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중심, 기도중심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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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1:5-13
“성전중심, 기도중심”
2023. 4. 12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성전중심, 기도중심”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도입부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서 쓴 서론이었다면, 5절부터가 진정한 본론의 시작입니다.
누가는 서론에서 이 글이 “근원부터” 쓴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근원부터, 말 그대로 모든 사건의 시작부터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가복음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는 장면부터 기록했다면,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보다 훨씬 이전 사건에서부터 기록을 하고 있어요. 그야말로 근원부터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볼 수가 있는데요. 우리가 차근차근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먼저, 누가는 시간적인 배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이 때에 있었던 사건에서부터 누가복음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때가 굉장히 중요해요. 유대 왕 헤롯 때. 이 때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어둡고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어두운 시대가 있었죠. 언젭니까? 일제 시대죠. 일제 시대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 시대의 어두운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어요.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수치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고, 위안부로 끌려가는 그런 아픔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시대적인 어두운 분위기를 ‘일제 시대’라는 말만으로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 왕 헤롯 때’가 바로 그런 시대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알려면, 우선 헤롯이 누구지를 알아야겠죠. 여기서 말하는 헤롯은 ‘헤롯 대왕’을 말합니다. 헤롯 대왕은 주전 37년부터 주후 4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헤롯이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다윗의 혈통만이 될 수 있는데, 헤롯은 다윗의 혈통이 아니에요. 헤롯은 에돔 혈통입니다. 이방 족속 혈통이죠. 다윗의 혈통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정통 이스라엘 혈통도 아니에요.
도대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유대 왕이 됐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로마에 돈을 주고 통치권을 산 겁니다. 이때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이때 헤롯이 로마의 실권자들에게 로비를 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권리를 받은 거예요.
우리나라에 친일파가 있는 것처럼, 헤롯은 친로마파였습니다. 헤롯의 아버지 때부터 아주 로마에 충성을 다했어요. 그래서 로마가 그 정성이 갸륵해서 헤롯을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인정을 해준 겁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법적인 왕이죠. 다윗의 혈통도 아니고, 정통 이스라엘 혈통도 아닌 것이 로마에 빌붙어서 매국노 짓을 하더니, 어느날 유대 왕이 된 겁니다.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헤롯이 나라를 잘 다스렸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헤롯은 굉장히 권력욕이 강해서, 조금만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버리는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도 죽이고, 아내도 죽이고, 장모도 죽이고, 삼촌도 죽였어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족이고 뭐고 없이 죽여버리는 잔인무도한 인간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죠.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고 하니까, 두 살 이하로 모든 아기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자기 권력을 지키려고 그 어린 아기들을 다 죽여요. 어떻게 그런 짓을 인간이 할 수가 있습니까?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잔인하고 포악한 인간이 바로 헤롯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인간이 다스리던 때에 누가복음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유대 왕 헤롯 때’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 아시겠죠? 불법적으로 세워진 왕이 자기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잔인한 짓도 저지르는 포악하고 어두운 시대가 바로 ‘유대 왕 헤롯 때’였어요. 그 때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아픔의 시대이고, 너무나도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다 보니까, 당연히 메시야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이 땅에 오셔서,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고, 로마의 모든 압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진정한 왕. 그 분이 속히 오시기를 갈망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분이 오시기 전에, 그 분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배경이 됩니다.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택함 받은 세례 요한이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는가?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다시 보면, 세례 요한의 부모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5절을 다시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자,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누굽니까? 사가랴. 사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사가랴는 제사장이었는데, 어느 반열에 속하는가 하면,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 엘리사벳은 “하나님은 나의 약속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약속이시다. 두 사람이 이름이 굉장히 좋아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약속이시다.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까, 여호와께서 나의 약속이신 것을 기억하신다, 라는 말이 되겠죠. 여호와께서 약속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믿음이 두 사람의 이름에 들어있는 겁니다.
자, 이 정보들을 토대로 볼 때, 우리는 이 두 사람이 굉장히 신실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신앙적으로 엄청난 명문가 출신이죠. 남편은 제사장이고,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에요. 둘 다 제사장 가문 출신입니다. 그리고 이름도 굉장히 좋아요.
이 두 사람을 오늘 본문 6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6절에 보니까,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사가랴와 엘리사벳 두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겁니다. 두 사람이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 것이 참으로 의로운 일이었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그들의 신앙이 참으로 신실하고 정직했다는 것이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가문도 대단한 믿음의 가문이고, 또 개인적으로 놓고 봐도, 흠이 없는 신앙의 사람들이었다고 누가가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인데, 밑에 7절을 보게 되면,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이 추가됩니다. 7절을 보니까,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은데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렇게 훌륭한 부모 밑에 자식이 많이 태어나야 그 훌륭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갈 텐데, 자식이 없어요. 여기서 나이가 많더라, 라는 말을 영어 성경으로는 ‘very old’ 라고 표현합니다. 굉장히 늙었다는 말이죠. 나이가 적당히 많은 게 아니라, 임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늙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베리 올드.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식이 없음에도 두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흠이 없이 주의 모든 규례와 계명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이 먹을 동안에 얼마나 간절하게 자식을 놓고 기도했겠어요? 그런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이만큼 대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사람들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는 겁니다.
