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부르짖으라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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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시편 1:1-6
“복 있는 사람”
2023. 11. 24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편 1편의 말씀입니다. 이 시편 1편 말씀은 고대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의와 악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는 노래인데요. 150편이나 되는 시편의 가장 첫번째 노래라는 것만으로도 이 시편 1편이 얼마나 중요한 노래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시편 1편은 특별히 농경사회에 근거하여 비유를 하고 있는데,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바람에 날려가는 겨의 비유를 사용해서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질문하는 거예요. 당신은 의인으로 살 것인가, 악인으로 살 것인가?
우리는 마땅히 의인으로 살아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의인으로 살아야 돼요. 그렇다면 과연 시편 1편은 의인에 대해서 또 악인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봐 볼까요?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아멘.
이것이 시편 150편 중에 가장 첫번째 구절입니다.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가장 중요하고, 우리가 가장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구절입니다.
특별히 가장 처음 나오는 단어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인데요. 이 말을 히브리어 그대로 직역하면, “축복 받은 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축복 받은 그 사람.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어요. 특별하게 구별되어서 축복을 받은 사람.
이처럼 시편은 시작부터 사람을 구별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해요. 특별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
그러면서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과연 축복을 받은 사람인가?
바로 뒤에 나오죠.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축복 받은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는데, 축복 받은 사람은 악인들과 구별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죠.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 그러한 자들과 구별된 사람, 아예 상종도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악인들이 너무 많아요. 복 있는 사람은 단어가 단수로 쓰여져 있는 반면에 악인들은 전부 복수로 쓰여 있어요. 복 있는 사람이 한 명이면, 악인들은 몇 배나 더 많다는 겁니다.
그 많은 악인들 틈에서 의로움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온통 악인들 밖에 없는데, 악에 물들지 않기가 어려워요. 악은 쉽게 물이 듭니다. 누가 악한 일을 하라고 시켜서 악을 행하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악을 행하는데 동참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1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처음에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라고 했어요. 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죠. 누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도록 끌고 가는 게 아니에요. 자기 스스로 따라가는 겁니다. 이것이 정말 악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악을 행해요. 악인들의 길을 자기들이 알아서 걸어갑니다.
또 그 뒤에 “죄인들의 길에 서지 하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것 역시도, 사람들이 알아서 길에 서고, 자리에 앉는 것이죠. 그런데 그 악의 행위가 연속성을 갖고 있어요. 처음에는 걸어가요. 그러다가 그 길에 서고, 그 자리에 앉는 겁니다.
처음에는 죄의 길을 따라서 멋모르고 갔지만, 이후에는 그 죄의 길에 스스로 멈추게 되고, 결국에는 그 죄 가운데 눌러앉게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작은 죄 하나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악인들이 넘쳐나는 이유입니다. 악인이 되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눈깜짝할 새에 악인이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큰 악인이 되는 거예요. 반면에 의인은 어떻습니까? 의인은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밑에 2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2절 시작,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아멘.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특별히 구별되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즐거워해야 돼요. 그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해야 합니다.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말했어요. 신명기 6장 5절에 보면, 모세가 이렇게 말씀하죠.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러면서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6절부터 9절까지 말씀에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기 6장 6절부터 9절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아멘.
이것이 모세가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가르치고, 집에 앉았든지 길을 가든지 누워있든지 일어나든지 말씀을 가르치고, 손목에도 말씀에 매고 미간에도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기록해서 부지런히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복을 받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은 말씀 밖에 없어요.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해야 돼요. 여기서 즐거워하다는 말의 본래 뜻은 “소원, 기쁨, 즐거움”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나의 소원으로 삼고, 나의 기쁨으로 삼아야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나 물질의 복을 받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하루에 한 장이라도 말씀을 볼 수 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야로 묵상하는 거예요. 여기서 묵상은 속으로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이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라는 말인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다”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율법을 중얼중얼 하면서 외우거든요. 과거에 학당에서도 천자문 공부할 때 어떻게 했어요?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이렇게 입으로 외우잖아요.
