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 많은 사람의 기쁨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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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1:13-23
“나의 기쁨, 많은 사람의 기쁨”
2023. 5. 3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나의 기쁨, 많은 사람의 기쁨”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민족을 대표해서 성전에 들어가 기도할 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 기도에 대하여 응답을 주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설명을 드렸지만, 사가랴는 제사장으로서 평생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천 명의 제사장 중에 딱 두 명을 뽑는 제비뽑기에서 당첨이 된 거예요. 경쟁률로 따지면 500대 1이죠.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민족을 대표해서 혼자 성전에 들어가 일주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분향을 합니다. 이때 성전 밖에서는 백성들이 분향시간에 맞춰서 기도를 해요. 같은 시간에 합심기도를 하는 겁니다.
이 때 같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했겠죠. 뭘 놓고 기도했을까요? 이때 당시에 기도제목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메시야가 속히 오시는 것. 오직 이것만 놓고 기도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장 5절에 보면, “유대 왕 헤롯 때에”라고 이 시대배경을 말하거든요. 유대 왕 헤롯 때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일제시대 같은 시댑니다. 나라의 주권도 뺏기고, 군인들이 나라를 점령하고, 말을 안 들으면 죽이고. 더군다나 에돔 혈통을 가진 헤롯이 로마에 돈을 주고 유대 왕이 됐어요.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 이방 땅 에돔 혈통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어가지고, 온갖 횡포를 부리는 겁니다.
이런 시대이다 보니까 백성들이 당연히 메시야를 갈망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사장이 기도하고, 성전 밖에서는 백성들이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모두가 열심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천사가 사가랴를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 위에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주의 사자가 갑자기 사가랴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분향하는 향단 우편에 서있는 것이 갑자기 보였어요. 헬라어 원문을 보면, 주의 사자가 서있는 것이 보여졌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사자가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게 아니라,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향단 우편에 가만히 서있다가 때가 되어서 사가랴의 눈이 밝아져 사가랴에게 보여진 겁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주의 사자가 스스로 나타났다기보다는, 사가랴가 영안이 열려서 봤다는 것이 정확합니다.
분명히 성전 안에 자기 말고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사가랴의 눈에 누가 서있는게 보였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래서 밑에 1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사가랴가 얼마나 놀랐는지, 놀라며 또 무서워했습니다. 여기서 “놀라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라쏘” 라는 말인데, 본래 의미가 “요동하다” 라는 말이에요. 얼마나 놀랐는지 마음이 요동한 거죠. 또 무서워하다는 말은 “포보스” 라는 말로서, “두려움, 경외” 이런 말이에요.
이 두 단어를 붙여서 사가랴의 놀란 심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마태복음에서도 같이 사용된 적이 있는데요. 보통 이 두 단어가 같이 사용되는 경우가 흔치 않거든요.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같이 사용됩니다. 마태복음 14장 26절을 봐 볼까요? 마태복음 14장 2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자, 여기 보니까 누가 놀라고 무서워하였습니까? 제자들이죠. 캄캄한 새벽에 누가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했어요. 그런데 이 제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직접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이었어요. 이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각 고을로 파송해서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도록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제자들이 나름대로 잘 훈련 받고, 또 나름대로 귀신 쫓는 사역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령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쫓아버려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놀라서 마음이 요동하고 두려움에 빠져서 소리를 지를 정도로, 그 정도로 놀랐다는 겁니다. 이해가 안 되죠.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사실 비난을 받을 일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상식을 벗어난 일을 보면 놀라고 무서워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담대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도 때로는 두려움에 떨 수 있습니다. 사람인 이상 그럴 수 있죠.
그러나 건강한 믿음의 사람은 잠시 잠깐 두려워하더라도 금방 그것을 떨치고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데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책망하신 게 아니라, 그 뒤에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과 31절을 보면, 그것이 잘 드러나 있어요. 마태복음 13장 30절, 31절을 봐 볼까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가 물 위에 떠있는 사람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패기 있게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을 보고 무서워졌어요. 의심이 든 거죠. 바로 눈앞에 예수님이 있는데도 의심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와 함께하는데도 왜 의심하느냐? 네가 이렇게 믿음이 작으냐? 책망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충분히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사소한 걱정과 염려 때문에 의심을 하고, 영적으로 침체하고 가라앉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가랴의 상황이 이와 똑같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주의 사자가 보이는 것 때문에 놀라고 무서워할 수는 있어요.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는 마치 베드로처럼 의심했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았으면서도 믿지 않고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먼저 봐 볼까요? 20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사가랴가 사자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겁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안 믿었을까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죠. 사자가 한 말이 자기가 기대하고 기도한 기도제목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믿지 않은 겁니다.
