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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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3:1-6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2024. 2. 1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본래는 14절까지가 오늘 본문이었는데요. 설교준비를 하다 보니까 14절까지 하면 설교를 1시간은 해야 될 거 같아서 6절까지로 줄였습니다. 그래서 7절부터 14절까지는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하고요. 오늘은 1절부터 6절까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이 마침내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역을 시작한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바로 앞에 본문으로부터 18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앞에 본문이 예수님의 열두 살 때 내용이었거든요.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서른 살이 되셨어요. 그러니까 18년의 세월을 건너뛴 겁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열두 살 때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어떻게 성장을 하셨는지 궁금하잖아요.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어떻게 성장하셨는지 알려주지 않아요.
왜 알려주지 않을까요? 사도들이 몰라서 안 썼을리는 없겠죠. 특히 누가는 누가복음을 쓰면서 직접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물어보고 썼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성장배경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아요. 그런데도 쓰지 않았단 말이죠. 열두 살 때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이 긴 기간의 일들을 기록하지 않고 빼버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굳이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열두 살 때 있었던 실종사건까지만 기록을 해도 족하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선포한 사건을 끝으로, 더이상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아마도 이 긴 시간 동안에 예수님은 집에서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하셨을 겁니다. 우리가 따로 주목할 만한 특별한 사건 없이, 여느 아이들과 같이 집안일을 도우면서 평범하게 자라가셨겠죠.
그러다가 예수님이 서른 살이 된 어느 날, 마침내 새로운 스토리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그 때의 시대적 배경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누가복음에서 오직 여기서만 이렇게 자세하게 배경을 설명합니다. 이후에는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을 해요.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 또는 “그 때에” 이런 식으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자세하게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1절 2절 시작,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아멘.
이 말씀을 보면 말이 아주 길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빨간 글씨만 보면 돼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야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것만 봐도 내용상으로 문제가 없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로마의 황제가 되어서 통치한 지 15년째 되는 해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의 형식이 낯이 익지 않습니까?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익숙하실 거예요. 지금 이 말씀은 구약의 선지서의 형식을 그대로 본따서 기록을 한 겁니다. 선지서가 시작할 때 보통 이렇게 시작을 해요. ‘무슨무슨 왕이 다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니라.’ 이런 식으로 선지서가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서 예레미야를 보면요. 예레미야 1장 1절, 2절에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이처럼 선지서는 가장 먼저 시대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시작합니다. 크게 두 가지를 설명을 하죠. 하나는 무슨 왕이 다스리고 있었는가를 설명을 하고, 또 하나는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하였는가를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서가 시작하는 서론의 형식이에요. 바로 이 형식을 누가가 그대로 따라서 쓴 겁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형식이 똑같죠. “무슨무슨 왕이 다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러분, 왜 누가는 누가복음 3장을 시작하면서 선지서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서 썼을까요?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요한도 똑같은 선지자라고 말하기 위해서 선지서의 형식을 따라한 겁니다.
그동안의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요한이라고 하는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죠. 이것을 1절과 2절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1절을 다시 보면요. 통치자들이 여러 명 등장을 하죠. 1절을 다시 봐 볼까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누가는 총 세 종류의 통치자들을 소개하는데요. 첫번째는 디베료 황제입니다. 디베료 황제는 로마의 두 번째 황젭니다. 이 황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도 계속 로마를 통치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본디오 빌라도 총독인데요. 사도신경에도 이름이 나오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이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로, 분봉 왕들을 소개합니다. 총 세 명의 분봉 왕이 등장하는데요. 헤롯과 그 동생 빌립과 루사니아, 이렇게 세 명의 분봉 왕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분봉 왕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테트라아르케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사분의 일을 다스리는 자” 이런 뜻입니다. 사분의 일을 다스리는 자. 그러니까 유대 땅을 사등분해서 사분의 일씩 나눠서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분봉 왕이 네 명이겠죠. 4분의 1씩 나눴으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분봉 왕이 세 명만 소개가 됐어요. 헤롯, 빌립, 루사니아.
이 사람들은 모두 헤롯 대왕의 아들들입니다.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서 두 살 아래의 갓난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왕이죠. 이 왕 때문에 예수님 가족이 잠시 애굽으로 피신을 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장 5절에 보면, “유대 왕 헤롯 때에…” 라고 이 당시 왕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데, 이 헤롯이 바로 헤롯 대왕입니다. 분봉 왕들의 아버지.
이 헤롯 대왕이 죽고 나서 네 아들이 유대 땅을 나눠서 각각 사분의 일씩 다스린 거예요. 그런데 이 네 명 중에 특별히 우리가 주목할 사람이 있는데요. 바로 ‘헤롯’입니다. 정확한 이름은 ‘헤롯 안디바’ 라는 이름인데요. 성경에는 안디바라는 이름은 안 나오고 그냥 ‘헤롯’이라고만 나와요. 이 헤롯 안디바는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헤롯 안디바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이 사람이 나중에 세례 요한을 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죽이는데 일조를 해요. 그런 인간이 지금 유대 땅, 그것도 갈릴리를 다스리는 분봉 왕입니다.
