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말씀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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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사무엘상 3:1-1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말씀을 들으라”
2023. 1. 27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말씀을 들으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제목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말씀을 들으라”
이 제목처럼, 오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말을 들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던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께서 부르신 말을 들은 사건이죠.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무엘은 어머니인 한나의 기도로 태어났고, 또 서원에 의해서 갓 젖을 뗀 어린 나이에 여호와의 전에 거하면서 평생을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갓난아기였던 사무엘이 이제 소년이 되어 여호와를 섬기며 생활하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소년일 때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그에게 일어납니다. 그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사건이죠.
그런데 여호와께서 무엇으로 부르셨는가 하면, 말씀으로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의 귀에 또렷하게 들리도록 말씀으로 부르셨어요.
그런데 이 때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 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 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봐 볼까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도 없고, 말씀을 읽는 사람도 없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도 없는 시대. 사람들이 말씀에 관심이 없었어요. 심지어 하나님도 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앞에 사무엘상 2장 12절을 보면, 엘리의 아들들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에 대해서 뭐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사무엘상 2장 12절을 봐 볼까요?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여기서 알지 못했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머리로는 알지만, 그분을 만난 적도 없고, 말씀을 들어본 적도 없고, 그래서 두려워하기는커녕 무시하고 마음대로 죄악을 일삼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당한 것은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장들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할 정도면, 일반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볼 것도 없죠. 영적으로 너무나도 무지하고 어두운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에 여호와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사무엘에게 말씀을 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보면, 사무엘은 엘리의 아들들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죠. 1절을 봐 볼까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였던 엘리의 아들들과 달리, 사무엘은 젖을 뗀 갓난아기 때 성전에 와서 먹고 마시고 생활하면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전념했어요.
그래서 비록 지금 나이는 어린 소년이지만, 이스라엘 중 그 누구보다 여호와께 가까운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있긴 했지만, 엘리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에 걸맞지 않는 부족한 사람이었어요. 그가 인격적으로 잘못된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요.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갔다. 눈이 점점 어두워 갔다는 말은 이제 그의 나이가 많아서 시력이 나빠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영적으로 어두워져 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표현입니다. 1절의 말씀과 연결이 되는 표현이죠. 1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아요. 이상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환상입니다. 영어로는 비전이에요. 비전이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완전히 안 보이는 것은 아니고,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주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이상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을 누가 볼 수 있느냐? 영적으로 민감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엘리는 눈이 어두워서 못 봐요. 누구보다 영적으로 민감하고 눈이 밝아야 할 제사장이 눈이 어두워서 못 본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백성들의 영적 리더자인 엘리의 현실이었습니다. 자기 아들들하고 다를 것이 없어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셔도 듣지 못하고, 환상을 보여주셔도 보지 못하는 그런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절 말씀을 다시 보면,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낮 동안에 일과가 끝나고, 해가 지면 나이가 많은 엘리는 일찌감치 자기 처소에 가서 누웠어요. 그런데 반면에 밑에 3절을 보면, 사무엘은 어떻습니까? 3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습니다. 엘리와 사무엘의 모습이 비교되죠.
나이가 들고 눈이 어두운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고, 어린 소년인 사무엘은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습니다. 물론 이것은 각자 맡은 직분이 다르기 때문에 머무르는 장소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사무엘이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낮 동안에도 여호와를 섬기는데 열심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밤에도 여호와의 전 안에 머물면서 여호와를 떠나지 않는 사무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거든요.
낮이나 밤이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떠나지 않고, 늘 머물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무엘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예뻐 보였을까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죠. 단지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게 아니에요. 그의 삶이 하나님 중심이었기 때문에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성전을 사모하고, 성전에 머물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예배하고 찬송하며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4절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셔요. 4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거하며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무엘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여호와께서 특별히 밤에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낮에 열심히 여호와를 섬길 때가 아니라, 모든 일과를 마치고 누워 있는 이 밤에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앞이 캄캄하여 실족하기 쉽고, 도둑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험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을 만나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야곱이 밤에 돌베개를 베고 잘 때에 사닥다리 환상을 보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또 사도 바울도 밤에 환상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밤은 우리에게 위험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별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이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무엘에게도 밤이 은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우습게도 사무엘은 그 음성이 여호와의 음성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왜 몰랐을까요? 오늘 본문 7절에 보니까,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여호와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말씀이 희귀한 시대다 보니까 어쩔 수 없었겠죠. 들어본 적도 없고, 이상을 본 적도 없고. 무엇보다도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여호와를 직접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었다는 겁니다.
