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교회
Notes
Transcript
<수요설교>
누가복음 2:40-52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교회”
2024. 1. 2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교회”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내용 중 마지막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이에요.
제가 2년 전에 이 본문을 가지고 한 번 설교를 했었는데요. 그때 제가 이 본문이 일종의 샌드위치 구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여러분, 샌드위치가 어떻게 생겼어요? 위아래에 똑같은 빵이 있고, 그 안에 햄과 야채가 들어있죠.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은 위아래에 똑같은 말이 있고, 그 안에 하나의 사건이 들어갑니다. 먼저 오늘 본문 40절을 봐 볼까요? 4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그리고 맨 밑에 52절도 보면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40절과 52절이 서로 굉장히 흡사하죠. 이 두 개의 비슷한 문장이 위 아래에 있고, 그 사이에 오늘 본문 사건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두 구절에는 똑같은 헬라어 단어가 들어가는데요. 그것은 “카리스”라는 단어입니다. 카리스는 은혜라는 말이에요. 이것을 40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번역을 했어요. 그리고 52절에서는 “사랑” 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사실상 같은 말이죠. 어떻게 번역을 해도 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때에도 은혜가 충만했고, 오늘 본문의 사건이 지난 뒤에도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은혜롭고 사랑스러웠다는 두 문장이 위 아래에 있습니다. 마치 샌드위치 빵처럼 위와 아래에서 같은 말로 에워싸고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있는 한 사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두 문장 사이에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한 사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일까요? 도대체 어떤 사건이길래, 예수님이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것을 이렇게 위 아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 사건은 별로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건은 아니죠. 어떤 사건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실종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스러워 가시던 중에 갑자기 사라져버렸어요. 무려 사흘 동안이나 부모 품을 떠나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실종사건이 예수님이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살펴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어린 예수님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절기를 다 마치고 다시 집으로 내려가는데, 예수님이 가족을 따라서 가지 않고 성전에 그대로 남았어요. 나중에야 아들이 사라진 것을 알고 요셉과 마리아가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다시 예루살렘까지 거슬러 왔을 때에야 비로소 아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게 오늘 사건의 정황이에요.
부모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죠. 경건하게 절기를 다 지키고 친척들과 함께 집으로 가는데, 아들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마다 유월절만 되면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절기를 잘 지켰는데, 오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유대 사회는 공동체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 집 자녀만 자녀가 아니고, 다른 집 자녀도 내 자녀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이 잠시 보이지 않더라도 당연히 다른 집에서 밥 먹고 보살핌을 받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돌아올 생각을 안 해요. 마땅히 돌아와야 할 아버지 요셉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집은 노상에 설치한 임시 텐트였겠죠. 이 텐트로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4절에 기록된 것처럼,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아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 텐트, 저 텐트. 다 찾아다녀요. 그런데 없는 겁니다. 아들이 보이질 않고, 심지어 아들을 본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이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죠. 거슬러 가면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어린 아들이 율법선생들 가운데 앉아 토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흘 만에 발견한 아들은 부모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해맑게 신이 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듣는 자가 다 놀랄 만한 지혜의 말을 율법선생들에게 들려주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말을 듣고 그 부모도 놀랐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찾고 찾던 아들을 율법 선생들 가운데서 찾게 된 놀라움과 더불어 아들이 하는 지혜의 말에 놀랐어요. 율법에 해박한 율법선생들마저도 놀랄 만한 지혜를 말하고 있으니 그 부모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죠. 우리 아들이 다른 아이들 같지 않고 특출나다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 이렇게까지 지혜가 자랐을까.
그러나 놀람도 잠시, 마리아가 아들에게 다가가 물어봅니다. 48절인데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이 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놀람, 기쁨, 분노, 안도, 책망. 여러 감정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은 데서 오는 기쁨과 안도감도 있고,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아들에 대한 분노도 있고, 지혜의 말을 하고 있는 아들에 대한 놀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 속에서 물어봅니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그리고 이 말에 뒤이어서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근심하였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뒤메노이” 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본래 “괴로워하다, 고통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들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했다는 겁니다. 너무도 괴로웠다는 거예요.
