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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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골로새서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삶”
2023. 3. 1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삶”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인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였어요. 바울은 아마도 골로새교회에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골로새서를 기록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바브라가 로마 감옥으로 바울을 찾아왔어요. 그리고 골로새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알려주면서 그 해결방안을 요청했어요. 그래서 바울이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골로새서인 것이죠.
따라서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직접 가본 적이 없어요. 다만 에바브라를 통해서 귀로 듣기만 했습니다. 실제로 골로새서 2장 1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골로새교인들은 바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만난 적이 없다 할지라도, 바울은 선포하고 있어요. ‘내가 너희를 위해 힘쓰고 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힘쓰고 있습니다. 무엇을 힘쓰고 있을까요? 골로새서 1장 3절에 보면, 바울은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바울은 감옥에서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빨리 석방되는 것을 기도하기보다, 이역만리 떨어진, 얼굴도 본 적이 없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그들의 문제가 속히 해결되어서 굳건한 믿음의 교회로 바로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바울과 골로새교회는 별 관계가 없어요. 바울이 개척한 교회도 아니고, 그 교회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바울의 사역에 후원을 해준 것도 아니에요. 그저 동역자가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교회로 여기지 않고, 한 복음을 믿고, 한 믿음을 가진 나의 형제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나와 상관 없는 것 같지만, 같은 복음을 믿는 우리의 믿음의 형제들, 이 나라, 이 한국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따로 떨어져서 각개전투하는 신앙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합력하는 신앙으로, 발맞추어 승리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와 함께 신앙의 길을 헤쳐나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4장 3절에 보면,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기도를 받아요. 기도로 서로 돕는 겁니다. 이처럼 교회는 서로간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지, 얼굴을 알든지 모르든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서, 기도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신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몰라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에요.
복음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죠. 같이 불러볼까요?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우리가 외롭고 힘들어서 우리의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아픔과 기쁨을 나누며 힘과 위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며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 아픔을 함께 이겨내는 사랑이 가득한 광주서광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랑으로 연합된 골로새교회를 위해서 기도에 힘쓰며 붓을 들어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에는 교회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할 방안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골로새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율법주의도 있었고, 혼합주의적인 이단 사상의 문제도 있었어요. 또 천사를 숭배하는 문제와 헬라 철학사상에 물이 드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여러 크고 작은 문제들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참된 성도가 되는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골로새서 안에 그 길이 곳곳에 제시되어 있는데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그 길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삶을 살아라!” 아멘이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문제들, 교회가 가진 문제들, 그것들을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답은 오직 말씀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해답이에요. 말씀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살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이 기도했던 것이 그것이었어요. 말씀으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봐 볼까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율법주의나 헬라 철학사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를 내어맡기고,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살아야 돼요. 특별히 지금 말씀에 보면, ‘거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 말의 헬라어는 ‘에노이케이토’ 라는 말입니다. 에노이케이토, 이 말은 ‘어디어디에 살다’ 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에노이케이토가 어떤 단어에서 파생된 말인가 하면, ‘오이코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오이코스, 오이코스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집. 사람이 보통 어디에 살아요? 집에 살죠. 잠시 잠깐 여행을 갈 수는 있지만, 결국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요. 사람은 집에 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말씀이 사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한 3박 4일 머물다가 떠나게 두는 것이 아니라, 평생 살라고 내어줘야 돼요. 집문서를 말씀에 넘겨줘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안에 평생 머물러 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거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말씀이 거하면 우리는 낙심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충만하면 감사가 흘러 넘칩니다. 말씀이 충만하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에요. 어떤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내용들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우리는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지혜는 말씀에서 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와 지식, 그 모든 것은 오직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우리는 그 분이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서로를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서로를 가르칠 때는 오직 말씀으로 인한 지혜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이나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훈계해야 합니다. 골로새교회는 지금 거짓 가르침이 많아요. 그래서 골로새서 2장 8절에 바울이 이렇게 경고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교회 안에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이러한 거짓 가르침들이 많아서 교회가 병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게 아니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서로 잘 가르치려고 해도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어요. 앞 못 보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꼴이에요.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 말씀으로 바로잡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거짓 가르침을 물리치고, 건강한 교회로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말씀으로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길이고, 우리의 가정이 믿음의 가정으로 든든히 세워지는 길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우리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이 세 가지는 사실 정확히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시가 곧 찬송이고 찬송이 곧 신령한 노래예요. 이것들의 본질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굳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구분해서 말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각각 다른 노래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노래를 총망라하기 위해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이 세 가지의 이름을 다같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모든 형태의 노래와 시와 곡조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함 가운데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악에 취해서, 어떤 분위기나 감정에 취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충만한 가운데 불러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음악에는 자체적으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고,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즐겁게도 합니다. 이것이 음악의 힘이에요.
그러나 말씀에는 그보다 더 큰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고, 우리의 마음을 찔러 참된 회개의 눈물이 흐르게 하고, 한량없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하면,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서 우리 입술로 노래를 하게 만듭니다. 다윗이 목숨이 위험한 고난 중에나 평강 중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시와 찬미를 드렸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 안에 말씀이 충만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가 찬양하게 됩니다. 기쁨의 찬양을 드리게 하고, 참회의 찬양을 드리게 하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찬양을 드릴 때에 바울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 생명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감사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 감사했던 이유도 그것이죠.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주심에 감사하고, 또 거두어 가신다 할지라도, 그 역시도 감사입니다. 그동안에 우리가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심에 감사.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러한 고백들이 많아요. 특별히 시편 147편에 잘 노래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시편 147편 7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아멘.
이 찬양의 고백처럼, 우리가 항상 감사로 하나님께 찬양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와 같은 여러 유익들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유익이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인데요. 17절 말씀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아멘.
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함에 있어서 명령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또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명령임과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유익이요 권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이 예배가 성도에게 있어서 의무입니까 권리입니까? 성도가 마땅히 드려야 하는 의무임과 동시에 성도들이 누리는 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 역시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의무임과 동시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의무를 지키면서 동시에 그 권리를 누려야 돼요.
주 예수의 이름, 그 이름은 단순히 호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적 관점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권위와 능력을 동시에 드러내는 말이에요. 이름은 곧 그 사람의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권위와 능력과 그의 모든 말씀, 그 분의 전 존재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와 함께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을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스스로 조심하고 삼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의무인 것이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우리는 주의 영광을 가리거나 교회의 덕이 실추되는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제해야 돼요.
말이라도 다 같은 말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말하셨을까, 주님의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겸손하게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며, 교회의 덕이 되는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겸손하면서 한편으로는 담대해야 돼요. 예수의 이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에 힘입어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10절에, 바울이 말씀합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리스도는 세상의 통치자와 모든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통치자 위의 통치자, 권세 위의 권세.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권세 위에 계셔요. 그 위대하신 이름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권리로 주셨어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주셨습니다. 권세 위에 권세, 그를 힘입어 말하고 행하라고 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할 수 있어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이름을 가진 자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항상 겸손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움과 동시에, 그 이름의 권세로서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서 기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를 병들게 하는 율법주의와 이단사상과 헬라 철학과 같은 거짓 가르침을 타파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하여지기를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하면, 그때 우리는 그 안에서 주어지는 지혜를 통하여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하고, 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그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능력의 이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 곧 그 이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 나아가는 그 삶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에서 오는 지혜와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항상 감사가 흘러넘치며,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힘입어 이 땅 가운데 담대하게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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