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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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사도행전 18:1-11
“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
2022. 1. 7
조 정 수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던 때에 대한 장면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의 난동을 피해 베뢰아로 갔다가,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쫓아오자 다시 아덴으로 떠났고, 이후에 고린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함께 지내며 천막 만드는 일을 같이 하였고,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복음을 강론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과거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해 바울과 합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하게 되자 바울이 큰 힘을 얻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혼자일 때도 물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말씀을 전하였지만, 든든한 동역자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은 또다른 원동력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담대하게 힘 있는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대적하여 비방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충만한 말씀 앞에서 반드시 선한 반응만 일어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행하는데 어떻게 방해가 있을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성경 안에는 참으로 이러한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장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만 해도 수많은 방해와 비방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그 자신이 교회를 대적하던 대적자였습니다.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면 마땅히 어떠한 사단의 권세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방해와 대적들을 무찌르며 승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할 텐데, 오히려 반대로 실패하고 무너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면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곧이어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믿었는데, 왜 실패하는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는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일을 이렇게 만드셨을까. 왜 상황을 그냥 방관하고 계실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겪는 방해와 실패와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괜히 주시는 벌이 아닙니다. 그냥 손 놓고 방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크신 계획인 것입니다.
그 뜻을 우리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이 다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방해와 난리를 겪고 베뢰아까지 쫓겨가 거기에서 일행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거기서도 쫓겨가서 아덴에 이르고 또 고린도에까지 오게 된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믿습니다.
바울은 일행과 헤어져 홀로 고린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합니다.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쓴맛을 봤던 바울은 아덴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철학자들과 쟁론을 하는데 심력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만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는 반응만을 이끌어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몇 사람을 열매로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큰 수확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의 믿음을 본 것만으로도 바울은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아덴의 인구가 대략 1만 명 정도로 추정이 되는데요. 고린도는 그보다 75배 이상 큰, 약 75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도시였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이상한 사람도 많다, 이런 말을 하고는 하는데요. 75만 명이나 되는 도시라면 그 안에 이상한 사람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바울의 눈에는 수많은 우상과 온갖 난잡한 문화와 또 그것을 숭상하는 이방인들, 그리고 복음의 대적자들로 가득한 고린도가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악의 구렁텅이로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곳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복음을 전한다 한들 소용이 있을까. 괜히 여기서 힘만 쓰고 또 어딘가로 도망쳐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러한 염려와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할 정도로 바울은 고린도에서 거대한 난관에 맞닥뜨려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바울이 처한 상황은 성공과 실패 중 분명 실패에 가까운 상황일 것입니다. 일행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혼자 떵그러니 고린도라는 도시에 도착한 바울의 모습은 남루하고 꾀죄죄하며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실패자의 모습 그대로였을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던 모습과 너무도 비교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의 모습이 어떻든지, 상황이 어떻든지 우리는 결코 바울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패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안에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8장 2절에서 바울이 그의 사역에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두 사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서 16장 4절에서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고 증언할 정도로 고결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귀한 동역자들을 만나도록 하나님은 바울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두 사람과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여비를 충당하였고, 안식일마다 틈틈이 회당에 나가서 말씀을 강론하고 주님을 믿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던 때에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하여 마침내 선교팀이 다시 뭉치게 되었습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전도서 말씀처럼, 혼자에서 다시 셋으로 뭉친 바울은 기쁨이 가득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서두에서 본 바와 같이, 바울은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서 그 말씀을 대적하고, 말씀을 비방하는 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역시도 세상의 눈으로는 비웃음을 당할 만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쩌면 이렇게도 권위가 없어서 이렇게 비방을 당하는가. 데살로니가에서도, 베뢰아에서도 쫓겨나더니. 아니나 다를까 고린도에서도 똑같이 쫓겨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조롱하고 비웃을 만한 그런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말씀에 권위가 없어서 일어난 실패일까요? 오늘 본문 6절을 다시 보면, 바울이 옷을 털면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책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간다”는 말은 너희가 한 일을 너희가 책임져야 한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제 내가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데, 그래서 앞으로 너희에게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다 너희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실패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실패도 아니고, 바울의 실패도 아닌, 유대인들의 실패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말하며 떠나가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단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성취감을 주었을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성공이 아니라 너무나도 거대한 실패였습니다. 더 이상 복음을 듣지 못하게 된 실패,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게 된 실패,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끊어진 실패.
세상에서 어떤 권세와 어떤 성공을 이룬다 할지라도, 거기에 복음이 없으면,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인생은 아무리 초라하고 나약하고 누구나 다 조롱하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누구보다 화려하고 영광된 성공을 거둔 인생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공한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 역시도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아 다시 한 번 강론의 자리를 떠나야 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값진 만남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또 그 바로 옆에 있는 회당의 회당장인 그리스보를 만나 그와 온 집안과 더불어 수많은 고린도 사람에게 믿음의 도를 전하여 믿고 세례를 받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공이었습니다. 마침내 고린도 땅에서 말씀의 능력이 일어난 기쁜 사건이었습니다. 그동안 바울이 겪었던 핍박과 도망과 좌절이 보상받는 값진 승리였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을까요. 드디어 승리했다며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뜨겁게 올려드리는 바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9절 말씀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지금 기쁨이 충만할 텐데,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실까.
이것은, 바울의 고린도 사역이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바울 그 자신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디도 유스도와 그리스보와 많은 고린도인이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75만 명에 이르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많은 방해와 비방을 받게 될까.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될까.
이러한 두려움이 바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아멘.
주님은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일행과 헤어져서 혼자였을 때도, 일행과 합류하였을 때도, 대적들에게 비방을 당할 때도, 많은 믿음의 열매를 얻었을 때도, 주님은 바울과 함께하셨습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주님은 바울을 버리지 않으셨고, 그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그와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바울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던 주님이 우리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때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방황하고 낙망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가만히 버려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욱 크고 놀라운 승리의 감격을 맛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때로는 가시밭길로, 때로는 불길 속으로 인도하시지만, 마침내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바울이 두렵고 떨리는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머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혼탁하고 어지러운 고린도에서 마침내 교회를 일으켜 세웠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다면 어떠한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이 약속 붙들고 세상의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담대하게 예배자로 나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