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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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느헤미야 1:1-5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2023. 1. 6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가 고향인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로, 주전 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당해서 멸망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총 세 차례에 걸쳐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이 있었어요. 수많은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원수의 땅인 바벨론 땅에서 살게 된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나서 약 50년 뒤에,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쳐서 집어삼킨 거예요. 그러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던 백성들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해방을 시켜주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1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요. 스룹바벨이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1차 귀환으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뒤에 2차 귀환이 있었어요. 이때는 에스라가 귀환해서 신앙개혁 운동을 통해 유다 백성들의 신앙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이 2차 귀환으로부터 약 13년이 지난 시점이 바로, 오늘 본문인 느헤미야서의 배경입니다.
느헤미야는 1차 포로귀환 이후에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어요. 페르시아에서 나고, 페르시아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고향인 예루살렘을 본 적이 없어요. 단지 부모의 말을 통해 귀로만 듣고 자랐습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교포 3세나 4세 정도 되겠죠.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재미교포 3세, 일본에서 태어났으면 재일교포 3세. 이렇게 불리는 것처럼, 느헤미야는 바벨론 교포 3세였습니다. 물론 이제 나라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바꼈으니까 페르시아 교포 3세가 되겠네요. 아마도 그의 할아버가 바벨론에 끌려와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낳은 아들이 바로 느헤미야였을 거예요.
피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지만, 사실상 유다 사람이 아니라, 페르시아 사람입니다. 교포 3세, 4세 정도 되면은 우리말도 모르잖아요. 재미교포 3세 중에 한글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다 영어를 쓰죠. 미국에서 터를 잡고 살다 보니까 굳이 한글을 쓸 필요가 없거든요. 영어로 소통하면서 사는 거예요. 느헤미야 세대가 바로 그런 세대였어요.
지금 2차 포로귀환이 끝나고 약 13년이 흐른 시점인데요. 과거에 1차 포로귀환 때에는 약 5만 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5만 명을 제외한 백성들은 다 페르시아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우선은 예루살렘이 페르시아에서 약 1,00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나 병이 있는 사람은 갈 수가 없었을 겁니다. 또 나이가 많은 사람도 가지 못했을 거예요. 너무 머니까.
뿐만 아니라 굳이 돌아갈 필요를 못 느낀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 땅에서 짧으면 50 가까이 살면서, 내가 여기서 집도 얻었고, 직장도 생겼고, 자식도 낳았는데 왜 떠나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봐야 뭐 별거 있겠느냐? 이런 마음인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유대인의 피가 흐르지만, 이제는 이방의 문화에 젖어서 이방인과 같이 되어버린 사람들.
우리가 그들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결국에 이방 땅에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80년이 지나서 다시 고향에 돌아갈 기회가 생겼어요. 2차 귀환이죠. 이때는 약 1,700명이 돌아갔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백성들 중에서 1,700명이 돌아갔어요. 그런데 이때도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느헤미야도 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때 어린 나이였을 거예요. 아마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였을 겁니다. 그가 어린 나이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 머물렀어요.
그리고 사실 상식적으로 봐도, 안 돌아가는 게 낫죠. 가족들도 다 여기 있고, 집도 여기 있고, 부족하지 않게 잘 먹고 잘 살고 있거든요. 이곳 페르시아 땅에 살고 있는 유다 백성들 중에는 잘 정착해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도 많았어요. 사업을 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페르시아 관직에 올라서 출세하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케이스예요. 오늘 본문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느헤미야 1장 11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다고 말하거든요. 왕의 술 관원. 이 직책은 왕실에서 매우 높은 직책입니다. 왕이 매 끼니마다 포도주나 술을 곁들여서 먹는데, 그 술에 독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왕의 상에 직접 술을 올리는 사람이 바로 술 관원이었어요.
