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세대교체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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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1:67-80
“신앙의 세대교체”
2023. 10. 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신앙의 세대교체”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찬송을 하는 장면입니다.
사가랴가 늙은 나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과 기쁨이 충만해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본문의 제목을 “신앙의 세대교체”라고 정했는데요. 이 제목 그대로, 오늘 본문이 사가랴에서 그 아들 요한에게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67절을 봐 볼까요?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예언을 시작하죠. 그리고 그 밑으로 예언의 내용이 쭉 나오고, 마지막 80절에 가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80절에 보니까,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자연스럽게 사가랴에서 아이로 초점이 바뀌죠. 오늘 본문이 시작될 때는 그 부친 사가랴의 시점이었어요. 그런데 끝날 때는 그의 아이를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앞으로는 사가랴가 아니라 그 아이가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에 사가랴가 다시 등장하지 않아요. 여기서 노래하고 나면 사가랴는 더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요한을 소개할 때 “사가랴의 아들 요한” 이렇게 요한을 소개하는 수식어로만 등장을 해요. 마치 사가랴가 존재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사가랴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에 더이상 등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전체에서 사실 사가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인물일 수 있어요. 그냥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엑스트라죠. 우리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만 주목을 하지,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제목이 뭐예요? 신앙의 세대교체. 여러분, 세대교체라는 것은 윗세대에서 다음세대로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윗세대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다음세대로 넘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윗세대가 있어야 다음세대가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가랴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세례 요한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오늘 본문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사가랴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가 있었기에 세례 요한이 존재할 수 있었고, 그가 있었기에 올바른 신앙이 세례 요한에게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도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대를 이어서 계속해서 신앙의 세대교체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윗세대가 바로서야 됩니다. 건물의 기초가 단단해야 크고 좋은 건물을 지을 수 있어요.
오늘 우리가 내 집안의 신앙의 윗세대로서 올바른 신앙의 본을 보이며, 그 신앙을 잘 물려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67절을 다시 보면,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되.”
여기서 예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페튜오” 라는 말이에요. 프로페튜오. 이 말은 “예언하다, 선지자노릇 하다” 이런 뜻입니다. 미리 앞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선지자는 아니죠. 사가랴는 제사장입니다. 영적인 직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예언의 은사는 없었어요. 그런데 왜 사가랴가 마치 선지자처럼 예언을 했다고 기록을 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예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언이 뭘까요? 기본적으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보다 깊게 그 의미를 살펴보면, 예언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선포하면, 그것이 바로 예언이에요. 오늘 67절 말씀을 따르자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하는 말, 이게 예언이죠.
그리고 이 예언은 없던 말을 새롭게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서 해야 돼요.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헛된 소리에 불과합니다.
지금 사가랴 역시도 성경에 근거해서 노래하고 있어요. 성경책으로 보면, 각 구절마다 옆에 작은 글씨로 다른 성경구절이 쓰여 있죠. 오늘 본문 78절에 보면, 옆에 뭐라고 써있습니까? 말라기 4장 2절이라고 써있죠. 이것은 78절의 말씀이 말라기 4장 2절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가랴가 자기 맘대로 노래를 지어낸 게 아니라, 말라기서 말씀을 인용해서 노래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합해보면,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경에 근거하여, 노래를 하였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지금 사가랴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에 천사가 소식을 전해줄 때만 해도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심으로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어요. 성경에 나오는 다른 믿음의 선진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 믿음의 사람이 뭐라고 찬송을 하는지 한 번 볼까요? 사가랴의 찬송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눠지는데요. 먼저 68절부터 75절까지가 한 단락이고, 76절부터 79절까지가 한 단락입니다. 68절부터 75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송입니다. 그리고 76절부터 79절까지는 세례 요한과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찬송입니다. 이렇게 두 단락으로 나눠지는데요.