자, 이제 이 사람들에게 인생의 반전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먼저 8절을 보면,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게 되는데, 바로 이 때 반전이 일어나요. 8절을 봐 볼까요?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사가랴가 아까 무슨 반열이라고 했죠? 아비야 반열. 이스라엘에는 반열이 스물네개 반열이 있습니다. 이 스물네개 반열이 1년마다 한 반열씩 돌아가면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해요. 작년에 1반열이 했으면, 올해는 2반열, 내년에는 3반열. 이런 식으로 매년마다 한 반열씩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합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 직무를 1년에 딱 두 명만 할 수가 있습니다. 1년에 딱 두 번만 제사장 직무를 행하면 되는데, 각각 한 명씩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1년에 두 명밖에 못해요.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이 직무를 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제사장이 다 이 일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모두가 다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제비뽑기로 2명을 뽑거든요.
아까 사가랴가 아비야 반열이라고 했죠? 아비야는 8번째 반열입니다. 만약에 올해가 아비야 반열이 직무를 행하는 차례라고 한다면, 올해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들 중에서만 제비를 뽑겠죠. 자, 그렇다면, 아비야 반열에 소속된 제사장이 몇 명이었을까요? 이 중에 두 명을 뽑는데, 과연 경쟁률이 얼마나 될까?
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때 당시에 한 반열당, 제사장이 약 천 명 정도 됩니다. 천 명. 전체 다 합쳐서 천 명이 아니고, 한 반열당 천 명. 그러면 스물네 반열이니까, 다 하면 몇 명입니까? 2만 4천 명. 엄청나게 많죠.
그런데 아마도 2만 4천명 까지는 아니고, 대략 2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엄청나게 많죠. 한 반열당 최소 900명에서 많게는 천 명이나 되는 제사장이 있어요. 이 중에서 두 명을 뽑는 겁니다. 천 명 중에 두 명. 그러니까 500 대 1이죠. 경쟁률이. 500명 중에 한 명이 제사장 직무를 행할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올해 내가 제비뽑기를 탈락을 한다고 하면, 다음번에 다시 제비뽑기를 하려면 몇 년이 지나야 돼요? 24년이 지나야만 다시 제비뽑기를 할 수가 있어요. 다음에 우리 반열 차례가 돌아오려면 24년이 지나야 돼요. 그런데 그때도 못 뽑으면? 또 24년을 기다려야죠.
그래서 이 제사장 직무는 평생에 한 번 할 수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극히 소수의 제사장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제사장들은 한 번도 못해보고 죽는 거예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사가랴가 제비뽑기에 당첨이 됩니다.
자, 9절말씀을 봐 볼까요?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사가랴가 제비를 뽑아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5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거예요. 여러분, 작년 서울대 의대 입학 경쟁률이 얼만지 아십니까? 3.2 대 1입니다. 3.2 대 1. 30명을 뽑는데 96명이 지원을 했어요. 생각보다 경쟁률이 적죠? 그런데 서울대는 점수가 안 되는 사람은 애초에 지원을 안 해요. 수능 1등급인 애들 중에서도 최상위권 애들만 지원을 하다 보니까 이렇게 경쟁률이 적은데요. 그래도, 3.2 대 1의 경쟁률도 사실 뚫기가 어렵습니다. 3명 중에 1명만 합격이고, 2 명은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장 직무는 몇 대 1입니까? 500대 1. 서울대 의대 들어가는 것보다 170배 더 어려워요. 여러분, 제사장 직무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진짜 하늘의 별 따기에요. 여러분들 성경통독 할 때 오늘 본문을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제사장 직무가 얼마나 어렵게 뽑힌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한번 묵상하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자, 이어서. 사가랴가 제비를 뽑아서 성전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거기서 분향을 했습니다. 분향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루에 두 번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주일 동안 해요. 그러니까 총 14번의 분향을 하는 것이죠. 분향은 말 그대로 향을 불살라서 그 연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을 말하는데요. 성경에서 분향은 곧 기도를 가리킵니다.
시편 141편 2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141편 2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아멘.
다윗의 이 노래처럼, 분향은 성경에서 기도의 상징으로 종종 사용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한 것은, 곧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가 기도를 한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일주일 동안 성전에서 기도를 한 거예요. 여러분, 사가랴가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성전에 들어와서 과연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잡고 성전에 들어왔는데, 이 일주일 동안에 사가랴가 무슨 기도를 했겠습니까?