오뒤메나이. 이 말은 오직 누가만 사용하는 말인데요. 왜냐하면 이 말이 의학용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예요. 그래서 의사인 누가만이 사용을 한 거죠.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이 말이 한번 더 나오는데요.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오죠. 이때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죽어서 각자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부자가 지옥에서 괴로워합니다. 그 괴로움 속에서 부자가 부르짖어요. 누가복음 16장 24절에 그가 부르짖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지옥의 불꽃 속에서 부자가 부르짖고 있는데, 이때 그가 “괴로워하나이다” 라고 부르짖는 말이 바로 “오뒤메노이”입니다. 지옥의 불꽃 가운데 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겠습니까? 그 고통을 “오뒤메노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마리아와 요셉의 고통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겁니다. 아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지옥불에 있는 그 부자가 당한 고통에 못지 않은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심정이 느껴지시죠? 여러분, 이토록 어머니가 괴로워하면서 혼을 내시는데, 만약에 우리라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까요? 당연히 용서를 빌면서 약속을 하겠죠. “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겁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의 반응은 일반적이지가 않아요. 특별합니다.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49절에 대답을 하시는데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중 최초의 말씀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성경 최초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4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아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엄마를 나무라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지금까지 요셉과 마리아가 아들을 찾느라 고생한 것, 마음 상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러면서 이어서 뭐라고 말해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적반하장이죠.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당연히 알아야지 왜 모르고 헛수고를 하셨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죠. 아니, 이 놈의 자식이 잘못했다고 빌지는 않고. 매를 때려도 할 말이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먼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단어예요. 헬라어 원문을 보면 사실 “집”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내 아버지의 그것”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이런 말이 돼요. “내가 내 아버지의 그것 안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의 그것, 나는 그 안에 있어야 한다.
성경학자들은 내 아버지의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둘로 나뉘는데요.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보는 입장과 “내 아버지의 일”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나눠져요.
거의 대부분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봅니다. NIV 성경을 비롯해서 거의 대부분의 영어성경도 내 아버지의 집, my Father’s house 라고 번역을 해요. 그런데 유일하게 킹제임스버전 성경에 “내 아버지의 일”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my Father’s business.
내가 내 아버지의 일 안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다시 말해서,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런 말인 거죠.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셨어요? 성전에 앉아서 율법선생들과 토론을 하고 계셨어요. 킹제임스성경은 바로 이 일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런 뜻으로 해석을 한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도 맞고, “내 아버지의 일”도 맞아요. 우리는 이 두 말을 함께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의도적으로 “집”이라는 말을 뺏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아버지의 “그것”이라고만 써놨어요. 이것은 “아버지”라는 말에 집중시키기 위한 누가의 의도입니다. 뒤에 집이 올 수도 있고 일이 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뭐가 됐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그 앞에 “아버지”라는 말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어요. 내 아버지,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최초의 말씀입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하고 있어요. 아버지 앞에서, 나는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세요. 아들이 3일 동안 실종이 돼서 불구덩이에 떨어진 심정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아들을 찾아헤맸어요.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발견했는데, 아들이 용서를 빌기는커녕 무슨 큰일이라도 났냐는듯이 여기가 바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모습은 이제까지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에요. 이제까지는 예수님이 온전히 부모가 이끄는대로 살았거든요. 난지 8일이 되었을 때 할례를 받고, 또 모세의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께 바쳐졌어요. 그리고 아마도 그때부터 매년 절기가 되면 다함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렸을 겁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겁니다.
도대체 이 아들이 왜 이럴까? 이해가 안 되죠. 그래서 오늘 본문 50절에 보면,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얘가 뭔 말을 하는 거야? 이해를 못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의미가 분명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설교할 때 성전 안에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었죠. 성전 안에 성령의 감동과 율법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온 시므온과, 율법의 관례를 따라 성전에 온 예수님의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기 예수님이 계셨어요.