사가랴는 메시야가 속히 오실 것을 놓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사자가 전혀 엉뚱한 말을 지금 하고 있으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봐 볼까요? 도대체 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라. 일주일 동안 성전에서 간절히 기도한 것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거예요.
이것만 놓고 보면, 마치 사가랴가 아들을 놓고 기도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아들을 놓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메시야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하는 말만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아요. 만약에 밖에 있는 백성들이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민족을 대표해서 성전에서 기도해야 할 제사장이 민족이 아니라 자기 개인기도를 했다는 것을 알면 난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절대로 사가랴가 아들을 놓고 기도했을 리가 없어요. 사가랴의 반응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까 20절 말씀처럼, 사가랴가 믿지를 않잖아요. 자기가 원했던 기도응답이었다면 기뻐해야 정상인데, 오히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전혀 믿지를 않거든요.
지금 이 어둡고 혼란한 ‘유대 왕 헤롯 때’를 종식하고 새로운 다윗 왕국을 재건할 메시야가 오신다는 응답이 아니고, 내가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웬말인가? 사가랴가 분명히 13절에서 천사가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까지만 말했을 때는 굉장히 기대를 했을 겁니다. 아, 하나님이 내 간구함을 들으시고 메시야를 주시려나?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말이 너무나 황당한 겁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황당하죠. 그런데요. 이 뒤에 하는 말이 더 가관입니다. 14절을 봐 볼까요? 오늘 제목이 여기 들어있는데요. 1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천사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죠. 모든 백성들의 기대를 꺾어 버리는 응답이 왔는데, 그것을 많은 사람이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아니고 그냥 늙은 제사장이 아들 하나 낳는 것을 백성들이 기뻐한다는 거예요. 이해가 되지 않죠. 이걸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사가랴의 아내나 기뻐하고, 사가랴 집안 식구들이나 기뻐하지, 상관도 없는 일에 뭐가 좋다고 기뻐하겠습니까?
이것이 상식적인 생각 아니겠어요? 그러나 천사가 분명히 말했죠. “너도 기뻐하고 많은 사람도 기뻐하리라.” 천사가 할 일이 없어서 사가랴한테 농담하러 왔겠습니까? 분명하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한 겁니다.
다만 사가랴가 이 기도응답을 1차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믿지 않은 것이죠. 사가랴는 메시야를 구하면 당연히 메시야가 올 것으로 믿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보다 고차원적이었습니다. 사가랴도 기뻐하고 많은 사람도 함께 기뻐하는 한 아들의 출생이라는 응답을 주셨어요.
왜 메시야를 보내지 않고 아들을 주셨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사가랴의 기도에 응답하셨어요. 비록 메시야를 바로 보내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할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메시야는 그냥 어느날 갑자기 뿅 하고 오시지 않아요. 반드시 그보다 먼저 와서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말라기서에서 예언하고 있는데요. 말라기 3장 1절을 한번 봐 볼까요? 말라기 3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하시기 전에 먼저 사자를 보내서 길을 준비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와서 길을 준비하는 사자. 이것을 보다 정확하게 말라기 4장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4장 5절과 6절도 한번 봐 보겠습니다. 말라기 4장 5절,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아멘.
여러분, 먼저 오는 사자가 누굽니까? 선지자 엘리야죠. 엘리야는 구약에서 죽지 않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잡니다. 그 선지자가 이 땅에 다시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데, 어떻게 준비하는가 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일을 일을 합니다. 이것은 무너진 가정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작업임과 동시에 불신과 분열로 쪼개진 민족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혼란한 사회, 정치 상황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갈등하고, 이웃과 이웃이 불신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로마와 결탁하고 있는데, 아들은 열심당원이 되어서 로마에 항쟁을 합니다. 가정이 분열됐어요. 우리나라로 치면, 아버지는 친일판데, 아들은 독립군에 들어가서 일제와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로 이념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어요.
