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 무엇을 고백하든,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품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신실함으로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23절을 보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이 돼요. 어떤 장면입니까?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피해서 밭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죠. 23절에 보니까,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못 봤어요. 그래서 어, 이 나귀가 왜 이러나, 하고 채찍질을 해요. 나귀는 봤는데, 발람은 못 봤다? 원래는 그 반대가 정상이죠. 나귀는 못 보고, 영적으로 민감한 발람은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발람의 눈이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어요. 그의 눈에는 지금 그 대신 다른 것이 보여요. 대궐 같은 집이 보이고, 가득히 쌓인 은금이 보이고, 권세가 보입니다. 이번에 크게 한탕 해서 떵떵거리면서 살게 될 앞날이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자기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칼을 빼들고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길을 막고 서 있는 사자를 보지 못하고, 애꿎은 나귀를 채찍질했습니다. 나귀는 주인을 살리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발람은 그를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마치 우리를 살리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채찍질한 백성들처럼, 무지한 짓을 한 겁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 못해요. 발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나귀가 밭에서 나와서 다시 길을 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서있었어요. 그 길은 좌우에 담이 있었습니다. 나귀가 이번에도 주인을 살리려고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를 피해서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갔습니다. 그 바람에 발람의 발이 나귀와 담 사이에 끼었어요. 그래서 발은 발대로 아프고 화가 나서 또 채찍질을 했습니다. 여전히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귀는 묵묵히 주인을 태우고 길을 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길이 더 좁아서 좌우로 피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더 가지 못하고 그냥 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발람이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이제는 아예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발람으로서는 왜 갑자기 나귀가 밭으로 들어갔다가 담벼락에 붙었다가 땅바닥에 엎드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이해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나귀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오늘따라 이럴까?’ 하는 마음이 없었어요. 그저 은금을 향해서 가는 길이 지체된 것이 화가 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때렸어요.
그런데 바로 이때 아주 놀라우면서도 희한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나귀가 말을 한 장면이에요. 나귀가 말을 해요. 희한하죠? 그런데 이 나귀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니, 민수기 22장 28절에 나귀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나귀가 얼마나 억울하면 말을 해요. 여호와께서 입을 열어주시니까 참았던 억울한 심정을 그대로 막 쏟아냅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여러분, 나귀는 잘못 한 게 없죠. 오히려 칭찬 받을 일을 했어요. 만약에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무시하고 계속 갔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발람이 칼에 맞아 죽었을 겁니다. 나귀가 발람을 살린 거예요. 그런데 칭찬을 받기는커녕 채찍을 맞았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나귀의 말에 그 억울함이 서려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도를 했는데, 마치 무슨 다단계 영업사원 취급을 하고. 상종하기 싫어하는 그런 모습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저 사람이 그 길을 계속 가면 결국에 심판의 칼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요. 그래서 그 사람을 데리고 밭으로 가고 담벼락에도 붙고, 더 못 가게 딱 멈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해를 못해요. 오히려 우리를 핍박하고, 손가락질 합니다.
이럴 때 너무 억울하죠. 우리가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흑심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그들의 앞날이 보이니까, 살리려고 하는 것뿐이거든요. 선한 의도로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참다 못해서 억울함을 토로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핍박하느냐” 이렇게 억울한 심정을 외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어렵습니다. 나귀처럼 억울한 심정을 쏟아낼까요? 아니면, 그냥 저 사람을 포기해버릴까요?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한번 떠올려보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마음이 너무도 답답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말만 해야 합니다. 다른 말 할 것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말하고, 복을 말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억울한 것은 다 하나님께 쏟아내세요. 우리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낸다 해서 더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저들에게 이해를 바라지 마세요. 저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람도 나귀를 이해하지 못해요. 나귀가 발람에게 억울함을 표출하니까 발람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아이고, 그랬냐? 내가 미안하다.’ 이렇게 반응하지 않아요. 적반하장으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봐 보니까,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발람이 전혀 미안해하지 않죠. 나귀를 이해하지도 않아요.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에 때린 것 아니냐?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너는 죽었을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았으니까 오히려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이 발람의 반응입니다. 적반하장, 오히려 자기가 더 화를 내요.
그리고 이것이 전도를 받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복음을 들으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를 해야 하는데, 화를 내면서 마치 스데반 집사님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처럼 핍박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가가는 저 사람들이 발람처럼 우리를 핍박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어요. 그것은요. 사실은 우리가, 사실은 내가 발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매우 잘못된 일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작년에 한창 코로나로 시끄러울 때 수도권에 있는 모 교회를 통해 확진자가 많이 발생이 됐었죠. 그들은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집회를 강행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희망이라고 말을 해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집회를 열고 뜨겁게 기도하는 자기들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나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겨우 잠잠해져 가던 코로나사태가 다시 확산되었어요. 확진자가 수 백 명이 나와서 결국에 수도권에서는 모든 교회가 예배를 중단하도록 행정조치가 내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더욱 큰 비난을 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이것을 바라셨을까요? 예배가 끊어지고, 더 많은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만을 준행해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길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그 길로 가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사는 길인 줄로 믿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저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하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밤에 발람을 경고하시고, 다음날 아침에 그의 사악한 길을 막아 칼을 빼들고 다시 한 번 강력하게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35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경고하고 있어요. 민수기 22장 35절을 우리가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아멘.
결국에 오늘 말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에서 건지시고 축복하시기 위해 역사하신 사건입니다. 지금 이 사건에 대해서 이스라엘 자손은 알지 못해요. 지금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는 모압 평지에서 640km나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까맣게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그 먼 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하여 역사하셨습니다. 점술가 발람에게 사자를 보내어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밤에도 명령하셨고, 다음날 아침에도 명령하셔서 절대로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지 못하도록 먼 곳에서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과 싸우고 바산 왕 옥과 싸우는 육의 전쟁을 치를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영적 전쟁을 벌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승리하심으로. 백성들을 저주에서 건지사 축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동일하게,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단단한 반석처럼, 피할 요새처럼 든든하게 우리를 안위하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어렵고 힘든 때에 마땅히 우리가 기도에 힘쓰고 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다만, 그럴 때일수록 더 겸손하게 잠잠하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오직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대로만 순종하며 나아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코로나라고 하는 기나긴 어둠이 서서히 걷혀가고 있습니다. 이제 실외에서는 마스크도 벗고, 거리두기도 거의 사라졌어요. 이제 다시 뜨겁게 예배의 불을 회복할 때가 왔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때일 수록, 우리가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혹시 누군가가 시험에 들지는 않을지, 나의 입을 조심하고,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발람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내가 나귀와 같이 억울함을 쏟아내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나를 돌아보고, 신앙의 끈을 조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모인 우리는 모두 주의 은총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시험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굳센 믿음 가지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따라 나아갈 때 반드시 밝은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사자가 가로막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길로 준행하여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선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과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