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율법과 성령의 감동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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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2:21-39
“주의 율법과 성령의 감동”
2023. 12. 13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주의 율법과 성령의 감동”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나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기록한 단락인데요.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에만 있어요.
사복음서는 서로간에 조금씩 내용면에서 차이가 있는데요. 특히 오늘 본문이 속한 누가복음 2장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누가복음만의 독점 스토리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간 내용도 누가복음에만 있는 내용이고, 여관에 방이 없어서 아들을 구유에 뉘었다는 내용도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또 천사가 구주가 나신 소식을 전해주는 내용도 누가복음에만 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이에요.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내용이죠. 예수님이 태어난지 팔일이 되었을 때, 또 정결예식의 기한이 찼을 때, 그리고 오늘 본문 밑에는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이와 같은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고 해서 우리가 오해를 하면 안 되겠죠. 이것은 누가가 자기 멋대로 지어낸 내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에요. 다만 마태나 마가나 요한은 각자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기록을 안 한 것이죠.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기록하기보다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초점을 맞춰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뺀 겁니다.
하지만 누가는 달라요. 누가가 누가복음을 왜 썼습니까? 누가복음 1장 3절, 4절에 보면, 왜 썼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요. 누가복음 1장 3절, 4절에 보니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것이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데오빌로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고,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쓴 거예요. 데오빌로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안 된 로마의 고위관료였을 겁니다. 이 사람에게 보내려고 자세히 쓴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8일이 되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정결예식의 날이 찼을 때는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기록을 한 겁니다.
우리는 이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이 알지만,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도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고, 큰 은혜와 깨닫는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제 본문내용을 살펴보면요. 먼저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죠. 2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아멘.
유대인들은 아들이 태어나고나서 팔 일이 되면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반드시 아들은 태어난지 팔 일이 되면 할례를 받아야 돼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할례가 끝나면 그때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에요. 전통적으로 할례가 끝나면 이름을 지어주는데, 이것은 지역마다, 또 가문마다 다르긴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지어주는 가문도 있어요. 어쨌거나 예수님은 할례를 하고 나서 이름을 지어줬어요.
물론 이름을 부모 마음대로 지어주지 않았죠. “천사가 일컬은 바”대로, 이미 “예수”라고 이름이 정해져 있었어요. 하지만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아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할례를 받고 나서야 마침내 예수라고 불러준 겁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태어나기 전부터도 그렇고, 태어나서도 그렇고 그 인생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대로 나아가고 있어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의 율법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는 천사를 통해서, 그리고 태어나서는 부모를 통해서, 그 인생이 예언을 성취하면서 율법을 완성시켜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어서 22절을 보면, 이번에는 정결예식의 날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22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번에도 역시 율법을 지킵니다. 이번에는 “정결예식”을 지키죠. 이 정결예식은 뭐냐면, 아이를 낳은 여인이 다시 정결하게 되는 제사를 말합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그 여인은 부정하게 되거든요. 레위기 12장에 보면,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 딸을 낳으면 14일 동안 부정해요.
그런데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죠. 아들을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기 때문에, 7일 동안은 집에 있어야 돼요. 그리고 8일째 되는 날에 아들의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 여인은 33일을 더 집에 머물러요. 왜냐하면 아직 온전하게 정결해지지 않았거든요.
율법에 따르면, 아들을 낳은 여인은 총 40일을 집에 머물러야 됩니다. 7일과 33일, 합쳐서 40일이죠. 부정하기 때문에 40일 동안을 집에 있어야 돼요. 참고로 딸을 낳으면 80일을 머물러야 됩니다. 두 배를 더 머무는 거죠.
자, 그러다가 기한이 차면, 마침내 정결예식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마리아도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이때 마리아가 아기를 데리고 가죠. 집에 아기를 볼 사람이 없으니까 당연히 아기를 데리고 가야겠죠.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한 140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걸어서 가면 5일 정도 걸리거든요. 그러면 가는데 5일, 돌아오는데 5일. 10일 동안이나 집을 비워야 돼요. 그 긴 시간 동안 아기를 떼어놓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아기를 데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아기를 데려가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23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자, 아기를 데려가는 이유가 따로 있어요. 그게 뭡니까? 주의 율법에 써있는 대로, 처음 난 남자 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서 데려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3장에 기록된 율법이에요. 출애굽기 13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히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그래서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해 아기도 함께 데려간 겁니다.
그리고 이제 성전에 가서 정결예식을 행하는데, 밑에 24절에 보니까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를 하려고 했어요. 24절도 한번 봐 볼까요?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지금 마리아가 정결예식 때 드릴 제물로 뭘 드릴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을 기록을 해놨죠. 이것은 마리아의 집이 매우 가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율법에 정결예식 제물에 대해서도 명시하고 있는데요. 집안에 여유가 좀 있으면 일 년 된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고, 가난한 경우에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로 바치려고 하죠. 가난하니까. 남편이 사회계층 가장 밑바닥인 목수다 보니까 뭐 돈이 있겠습니까? 그만큼 집안이 가난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배경이 그만큼 연약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24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태어날 때도 여관에 방이 없어서 마구간 구유에 누이셨고, 태어난 집안도 이렇게 가난해요. 그러나 그 낮고 낮은 곳에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비천한 자가 높아지고, 주리는 자가 풍성하게 되는 역사가 바로 이 분으로 인하여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 반전의 클라이막스를 위해서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연약한 배경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관방도 없었고, 또 양을 드리지 못해서 비둘기를 드렸다.