또 이웃끼리도 서로를 불신하고 비난을 합니다. 세리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두려고 속이고, 바리새인들은 남을 정죄하는데 바쁘고, 서로 하나가 되도 모자랄 판에 완전히 분열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바로 이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엘리야가 오는 겁니다. 서로 쪼개져 있는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한데 모은 마음을 뒤에 오실 주님께로 집중하도록 하는 거예요.
비록 지금 모든 백성들이 분향하는 때가 되면 다같이 메시야를 갈망하며 기도하지만, 그 때뿐이고, 분향하는 시간이 끝나면 다시 뿔뿔이 흩어져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어요.
이것을 누군가가 깨트려야 합니다. 이념을 깨고, 자존심을 깨고, 이기주의를 깨고, 내 뒤에 이제 곧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을 선포할 선지자가 필요해요. 그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니까, 그 엘리야가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사가랴의 아들이 바로 그 엘리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을 우리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 시작,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아멘.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 앞에 먼저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요한이 엘리야의 환생이 아니라는 거예요.
17절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 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를 할 수가 있는데요. 이 말은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과 능력”이라고 해석을 해야 됩니다. 과거 엘리야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영과 능력이 이제는 요한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요한과 엘리야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엘리야의 사명을 계승하였다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해야 할 일을 요한이라고 하는 새로운 선지자가 수행하는 겁니다.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가 이 땅에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예언이 성취되면, 뒤이어서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예언도 성취되겠죠. 바로 이것을 천사가 사가랴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가랴 너의 기도가 정확하게 응답되었다.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그 길을 준비할 선지자가 바로 너의 아들이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가랴가 이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하는 말을 다 들어놓고도, 의심하는 거예요. 충분히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베드로처럼 의심하고 있어요.
왜 의심할까요? 여러분, 사가랴가 천사를 직접 대면하고 응답을 들었지 않습니까? 조목조목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들었어요. 그런데도 왜 의심을 할까요?
그 이유가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아들을 낳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이 그 이윱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이 응답을 받았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너무 늦었다. 나나 아내나 아들을 낳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18절에 기록된 말씀이에요. 누가복음 1장 18절을 보니까,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구십구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신 말씀 앞에서 웃으면서 “나같이 늙은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하고 믿지 않았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기껏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도 믿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 아들이 선지자가 될 것인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비추어 보니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들도 아니고, 그저 속히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시는 것인데,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이루어 가시는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는 기도의 응답을 1차원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구하는 대로 얻고, 찾는 대로 찾고, 두드리는 그대로 열리는 것으로 이해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구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그 이상으로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에게 그가 구하는 것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주셨어요. 자녀가 없는 그에게 아들이라는 선물을 주시고, 그 아들이 바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가 되리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오늘 제목처럼, 사가랴 너도 기뻐하고 동시에 많은 사람도 다함께 기뻐할 수 있는 정확한 응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응답을 받고도 기뻐하지 못하고 의심 속에서 밑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다시 보면, 믿지 않는 사가랴에게 천사가 이렇게 말을 하죠.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믿지 못한 결과 사가랴는 벙어리가 됐습니다. 그 입으로 의심을 말하고 불평을 말하지 못하도록 아예 입을 봉해버리셨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미 응답을 받아놓고도 계속해서 같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할까봐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는 방편일 수도 있을 겁니다.
무엇이 됐든지 간에, 본질은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벙어리가 됐어요. 그리고 그가 벙어리로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미 받은 그 응답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사가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기도하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때에 사실은 우리들도 영적인 벙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 입을 막아서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의 입을 막는 겁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기도하지 않고. 찬양할 수 있는데, 찬양하지 않고. 남을 위로할 수 있는데, 위로하지 않는... 자기 스스로 벙어리가 되어서 그 입을 열지 않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응답이 믿어지지 않고, 자꾸만 의심이 들어서, 내 영이 침체되고 기도도 찬양도 나오지 않는 그 때에 우리는 더욱 입을 열어야 합니다. 더 기도하고, 더 찬양하고, 더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에게 그 가정의 문제와 그 민족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고 안 받고는 사가랴에게 달렸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우리가 가진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응답을 주십니다.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 응답이 너무 늦을 수도 있고, 너무 기대와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반드시 그 이루어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할 때부터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응답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시고, 또한 그 응답을 받을 때에도, 이것이 나에게 주시는 응답이라 믿고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응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우리가 가진 기도의 제목들이 하나하나 응답됨으로 말미암아 내가 기뻐하고, 내 가정이 기뻐하고, 내 교회가 다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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