일주일 동안 간절하게, 자식을 달라는 기도를 했을까요? 임신이 불가능한 늙은 나이가 되었지만, 이 기회에 반드시 하나님이 자식을 주실 것을 구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오늘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면, 자식을 구하는 기도를 했을 리가 없습니다. 자,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먼저 보면요.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사가랴가 분향하는 시간에 모든 백성이 성전 밖에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백성들이 밖에서 같이 기도하고 있는데, 자기 개인기도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 받는 사가랴가 공사를 구분 못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를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을 계속 보면, 천사가 나타났을 때 사가랴가 보이는 반응을 통해서도, 그가 개인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죠. 그리고 12절을 보면, 사가랴가 천사를 보고 놀라며 무서워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뿅 하고 나타나면 당연히 무섭겠죠. 그래서 놀라며 무서워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 밑에 천사가 전해준 기쁜 소식을 듣고 나서 보이는 반응이 굉장히 이상해요.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을 봐 볼까요?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자, 천사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지금 이 말씀만 놓고 보면, 마치 하나님이 사가랴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그 응답으로, 사가랴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해요. 아, 천사가 사가랴의 간구함을 듣고 아들을 준다고 하는 걸 보니까, 사가랴가 아들을 달라는 기도를 했나 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자, 오늘 본문 밑으로 쭉 내려가서 18절을 봐 볼까요?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사가랴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자기가 원하던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의 반응인가요? 사가랴가 정말로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했다면, 천사의 말에 기뻐해야 정상 이죠. ‘아이고, 정말입니까? 정말로 내 아내가 아들을 낳습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반응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사가랴의 반응이 이상해요.
기대하던 응답을 받은 사람의 반응이 아닙니다.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천사의 말을 황당하게 받아들여요. 나와 아내가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를 한다는 반응이에요. 이것은, 사가랴가 아들을 놓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놓고 기도했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이죠.
분명히 천사가 내 간구함을 들었다고 해놓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사가랴가 황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반응을 하는 겁니다.
사가랴는요. 아들을 놓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성전에 들어와서 아침 저녁으로, 분명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제목은 절대로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민족을 위한 것이었어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제가 했던 말씀이 기억 나십니까? “유대 왕 헤롯 때에” 사가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너무나도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누구를 기다렸어요? 메시야.
불법적인 유대 왕이 아니라, 구약에 예언 된, 이스라엘 민족에 회복과 부흥을 가져올 합법적인 왕, 메시야 그리스도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왕 헤롯의 때”가 아니라 “유대 왕 메시야의 때”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전 밖에서 모든 백성이 기도했고, 성전 안에서는 사가랴가 기도한 것입니다. 자기 개인기도가 아니라, 메시야가 속히 오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가랴의 반응이 이상한 것이죠. 나는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도했는데, 그리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들렸다고 하는데, 메시야가 아니라 아들을 낳으리라는 응답을 받으니까 그렇게 반응을 한 겁니다.
이 응답을 받고 나서, 사가랴가 밖에 나가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내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다가는 몰매 맞아 죽지 않겠어요?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직무를 행하면서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얼마나 비난을 받겠습니까? 황당한 일이죠.
그러니 사가랴의 심정이 어땠겠어요? 내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자식 욕심이 있지 않았나, 그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나, 자책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스스로가 한심해서 자책을 하고, 다른 백성들에게도 미안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을 겁니다. 차라리 내가 제비뽑은 것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할 것을. 괜히 들어와서 1년에 두 번뿐인 기회 중에 하나를 내가 이렇게 날려버렸구나. 얼마나 후회를 하고 자책을 했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때때로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내가 원한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전혀 엉뚱한 것을 주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이게 왜 이러지? 왜 이런 응답을 주셨지? 내가 기도를 잘못했나? 이렇게 자기가 한 기도까지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가랴에게도 그렇게 하신 겁니다. 사가랴는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도했어요.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응답을 주셨어요. 무슨 응답이었습니까?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여러분, 하나님은 메시야를 바라는 사가랴의 기도에 분명하게 응답하셨습니다. 메시야를 당장 보내기에 앞서서 먼저 그 길을 준비할 자를 보내시겠다고 응답하신 겁니다. 그와 동시에 나이가 많도록 자식이 없던 의로운 두 부부에게 아들을 주시는, 인생 반전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하실 때, 우리가 바라는 그 이상으로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메시야를 바라던 사가랴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일생의 소원이었던 아들까지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올 수도 있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응답이 더디게 온다면,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은 겁니다. 기대하지 않은 응답이 온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우리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응답이 온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을 우리가 다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멘.
세상의 악한 자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합니다. 하물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면 자기 자녀에게 얼마나 좋은 것으로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사가랴에게 그렇게 주신 거예요.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할 그 영광스러운 직무를 감당할 아들을 주신 겁니다. 그로 인하여서 사가랴는 자기가 구한 것 그 이상으로, 믿음의 대를 이어갈 아들까지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기도중심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성전 중심, 기도 중심” 이것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돼야 돼요.
누가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전으로 끝납니다. 사가랴가 성전에서 기도함으로 시작하였고, 그리고 누가복음의 마지막, 24장 5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24장 53절,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시기를 바랍니다.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전에서 마치는 인생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겠다고 제비뽑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500대 1의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응답 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구하는 것 그 이상으로 응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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