먼저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함에 있어서, 마치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이미지를 가지고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가랴는 구원의 핵심이 원수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8절을 보면, 사가랴가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하나님이 백성을 속량하신다고 노래해요. 속량이 뭡니까? 문자적으로 본다면 ‘몸값을 지불하다’ 라는 뜻입니다.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노예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사람대 사람의 거래라고 본다면, 그냥 인신매매죠. 사람의 노예에서 다른 사람의 노예로 옮겨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속량은 사람대 사람의 거래가 아니에요. 하나님 대 죄의 거래입니다. 하나님이 죄의 노예로 있던 자를 몸값을 지불하고 죄에서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속량이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죠. 그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는 우리를 모든 죄와 원수로부터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가랴가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노래하고 있어요.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속량해주어야 하는데, 그 분이 바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또 밑에 이어서 보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 노래는 하나님이 백성을 속량하시기 위하여 누군가를 보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를 보내시는가 하면, 구원의 뿔을 보내셔요. 구원의 뿔. 뿔은 고대 근동사회에서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뿔은 뭡니까? 구원의 힘, 구원의 능력. 이런 말이 되겠죠.
구원의 능력이신 누군가를 보내신다는 겁니다. 어디로요? 종 다윗의 집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이 종 다윗의 집에 구원의 뿔을 보내서 그 집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즉, 다윗의 집에서 태어나게 하신다는 것이죠.
이것이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사가랴가 자기 맘대로 지어내는 게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들을 토대로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밑에 70절에 보면 사가랴가 이렇게 덧붙이죠.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지금 노래하고 있는 것이 다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라는 겁니다.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예언의 본질입니다. 예언은 내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거기에 곡조가 붙으면 찬송이 되는 것이죠.
자, 또 사가랴가 뭐라고 찬송하는지 볼까요? 7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아멘.
이것 역시도 출애굽의 이미지입니다. 원수에게서 벗어나는 것, 이것을 구원이라 노래하고 있어요.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함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또 밑에 74절에서도 보면, 똑같은 말이에요.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는 것,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 해방되는 것, 이것이 사가랴가 갖고 있던 구원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누가 주시는가? 바로, 모든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주신다는 겁니다. 아까 69절에서 봤던 것처럼, 다윗의 집에서 일어설 구원의 뿔, 그 분이 구원을 주셔요.
그 분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원수에게서 속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하십니까? 75절에 보니까,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말씀에 보면, 구체적으로 세 가지의 특권을 주시죠. 성결하게 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두려움이 없게 하십니다. 구원함을 입은 백성은 먼저 성결하게 돼요. 성결은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구별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두 번째로 의롭게 됩니다.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신다는 거예요. 또 마지막으로 두려움이 없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두려움이 제거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두려움이 제거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무대뽀가 되겠죠. 절벽 앞에서도 무서운 줄 모르고 훌떡훌떡 뛰어내리고, 불속에도 들어가버리고, 그런 사람은 정상이 아니에요. 감정이 제거되면 정신에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에요.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아포보스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은 본래 “포보스”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에요. 포보스는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부정접두사 “아”가 붙어서 “아포보스”가 됐어요. 아포보스는 “두려워하지 않음” 이라는 말이에요. 포보스, 아포보스. 두려움, 두려워하지 않음.
사가랴는 이것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본래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속량을 받고 나면, 본래 두려워하던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원수든, 고난이든, 시험이든 무엇이 되었든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의 특권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특권을 우리가 갖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다 갖고 있어요. 여러분 다 속량을 받으셨잖아요. 예수님이 피로 값을 지불하시고, 여러분을 죄의 사슬에서 속량하셨어요. 우리가 이미 해방됐습니다. 그리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 특권을 누리면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사가랴의 노래 첫번째 단락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노래.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단락, 요한과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노래가 시작되는데요. 오늘 본문 7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아멘.
여기서부터 사가랴가 자기 아들에게 불러주는 형식으로 노래를 합니다. 마치 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노래를 해요.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아이”라는 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 아이는 헬라어로 “파이디온”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파이디온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그냥 “내 아들아” 라고 하면 더 친근하고 좋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 아이여” 라고 했단 말이죠. 너무 정 없고, 딱딱하게 불러요.