왕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리이고,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왕을 대면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 자리는 왕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어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당연히 지금 여기서 사는 것이 유익하겠죠. 교포 3세 중에서 어쩌면 가장 성공한 사람이고, 앞으로의 인생도 탄탄대로가 놓인 자리거든요. 이렇게 훌륭하게 성공을 했는데, 왜 떠나겠어요?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6.25 전쟁으로 인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온 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그 분들의 아들 세대, 손자 세대에게 만약에 지금 북한에 가서 살 수 있으니까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들이 과연 북한으로 갈까요? 내 삶의 기반이 다 남한에 있을 뿐더러, 지금 북한에 간다 해서 뭐가 유익하겠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그곳에 있던 땅은 이미 국가가 다 환수해 버려서 살 곳도 없어요. 그리고 남한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공산주의 체제로 들어가서 통제받는 삶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곳이 비록 내 조상이 태어난 곳이고, 내 뿌리가 되는 곳이라 할지라도 거기로 가서 살겠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느헤미야는요. 본 적도 없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술 관원이라는 자기 직책도 버리고, 안정된 인생도 버리고, 다 망해서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땅으로 가야겠다고 결심을 해요.
그것이 느헤미야 2장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2장 5절을 봐 볼까요?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이 장면은 느헤미야가 왕을 대면하여 직접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그만큼 느헤미야가 왕과 가까운 사이였어요. 사적인 부탁을 할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느헤미야가 지금 무슨 부탁을 하고 있습니까?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주소서.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을 건축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요.
여러분, 도대체 느헤미야가 무엇 때문에 이런 부탁을 왕에게 할까요? 느헤미야가 지금 왕 앞에서 마음 편하게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큰 두려움 가운데 부탁하고 있는 거예요. 느헤미야 2장 2절 끝에 보면, 느헤미야가 왕에게 부탁을 하기 전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라고 자기 심정을 기록하고 있어요.
혹시라도 왕이 조금이라도 빈정이 상하면 그 즉시 느헤미야는 죽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그 두려움 속에서 왕에게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주소서. 그리고 성을 건축하게 해주소서.”
여러분, 도대체 왜 느헤미야가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을까요? 도대체 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왕에게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을까요?
먼저 그 배경을 보면요. 오늘 본문 2절에 느헤미야에게 한 가지 소식이 전해진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봐 볼까요?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지금 보면, 느헤미야가 자기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에게서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친형젭니다. 하나니는 아마도 2차 귀환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고향에 갔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아마도 고향인 예루살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1,700명의 백성들과 함께 떠났을 겁니다.
부모님께 말로만 들었던 내 고향, 꿈에서도 가보기를 소원하는 그곳에 갈 기회가 오니까 두말 않고 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의 안에도 똑같은 그리움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니가 예루살렘에 갈 때, 느헤미야도 같이 가고 싶었을 겁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사정에 의해서 갈 수 없었겠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니가 돌아왔을 때 고향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죠. 2절에 보니까,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고향의 형편을 물어봤어요. 그동안에 형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형제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고향의 형편을 먼저 물어본 겁니다.
과연 고향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무너진 성전은 다시 세워졌을까? 백성들은 열심히 예배 드리면서 살고 있을까? 이러한 기대감과 호기심이 있었겠죠. 그런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하나니가 전해준 소식은 어떤 소식이었습니까? 매우 슬프고 참담한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봐 볼까요? 3절에 보니까,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믿기지 않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백성들은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봄이 온 줄 알았는데, 혹독한 겨울이 닥쳤다는 거예요.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이때 유다 백성들은 외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다행히 재건을 했지만, 성을 지킬 성벽은 재건하지 못했거든요. 성벽이 없으니까 끊임없이 침략을 당하고 약탈을 당하는 환난 가운데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고향의 상황이었어요.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슬픔에 사무쳐서 수일 동안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밑에 4절에 보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여러분은 느헤미야의 슬픔이 공감이 되십니까?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고향, 나와 상관도 없는 고향이 환난을 당했다는 그 소식에 우리는 느헤미야와 같이 마음아파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잠깐 슬퍼할 수는 있겠죠. “아이고 어쩌다 그랬을까..” “저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이렇게 슬퍼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게 끝일 겁니다. 그저 뉴스를 보다가 안 좋은 소식이 들리면 혀를 차고 탄식하는 그 정도의 감정으로 끝날 거예요.