아마도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이 귀에 들려올 거라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뭔가 보고 배운 게 있어야 하는데. 엘리 역시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고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엘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는 모습을 사무엘이 봤다면,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는 사모함을 가졌겠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의 음성이라 깨닫지를 못해요. 그저 엘리가 부르는 말로 알았던 겁니다. 본문 5절에 보니까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사무엘이 엘리가 부르는 줄 알고 엘리를 찾아갑니다. 그랬더니 엘리는 부른 적이 없으니까 다시 가서 누우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가서 누웠어요. 만약에 여기서 사건이 끝났다면, 그냥 별 것 아닌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겠죠.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이것은 그냥 이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부르실 자를 반복해서 부르셔요.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 반복해서 그를 부르십니다. 반드시 그에게 시키실 일이 있기 때문에 그를 불러서 사명을 주시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사무엘을 반복해서 부르시죠. 한 번으로 안 되니까 두 번, 두 번으로 안 되니까 세 번 부르셔요. 그 때마다 사무엘은 엘리를 찾아가죠. 무슨 코메디 하는 것도 아니고, 밤에 왔다갔다 똑같은 일을 반복해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마치 한 편의 코메디를 하듯이 행동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이때 당시의 신앙의 현실이었습니다. 말씀이 희귀하여 말씀을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고, 환상이 흔히 보이지 않아서 환상을 본 적도 없는 시대. 비전이 없는 시대예요. 제사장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수종 드는 아이와 똑같은 레벨로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유튜브나 인터넷, 여러 매체를 통해서 말씀이 얼마나 많이 넘쳐나는지, 말씀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넘쳐나는 이런 시대라도 여전히 지금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씀이 넘쳐나지만, 그 말씀이 정작 나에게 생명이 되지 않고, 나에게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나에게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결국에 우리는 말씀에 있어서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늙은 엘리처럼 우리의 눈도 어두워져 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런 때일 수록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시대라도 반드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한 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깨달아 알 때까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반드시 그런 은혜를 우리가 누릴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나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똑같이 성전에 있었어도 엘리는 누리지 못했던 것처럼, 은혜를 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가? 그것은 첫 번째로, 우리가 여호와의 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전에 머물러야 돼요. 그냥 단순히 여호와의 전에서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들려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어디서 말씀을 듣고 이상을 볼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전이죠. 여호와의 전에서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특별한 은혜를 받기를 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믿으십니까?
우리가 여호와의 전에, 예배당에 머물 때에,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보다 분명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84편 10절에서 시편기자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아멘.
세상에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곳이 있어도, 하나님이 계신 곳이 제일인 줄로 믿습니다. 제일은 뭐니뭐니 해도 국동제일. 하루를 살아도 주의 궁정에서 살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국동제일교회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엘리가 부르는 것으로 알았지만, 그럼에도 그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르심에 순종하여 엘리를 찾아갔어요. 만약 사무엘이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말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고 무시했다면, 어쩌면 사무엘이라고 하는 위대한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향하여 부르시는 말씀, 그 말씀은 분명히 여호와의 전 안에 머물 때에 들려옵니다. 그런데 때로는 성전 밖에서 들려올 때가 있어요.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유튜브나 여러 매체를 통해서 들려올 때도 있고, 혹은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서 들려올 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제 동기 목사님이 해준 일화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제가 신대원 1학년 때, 그때는 저나 그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었죠. 그 분이 중등부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였는데, 이제 주일에 예배를 준비하려고 아침에 중등부실 문을 열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도어락이 안 잠겨 있고 열려 있었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왜 안 잠겨 있지?’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한 학생이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냐 하면, 두 세 달에 한 번 교회 올까 말까 하는 학생이었대요.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그 친구한테 물어봤답니다. “야,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교회에 왔냐? 무슨 일 있냐?”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게임을 했거든요. 그런데 몇 판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랑 채팅으로 말싸움을 하게 됐는데, 그 사람이 저한테 ‘야, 너 게임도 더럽게 못하는데, 게임 망치지 말고 교회나 가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오기가 생겨서 ‘그래, 교회나 갈란다.’ 하고 말았는데, 게임이 끝나고 나니까 계속 그 말이 생각이 나서 그냥 씻지도 않고 교회에 왔어요.”
이렇게 말을 했다는 거예요. 진짜 희한한 일이죠. 그 전도사님이 예전에 그렇게 교회 좀 나오라고 말해도 안 나오더니, 게임에서 욕하는 소리를 듣고 교회에 나왔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순종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 가라는 그 말씀을, 물론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거친 말로 하였지만, 그 말이 마음에 박혀서, 결국에는 그 말에 순종하여서 교회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화처럼, 참으로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때에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엄숙한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통해 깨닫고 신앙이 더욱 굳건해져가기도 하지만, 이렇게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이 임하고, 그 말씀이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유혹하는 헛된 소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를 사랑의 매로 때리고, 때로는 긍휼히 보듬어주시는, 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부르심을 잘 분별하여서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어두운 시대, 말씀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이 시대에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서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영원토록 평강을 누리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