성전 안에서 둘이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둘이 함께 있습니다. 무엇과 무엇이 함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영의 아버지와 육의 아버지, 두 아버지가 함께 있습니다.
성전은 아버지의 집이에요. 그곳에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과 육의 아버지인 요셉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영의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3일 동안, 육의 아버지의 품을 떠나 하나님 내 아버지의 집에서 일을 하셨어요. 그 일은 곧 말씀사역이죠.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며 지혜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3일 뒤에, 육의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 그 일을 다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셔요.
그런데 나사렛으로 돌아간 뒤에는, 예수님이 언제 성전에서 그렇게 밉게 대꾸했었냐는 듯이 부모의 말에 순종합니다. 51절에 기록되어 있죠. 51절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님께서 부모님을 “순종하여 받드셨”어요. 이 말은 일시적으로 잠깐 순종했다는 말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부모에게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육의 아버지인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진심을 다해 순종하였고 그 뜻에 따라 사셨다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영의 아버지의 집에서 사명을 감당하시다가 이제 육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는데 전념합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잠잠히 때를 기다리며 아들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바로 밑에 52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문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열두 살이 되어 성전에 올라온 소년이 3일 동안의 실종사건을 겪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순종할 때에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카리스와 카리스, 그 사이에 들어있는 이 사건이 예수께서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실종사건과 예수님이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 사건이 매치가 되십니까? 잘 되지 않죠.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사랑스러운 분으로 그려가고 있는가. 왜 예수님이 실종사건을 통하여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는가. 그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순종”이 그 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이나 충성하셨어요.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열두 살에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아시고, 벌써부터 행동으로 보여주셨다는 거예요.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결국에는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그 사명을 이미 다 아셨고, 그 사명을 아버지 집에서 시작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시작하시고 나서 불과 3일만에 어떻게 하셔요? 그의 부모가 찾으러 왔을 때 그 즉시 멈추고 부모를 따라서 나사렛으로 내려가셔요.
예수님께서 마땅히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 놓고는, 그 즉시 부모를 따라서 갑니다.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을 멈춘 겁니다. 하늘 아버지 집을 떠나서 육의 아버지를 따라 가요.
이상한 일이죠. 여기 계속 머물러 계셔야 맞지 않을까요? 왜 예수님은 기껏 사역을 시작하셔 놓고, 나사렛으로 돌아가셨을까요?
그 이유 역시도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한 가정의 아들로서 부모에게 순종하기 위하여 나사렛으로 내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도 순종하셨지만, 한 가정의 아들로서도 순종하셨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에 머물며 사역하셨고, 그리고 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미 율법 선생들까지도 놀랄 정도로 지혜로우신 예수님이 선한 것이 없는 나사렛 촌동네에서 사역에 대한 욕심을 다 내려놓고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쉽지 않죠.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을 사용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유명해지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본성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 내려놓으신 겁니다. 얼마 동안요? 무려 18년 동안이나.
열두 살 때부터 공생애를 시작하는 서른 살까지, 18년 동안을 나사렛에서 내려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18년 동안의 시간을 자기절제의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자기절제의 시간.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 하셨을까요? 지금이라도 얼른 가서 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온갖 이적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 내려두고, 가정에 충실하며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동안에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린 나이에 이미 아시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열두 살에 성전에 머물렀던 것도,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도, 그리고 부모를 따라 나사렛으로 내려가 18년 동안이나 순종하여 받드셨던 것도,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셨어요. 그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본문에 비추어 본다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주의 교회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고, 주의 일을 행하는 그 안에 먼저 순종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것을 잃어가고 있어요.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주를 믿는 거룩한 성도라는 아름다운 향기가 사라지며, 단지 모양만 남은 껍데기 신앙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의 풍파와 어려움에 휩쓸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하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채로 현실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껍데기 신앙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예수께서 먼저 본을 보이신 모습을 따라,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뜻대로 순종하며 받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뜻을 순종하여 받듦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혜와 키가 자라며, 우리의 신앙도 날로 날로 성장하여서, 참으로 하나님과 세상 만민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국동제일교회 모든 성도님들 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