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난처

요나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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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요나 1:17
“나의 피난처”
2024. 2. 2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나의 피난처”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저희가 계속해서 요나서를 보고 있는데요.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치던 요나가 이제 마침내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을 때 요나가 뽑혔고, 그로 인해서 요나가 이 풍랑이 자기 때문에 온 것이라는 사실을 실토했죠. 그러면서 자기를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잠잠해질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선원들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바다에 던질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노를 저어서 헤쳐가 보려고 했어요. 성경에는 그들이 “힘써 노를 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에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됩니다.
요나가 던져지는 장면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요나를 바다에 던진 것은 선원들이었지만, 던져지도록 만든 것은 요나죠. 요나 때문에 풍랑이 왔잖아요. 그리고 자기 입으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했어요. 선원들이 요나를 던졌지만, 사실상 요나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진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요나의 자살시도라고 봐야 됩니다.
요나는 이 풍랑이 자기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았고, 또 이 풍랑을 무사히 지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또다른 풍랑과 시련이 오리라는 것 역시도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놓아버린 겁니다. 내가 죽어야만 끝이 나겠구나, 하고 자기 목숨을 던져버린 거예요. 자기 인생을 포기한 것이죠.
하지만 요나는 자기 인생을 포기했어도,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바다 위로 풍랑을 던져서 요나를 쫓아오신 하나님이 이제는 바닷속까지 쫓아오셔요.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그 물고기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바닷속으로 숨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피할 수 없어요. 큰 물고기가 이미 그곳에서 요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저 깊은 바닷속에 큰 물고기를 이미 예비하셨어요. 특별히 여기서 예비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마나” 라고 하는 말인데요. 마나는 본래 “명령하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뜻에 맞게 번역을 한다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이렇게 번역을 할 수 있겠죠.
하나님께서 요나를 삼키라고 물고기에게 명령하셨어요. 그냥 그 자리에 준비시켜놓고 알아서 삼키도록 놔두신 게 아닙니다. 깊은 바닷속에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깊이 가라앉은 그 때에 요나를 삼키도록 모든 것을 명령하시고 통제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고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에요. 바람을 일으키시고 배가 깨지도록 몰아간 것 역시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놓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세계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통제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결코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셔요. 비록 하나님이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시고 모든 상황을 급박하게 몰아가셨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사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데 있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목적은 이 풍랑으로 말미암아 요나가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 이 모든 상황을 조성하신 겁니다.
만약에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기 전에 회개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또는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회개했더라면, 아니 그 전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하셨던 바로 그 때 도망치지 않고 순종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랬더라면 이렇게 하나님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요나도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죠. 순종했으면 됐을 일을 불순종하는 바람에 이런 사단이 난 겁니다.
바람도 물고기도 다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데, 선지자만 불순종해요. 이 선지자 하나 때문에 모두가 고생입니다. 배도 고생이고, 선원들도 고생이고, 물고기도 고생이죠. 멀쩡한 배가 파손이 되고, 선원들은 갖고 있던 짐을 다 잃어버리고, 물고기는 3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요나를 뱃속에 품고 있어야 되잖아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할 사람이 모두를 고생시키고 있다는 것이 참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한심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은 물고기를 명령하셔서 밤낮 삼 일 동안 뱃속에 있게 하십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장면에서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삼 일 동안 들어가 있는게 가능하냐는 문제로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면서 또 그 물고기가 고래냐 아니면 상어냐, 물고기 종류에 대해서도 논쟁을 해요.
그런데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기적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해 보려고 하면 할 수록 미궁에 빠져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살피시면 삼일이 아니라 삼십일이라도 물고기 뱃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또 고래면 어떻고 상어면 어때요?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갈치라도 사람을 삼킬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더글라스 스튜아트” 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본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적은 인간이 모방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넘어서는 신적인 행동이다.”
기적은 인간이 모방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과학적으로 검증하려고 해봐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돼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가능이 어딨습니까? 성경에 말씀하잖아요.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이것은 실제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서, 실제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 일 동안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과학과 논리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있는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겁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아멘.