여러분, 지금 1절에 있는 이름들을 가만히 봐 보세요. 답답하지 않습니까? 디베료 황제, 본디오 빌라도, 헤롯,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영적으로 제대로 된 인물이 없어요. 모두가 뇌물과 폭력과 무자비함으로 가득한 자들입니다. 헤롯이야 말할 것도 없죠.
본디오 빌라도는 어떻습니까?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필로는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그는 융통성이 없으며, 고집이 세며, 잔인하며, 뇌물을 즐기며, 폭력적이며, 재판 없이 사형을 집행하며, 야만적이다.”
이것이 역사서에 기록된 본디오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그런 인간이 유대 총독이 됐어요. 그러니 이 당시 유대 땅의 분위기가 어땠겠습니까? 살벌하지 않았겠어요?
그리고 또 밑에 2절을 보면, 이 당시의 대제사장이 누구인지도 소개를 하는데요. 2절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아멘.
이 당시의 대제사장을 두 사람 소개하는데요. 바로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좀 이상해요. 왜냐하면 분명히 사람은 두 사람인데, 대제사장이라는 말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둘이면, 당연히 대제사장도 복수형태로 써야 되거든요?
이것은 누가가 실수로 잘못 쓴 게 아닙니다. 일부러 이렇게 쓴 거예요. 안나스와 가야바 두 사람이지만,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대제사장직을 소유했다는 의미로 단어를 단수형태로 쓴 겁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시대에 한 명만 존재합니다. 둘이 있을 수 없어요. 본래는 안나스가 대제사장이었어요. 그러면 가야바는 누구냐?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윕니다. 장인에게서 사위에게 대제사장직이 넘어간 거예요. 사실 이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직은 세습직이기 때문에 아버지에서 아들로, 또는 다른 친족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래서 장인에게서 사위에게 넘어가는 것도 문제가 안 돼요.
그러면 무엇이 문제냐? 안나스가 직분을 넘겨주고 나서도 계속해서 그 배후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권세를 행사했다는 것이 문젭니다. 마치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처럼 자기 아들이 이미 임금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계속 나라를 손에 쥐고 좌지우지 하는 것이죠.
바로 이것을 누가가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안나스와 가야바, 두 사람이지만,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대제사장직을 소유하고 권세를 휘둘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이처럼 대제사장이 한 사람도 아니고 둘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래는 성전에 있는 대제사장에게 말씀이 임해야 맞죠. 하지만 성전이 아니라 성전 밖,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어요. 이것은 안나스와 가야바가 말씀을 들을 자격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직분만 대제사장이고, 영적으로는 전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본문 1절과 2절은 이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이 얼마나 암울하고 타락한 시대였는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는 본문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유대 땅을 통치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다윗의 혈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낙하산들이 분봉 왕으로서 땅을 통치하고 있어요. 또 백성들을 지도해야 할 영적 리더들은 말씀도 듣지 못하고 그냥 권력에 미쳐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사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제대로 된 대제사장도 아니에요.
본래 대제사장은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아론의 자손들만 할 수가 있잖아요. 안나스는 아론의 자손이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대제사장이 됐는가 하면, 수리아 총독 구레뇨가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해줘서 대제사장이 됐습니다.
구레뇨는 누가복음 2장 2절에 보면,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 명령을 내릴 때 수리아 총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그냥 자기 멋대로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어요. 직권남용이죠.
그러니까 지금 유대 땅이 꼴이 말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도 정통성 없는 자들이 왕으로 있고, 영적으로도 자격이 없는 자들이 대제사장으로 있어요.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암흑기를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이 땅에 빛줄기 하나가 내려온 겁니다. 마침내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냥 말씀이 임했다고만 나와요. 그리고 그 뒤에 곧바로 요한이 사역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사역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사역이었다고 말씀하는데요. 3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3절 시작,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사역이에요. 그런데 이 말씀에 의하면, 요한은 한 곳에서만 사역을 한 게 아니죠. 요단 강 부근 각처에서 세례를 전파했어요. NIV 영어성경에는 “all the contury around the Jordan” 이라고 번역합니다. “요단강 근처 모든 지역” 그러니까 요한이 한 곳에만 머문 게 아닙니다. 사역지를 옮겨가면서 세례를 베풀었어요. 요단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모든 백성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 옮겨다닌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필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을까요? 물론 요단강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강이기 때문에 사역을 하기에 가장 적합했겠죠. 하지만 우리는 요단강에 담겨 있는 상징과 의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요단강은 과거 선지자 엘리야가 승천한 곳입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나와요. 그 장소가 바로 요단강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 엘리야와 세례 요한을 연결시키고 있어요.