자, 이제 이어서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왔어요. 그리고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예수님 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사람이에요.
시므온, 이 이름은 히브리어 “샤마”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샤마는 “듣다” 라는 말인데, 이 말에서 시므온이라는 이름이 나왔어요. 시므온의 뜻은 “그가 들었다” 입니다. 그가 들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죠.
아니나 다를까,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시므온을 이렇게 소개하는데요. 2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아멘.
시므온에 대해서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번째는 그가 의롭고 경건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신앙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고 경건하다.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흠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복음 1장 6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부모가 그랬어요. 누가복음 1장 6절에 보니까,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세례 요한의 부모 두 사람도 의인이었습니다. 의인으로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시므온과 같은 신앙인들이었던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똑같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25절을 다시 보면, 뭘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려주시는 위로를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서 위로는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라는 말입니다. 위로, 격려. 이런 말이에요. 이것을 의인들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 “파라클레시스”라는 말은 “파라칼레오” 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거든요. 파라칼레오. 이 말은 “위로하다” 라는 말이에요. 이 파라칼레오에서 파생된 또 다른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바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파라클레토스. 번역하면 “위로자”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파라클레토스를 요한복음에서 뭐라고 번역을 하는가 하면, “보혜사” 라고 번역을 합니다. 보혜사.
다시 정리를 하자면, 지금 의인들은 “위로”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누가 오신 거예요? “위로자”가 오신 겁니다.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을 만나주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는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죠.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영원토록 함께하십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위로가, 단순히 한번 베풀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이 땅에 오셔서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거예요. 몇 백 년 동안의 백성들의 기도제목이 상상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응답된 겁니다.
그래서 그 기쁜 소식을 시므온이 찬송을 해요. 오늘 본문 28절로 가서 보면,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것을 먼저는 천사들이 찬송했고, 그 다음에는 목자들이 찬송을 했어요. 누가복음 2장 13절을 보면,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장 20절에,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로, 시므온이 찬송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 있죠. 26절에 보면,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시므온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어요. 여기서 “지시”라는 말은 신이 내려주는 신탁을 말합니다. 신에게서 받은 메세지. 그런데 이것을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하면, 성령에게서 받았어요. 성령의 지시, 성령이 시므온에게 메세지를 주신 겁니다.
자, 어떤 메세지를 주셨어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메세지죠. 시므온 네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메세지를 언제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받은 날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볼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어요. 어디서요? 예루살렘에서. 자기 고향 예루살렘에서 1년 365일,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7절 내용인데요.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아멘.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그 감동대로 성전에 들어갔어요. 성전에 가면 그리스도를 만나리라는 감동을 받은 거죠. 그런데 그때 성전에 누가 같이 들어왔습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어요. 이 사람들은 성전에 왜 왔습니까?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기 위하여 왔죠. 율법의 관례대로 정결예식을 행하려고, 그리고 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서 왔어요.
그러니까 지금 27절은 “성령의 감동”으로 온 사람과 “율법의 관례”대로 온 두 종류의 사람들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어디서요? 성전에서. 성전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과 율법의 관례를 행하는 사람이 만난 겁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기 예수님이 주께 드려지고 있어요.
여러분, 이 그림을 잘 생각해보세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도 성전으로 가고, 율법을 행하는 사람도 성전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제가 누가복음 설교 첫 시간에 이런 말씀을 드렸었죠. ‘누가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전에서 끝난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첫 장면이 뭐예요?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장면이죠. 그리고 누가복음의 마지막은요? 제자들이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끝이 나요. 누가복음 24장 53절에 이렇게 끝납니다.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처럼 누가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전에서 끝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중심에도 여전히 성전이 있어요. 예수님이 주께 드려지는 그 일생일대의 순간에, 성전에는 성령의 감동과 율법이 공존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령의 감동과 율법은 따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같이 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두 영역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성령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율법만 중시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을 사모하면서 율법을 흠이 없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누가가 강조하고 있어요.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아니라, 똑같이 중요해요. 그런데 우리가 때로는 이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성령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율법은 등한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율법은 불필요하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여 주신 명령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사실상 율법은 성령의 감동과 분리할 수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말을 많이 했지만,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을 한 것이지, 결코 율법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균형을 잡으라는 말이에요. 성령의 감동과 율법, 그 균형 속에서 바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누가복음은 성전중심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성전 안에는 성령의 감동만 있는 것도 아니고, 율법의 관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함께 있어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는 거예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도 하나님께 드려져야 돼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 따라,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이 왔음에도 순종하지 않고 성전에 오지 않았다거나,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지 않고 성전에 오지 않았다면,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순종했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주의 율법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성전으로 오라 하시면 성전으로 가고, 찬송하라 하시면 찬송하고, 기도하라 하시면 기도하는, 의롭고 경건하며 흠이 없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위로자 예수님이 오셨던 것처럼, 우리를 위로하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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