아무리 불가능한 일도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안 될 일도 하나님께서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기만 하면 불치병이 치유되고, 망한 사업이 일어나고, 돌머리가 금머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요나서의 내용도 하나님이 다 되게 하신 사건들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삼 일이라는 시간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히브리인들에게 삼 일은 사람이 완전히 죽어서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시간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3일에 걸쳐서 스올까지 내려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스올까지 가다가 갑자기 돌아와서 육신으로 들어가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삼 일이 중요해요. 만약에 삼 일이 다 지나버리면, 더이상 그 사람은 살아날 가망이 없어요. 왜냐하면 영혼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삼일이 지나면 영혼이 스올로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더는 살아날 수 없는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겁니다.
욥기 7장에 보면 욥이 스올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욥기 7장 9절, 10절에 이렇게 말을 합니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스올로 한번 내려간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내려가면 그걸로 끝. 완전히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 일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 완전한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3일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밑에 2장 2절에 보면, 요나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요.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바다로 던져진 요나는 스올의 뱃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스올의 배가 무엇인지 의견이 다양한데, 스올의 배가 바다 밑바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고, 물고기 뱃속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지금 요나가 자신이 스올에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올, 한번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그곳에 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자신이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올에 있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가겠어요? 돌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요나가 비록 빠져나오지 못할 스올의 어둠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습니까? 큰 물고기를 보내셨잖아요.
바다 깊은 곳에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셨어요.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스올의 뱃속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곳은 결코 요나가 죽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물고기를 명령하여 마련하신 피난처였어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곳이 사실은 하나님의 피난처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날 피난처를 예비하십니다. 요나에게 큰 물고기를 보내서 살리신 것처럼, 인생의 위기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살 길을 주십니다.
사무엘상 23장에도 그런 장면이 나와요. 다윗이 사울의 군대에 쫓기다가 에워싸여서 잡힐 위기에 처했을 때, 때마침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사울이 물러가는 장면이 있는데요. 사무엘상 23장 27절, 28절을 봐 볼까요? 사무엘상 23장 27절, 28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아멘.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다윗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꼼짝없이 잡혔다고 생각한 바로 그 때, 어떻게 바로 그 타이밍에 블레셋이 쳐들어왔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예비하신 겁니다. 그들은 몰랐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쳐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놓으셨기 때문에 타이밍 좋게 쳐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서 다윗이 살게 된 겁니다.
특별히 다윗이 살아난 그 장소를 “셀라하마느곳”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요. 셀라하마느곳은 “피신하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본래는 그곳이 다윗이 죽는 바위가 될 뻔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곳을 죽는 바위가 아니라 사는 바위, 피신하는 바위로 바꾸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죽는 곳에서도 사는 길이 열리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뿐만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건짐을 받았습니까?
요셉, 다니엘, 예레미야, 바울, 수많은 선배들이 증명했어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그 사람을 건져주신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마찬가지로 요나도 그렇게 건져주신 겁니다.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은 요나를 물고기를 통해 건져주셨어요. 비록 그곳에서 빛 한 점 보지 못하고 삼 일 밤낮을 머물면서 죽은 자나 다름 없이 되어버렸지만, 그러나 그곳은 죽는 장소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는 장소였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왜 요나를 그 즉시 육지로 보내지 않고 삼 일 동안이나 붙잡아 놓았느냐고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삼 일이 아니라 삼 초만에라도 육지로 올려보내실 수가 있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요나에게 삼 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요나에게는 완전한 죽음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내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그 시간과 공간, 그 모든 상황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위기에 몰려도 다른 길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죠. 모든 길이 끊어지고 막혔을 때에야 세상의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렇잖아요. 배 밑창에서 자고 있을 때, 선장이 와서 잠을 깨우면서 네가 믿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지만 요나가 구하지 않았죠. 그런데 모든 살 길이 끊어진 스올의 뱃속에서 이제 어떻게 합니까? 아까 2장 2절 말씀에 본 것처럼, 요나가 부르짖잖아요.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풍랑 속에서도 부르짖지 않던 요나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습니다. 살 길이 있고 믿는 구석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외면하다가 완전히 길이 끊어지게 되니까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항상 시선이 엉뚱한 데 가 있어요. 나름대로 자신의 방법으로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는 길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어렵고 힘이 들 때, 괴로워서 낙심이 될 때,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고, 원수들만 주변에 가득할 때, 주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우리에게 살 길을 내어주시고, 예비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모든 것을 역전시키시고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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