엘리야가 승천한 바로 그곳에서 요한이 사역을 한다는 것은 곧, 요한이 엘리야를 계승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 17절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하죠. 누가복음 1장 17절에,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아직 요한이 잉태되기도 전에 이미 그가 무슨 사역을 할 것인지를 천사가 예언하고 있는데요. 특별히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을 하리라고 말을 합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 이것은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과 능력이에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영과 능력을 부어주셔서 그가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과 능력을 이제 요한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요한이 엘리야를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가졌던 것과 동일한 영과 능력으로 사역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이 곧 엘리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증언하셨어요. 마태복음 11장 12절부터 14절까지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아멘.
예수님이 증언하셨죠.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다. 그러니까 요한은 선지자 엘리야를 계승한 자로서 엘리야가 승천했던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사역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주 깊은 성경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4절부터 6절까지를 보면, 이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이사야서에 근거해서 설명을 합니다. 오늘 본문 4절부터 6절까지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지금 이 말씀은 이사야 40장 3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온 건데요. 이 말씀에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누군가를 향하여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메시야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준비를 하라고 합니까? 길을 곧게, 평평하게 준비를 하라고 명령해요. 골짜기는 메우고, 산은 낮추고, 굽은 것은 곧게 펴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서 주님이 편안하게 그 길을 가실 수 있도록 도로공사를 잘 하라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진짜로 도로를 내라는 말은 아니죠. 사람의 마음을 비유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교만한 마음, 완악한 마음, 세속에 물든 마음, 그 모든 마음을 메우고, 낮추고, 펴서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준비과정을 한 마디로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하여 주님을 영접하라는 거예요.
이때 요한은 특별히 물로 세례를 베푸는데요. 물로 씻으라는 것이죠. 더러운 때를 물로 씻어내듯이, 마음에 묻은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로 씻는다고 해서 그 더러움이 완전히 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씻어내도 밖에 나갔다 오면 도로묵이에요. 다시 더러워집니다. 다시 더러워지는데 굳이 이 사역을 해야 되나, 싶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반드시 이 사역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이제 곧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에.
비록 지금 물로 베푸는 세례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 세례를 통하여 백성들을 준비시켜 놓으면, 마침내 주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서 영원무궁한 세례를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님이 들어올 자그마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요단강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세례를 베푼 겁니다.
그런 요한에게, 성경은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는데요. 바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든 복음서에서 동일하게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부르고 있어요.
여러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뭘까요? 구약에서 오직 이사야서에서만 나오는 말인데요. 이 말은 선지자의 말씀사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선포하는 사역을 하죠. 바로 그것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표현을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목소리예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메신접니다. 요한이 그 메신저로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한은 바로 이 사역을 위해서 엄마 뱃속에 잉태되기도 전부터 이미 예비된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미 내정이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그것도 시대적으로 가장 암울하고 처참한 암흑기에 그 사명을 감당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요한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빈 들에 머물면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사명을 감당하는 거예요. 물론 요한에게 제자들이 있었죠.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최소 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많아봐야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소수의 제자들을 데리고 메뚜기 잡아먹으면서 사역을 하는 겁니다.
말 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예요. 광야에 아무도 없는데, 광야에서 외친다고 누가 듣습니까? 그냥 부질없이 공중에서 사라지는 허망한 소리일 뿐이에요. 외롭고 쓸쓸하고 맥이 빠집니다.
나는 미약한데, 세상의 권세자들은 너무나 막강해요. 디베료 황제, 본디오 빌라도 총독, 분봉 왕, 또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 등등.. 이 어두운 시대에 원수들은 막강한데, 내 편은 없는 것과 같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들도 요한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설 명절날 즐거운 시간 보내셨습니까? 오랜만에 식구들 만나서 같이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 보내셨을 텐데요.
어떤 가정은 온 가족이 예수님 믿는 가정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가정은 나 혼자만 믿고 아무도 안 믿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나만 예수님을 믿을 때, 참 암담하죠. 여러분들 중에도 가족들 중에 혼자 예수님 믿는 분들이 계신 줄로 압니다. 분명히 식구들 둘러 앉아서 즐거운데,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외로움이 있죠. 여러분, 거기가 바로 여러분의 광야입니다. 거기가 바로 여러분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해야 할 요단강입니다.
요한이 엘리야의 사명을 계승하였던 것처럼, 이제는 여러분이 그 사명을 계승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명령을 하셨어요. 누가복음 24장 47절과 4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아멘.
먼저는 요한이 가졌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는 그 사명이 이제는 제자들에게 계승이 됐죠.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회개를 전파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요한에게서 제자들에게 사명이 계승되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그 사명이 우리들에게 계승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요한보다는 상황이 낫잖아요. 요한은 혼자였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이가 마지막 때라고 말하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 모두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서,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도록” 주의 길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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