말씀은 이렇게 입으로 읽는 겁니다. 실제로 연구결과를 보면, 입으로 말하면서 읽을 때 더 집중이 잘 된다 그래요. 왜냐면 입으로 말하고 또 그것을 귀로 들으니까 이중각인이 되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말씀을 입으로 읽어야 된다는 법은 없어요. 핵심은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겁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나아가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야로, 아침저녁으로 말씀을 생각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말씀만 본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말씀을 지킬 때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 쉽지가 않죠. 날마다 말씀을 읽고, 또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그러나 그렇게 한 번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복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본래가 어렵습니다. 몸부림을 쳐야 돼요.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악에 물이 들어요.
우리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르고, 말씀 위에 서고, 말씀 속에 앉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본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 있는 사람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요. 어떤 복을 주십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잘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형통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찰라흐”라는 말인데, 이 말은 본래 “전진하다”라는 말이에요. 전진하다, 거침없이 돌진하다. 사람이 앞으로 달려가는데,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요. 평탄한 길을 마음껏 달려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면 사업이 잘 되는 거예요. 공부를 하면 공부가 잘 되는 거예요. 아무런 방해 없이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겁니다. 이것이 찰라흐, 형통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그 형통을 마치 무엇과 같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형통케 하신다고 말씀하셔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
여러분,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어떻습니까? 풍성하게 잘 자라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파릇파릇해요. 그런데 우리가 이 나무를 우리나라의 나무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나무는 이스라엘에 있는 나무예요. 이스라엘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비가 많이 오지 않습니다. 건조한 땅이에요. 그래서 광야도 많고 사막도 많아요.
우리나라처럼 산에 나무가 빽빽하지도 않고 숲이 울창하지도 않아요. 민둥산이 많고, 나무도 키가 잘잘합니다. 나무가 사람 키만해요. 물이 부족하니까 나무가 크기가 작아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도 정말로 키도 크고 잎도 파릇파릇한 튼실한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가 크게 자랄 만한 환경이 아닌데도 희한하게 잘 자라는 나무들이 있어요. 그런 나무들은 왜 그렇게 잘 자랄까요? 당연히 뭔가 이유가 있겠죠. 햇빛이 잘 든다든지, 땅의 토질이 좋다든지,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물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그 근처에 물이 많이 있으면 나무가 잘 자라는 거예요. 이것은 당연한 이치죠. 물이 없으면 안 자라고, 물이 있으면 잘 자라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물이 없는 게 아닙니다. 부족할 뿐이지 물이 있어요. 그 물 옆에 있으면 나무가 잘 자랍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말하는 나무가 바로 그런 나뭅니다. 물 옆에 심어졌어요. 성경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말하는데요. 여기서 시내가 히브리어로 “팔르게 마임” 이라는 말인데요. 이것은 사람이 만든 인공수로를 가리킵니다. 수로가 두 종류가 있죠. 자연수로, 인공수로. 시편에서 말하는 시내는 인공수롭니다.
자연수로인 경우에는 비가 올 때는 물이 있지만, 비가 안 올 때는 말라버려요. 그래서 1년 중에 대부분은 말라 있습니다. 하지만 인공수로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 사람이 관리를 하기 때문에 항상 물이 흐릅니다.
바로 이 인공수로에 심어진 나무가 키가 크고 울창한 나무가 되는 거예요. 1년 365일, 물이 마르지 시냇가에 심겨져서 가뭄에도 어려움 없이, 철에 따라 열매를 맺고, 잎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무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겠습니까? 정말 최고의 행복이고, 최고의 성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나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심은 나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무가 물을 먹고 자라듯이, 우리는 말씀을 먹고 자라야 돼요. 1년 365일, 말씀 앞에서 말씀을 공급받아 살아야 우리의 영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라지 않고 잘잘한 젖먹이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두고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14절인데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이 미성숙한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성장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디까지 성장해야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인격, 성품, 언행, 생활 그 모든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돼요.
그런데 그것이 오직 무엇을 통해서 가능해요? 오직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죠.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낼 때에,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국동제일교회가 날마다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앞에 심어진 교회가 되어서 철을 따라 전도의 열매를 맺고, 그 예배의 소리가 마르지 않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의 연수를 다 끝마치는 그 날에 하나님께 인정 받고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