선한 사람이라면 얼마 정도 재난지원금이라도 보내주기도 하겠죠. 그러나 결국에는 그게 끝입니다. 참 안됐구나, 하고 마음 쓰다가 곧 외면하는 딱 그 정도의 감정일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얼마나 슬펐던지 소식을 듣자마자 주저 앉아서 울고 며칠 동안이나 슬퍼하며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자기 가족이 죽은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극심한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왜 느헤미야가 이토록 슬퍼했을까요? 그의 감수성이 높아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니요. 여러분, 그것이 아니라, 느헤미야는 지금 자신을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같은,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의 신앙공동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가족친지도 아니고, 직장동료도 아니고, 1,000 키로미터나 떨어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나와 같은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형제, 자매들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슬퍼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국경을 초월하여서, 남녀노소를 초월하여서, 시대를 초월하여서 모두가 다 한 가족, 한 공동체입니다. 바로 그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느헤미야가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신앙의 필수요소라고 믿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연합된 것처럼, 머리 되신 예수님과 몸된 교회가 연합된 것처럼, 모든 성도는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어요. 각개전투 하는 신앙생활은 끝까지 경주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공동체로서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보듬으면서 함께 가는 것이 진정으로 건강한 신앙생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느헤미야처럼, 우리 신앙의 공동체를 아끼고, 서로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러한 끈끈함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보를 보면 교우동정란에 위로할 일이나 기뻐할 일들이 광고로 올라옵니다. 입원하신 분, 또 건강회복중에 있는 분들의 이름도 올라와요.
우리가 그것들을 그냥 한번 보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위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유다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해요.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포함하진 않았지만 5절부터 11절까지가 그 기도의 내용입니다. 5절만 우리가 볼 텐데요. 5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도에서 핵심은 바로 언약이에요.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이 무엇인가를 보면, 밑에 9절에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요. 9절 말씀도 우리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아멘.
이것이 느헤미야가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는 언약의 내용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가 계명을 지켜 행하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그들을 돌아오게 하신다는 언약이에요.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언약입니다.
과거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아픔을 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 그 계명을 지켜 순종한다면, 그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부흥케 하시리라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그 언약을 지켜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어요. 환난 당하고 능욕을 당하는 고향 땅의 동포들, 그들이 언약을 통해 회복되기를 바라는 일념으로 울며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으로서 남 부러울 것 없고, 앞으로 꽃길만 걸어갈 수 있는, 앞날이 창창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은 자리에 올랐어요. 왕의 신임을 얻어 큰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여러분, 본래 사람이라는 것은 자리가 높아지고, 힘을 얻게 되면 변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과거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의 인격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권력을 줘 보아라.” 이것이 무슨 말이겠어요?
권력을 얻었을 때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이 드러난다는 말이죠. 착하고 정직해 보이는 사람도 권력을 얻게 되면 변질되고 부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떠했습니까? 페르시아 왕궁에서 실세 중의 실세인 술 관원이 되었음에도 변질되지 않았어요.
수많은 관리들이 느헤미야에게 뇌물을 주려고 하고, 아부를 떨었을 텐데도 변하지 않았어요. 오늘 왕의 심기가 어떤지, 왕의 관심사가 무언지, 다음 정책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조그마한 정보라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느헤미야에게 줄을 대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느헤미야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부모의 부모로부터 전수받은 신앙과 거룩성을 지켰습니다. 교만하지도 않고, 감언이설에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본분을 지켰어요.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본분을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그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그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느헤미야는 한 언약 공동체인 유다 백성들의 아픔에 같이 아파했고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라고, 그들을 회복시켜주시라고,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여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멀고 먼 고향 땅,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남으로 여기지 않고, 내 형제로 여기며,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마음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평안하고자 하는 사랑이 느헤미야에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한 발 더 나아가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걸고 왕을 대면하여 ‘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그 길을, 큰 두려움 가운데서도 기꺼이 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그 일을 기꺼이 내가 감당하리라는 위대한 결단이 오늘 여러분 마음에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여러분이 결단하는 바로 그 때에 역사는 시작됩니다. 바로 그곳을 하나님이 주목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이 현장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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