왜 요한을 이렇게 불렀을까, 이것은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봐야 알 수가 있어요. 아이가 헬라어로 파이디온이라고 했죠. 그런데 아까 69절에 보면, “그 종 다윗”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여기서 “종”이라는 말이 아이라는 말과 연결이 됩니다.
자, 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이도스”라는 말입니다. 파이도스. 파이디온과 발음이 비슷하죠. 파이도스, 파이디온. 종, 아이.
그러니까 사가랴는 파이도스와 파이디온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다윗과 요한을 연결시키고 있는 겁니다. 파이도스 다윗, 파이디온 요한.
과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일을 누가 감당하는 거예요? 이 아이, 요한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파이도스와 파이디온, 두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과 요한을 연결하는 거예요.
이것은 사가랴가 내 아들이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으로 하는 노래가 아니에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예언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믿지 못했던 그 예언을 이제는 믿음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메시아를 하나님과 연결을 합니다. 요한을 다윗과 연결을 했다면, 메시아는 하나님과 연결을 해요. 76절을 다시 보면, 아이가 누구 앞에 가서 길을 준비합니까? “주” 앞에 가서 길을 준비하죠. 이것이 아이의 사명입니다. 여기서 주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가리켜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주”라는 말이 또 있죠. 어디에 있습니까? 68절에 있고, 70절에 있고, 75절에 있죠. 여기에 있는 주는 모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68절부터 75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송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주는 모두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76절부터는 요한과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찬송이죠. 그래서 똑같은 “주”라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가 바뀌는 겁니다.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로 바뀌는 거예요.
다윗으로부터 요한으로 세대를 넘어 연결되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사역이 위임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사역을 예수님이 바통을 이어받는 겁니다.
바로 이 연결의 이미지를 사가랴가 노래하고 있어요. 다윗과 요한, 하나님과 예수님.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본인은 이 노래를 끝으로 무대에서 사라져요.
자기 일을 다 끝마치고, 뒷일은 다음세대에 넘겨주고 본인은 무대 밖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성부에서 성자로, 종에서 아이로, 조상에서 후손으로. 물이 흐르듯이 신앙도 흘러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 흐름 가운데 있습니다. 위로부터, 우리에게 신앙이 흘러왔고, 또 우리에게서 밑으로 신앙이 흘러갑니다. 우리에게 흘러왔을 때는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할을 마치고 나면 무대를 다음세대에게 깨끗하게 비워줘야 돼요.
모세가 아직 기력이 있었으면서도 여호수아에게 넘겨줬던 것처럼, 우리들도 다음세대를 신뢰하고 기꺼이 넘겨줘야 합니다. 그런데 넘겨주기 전에,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다음세대를 제대로 세워야겠죠. 믿고 맡길 수 있을만한 다음세대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올바른 본을 보여야 돼요. 신앙의 모델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봐 볼까요? 오늘 본문 6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아멘.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윗세대의 본입니다. 우리가 먼저 성령충만해야 돼요. 그래야 성령충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가랴는 성령충만했어요. 그랬더니, 그의 아들이 어떻게 자랐습니까? 오늘 본문 80절을 봐 볼까요? 80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아멘.
먼저 아이가 자랐다는 말은, 다른 아이들처럼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체적으로 자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뒤에 심령이 강하여진다는 말은 아무에게나 해당되지 않아요. 이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앞에 자란다는 말은 능동태로서, 스스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키가 알아서 자라잖아요. 하지만 심령이 강하여진다는 말은 수동탭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강하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예요? 성령이죠.
성령이 심령을 강하여지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성령충만했더니, 그 아들도 성령충만해요.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올바른 신앙의 본을 보이고, 올바른 신앙의 가르침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 역시도 성령충만하게 자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내 자녀가 누구를 본받겠습니까? 나를 본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십니까?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라십니까? 자녀가 구원받기를 바라십니까? 그 해답은 하납니다. 내가 먼저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 그리하면, 내 자녀가 나를 본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내 가정과 우리 다음세대의 좋은 본이 되어서 자자손손 아름다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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