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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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렇게 고백해 보겠습니다.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복음인 예수님이 내 삶에 아름답게 일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 모든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습니까? 들어는 보기는 했는데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뭐야 하는 분들이 정말 맞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2장 40~41절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우리가 이제 살펴보게 될 본문은 예수님의 유아기 시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라나면서 나타나는 특징을 '누가'는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먼저 강하여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이나 생각이나 몸이 잘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가 충만했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상식과 통찰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예수님께 주어졌다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 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에게 있어 아주 좋은 신앙의 모델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와 같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아기 때에는 말을 잘 못하고, 우들처럼 말과 모든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정말 어린 시절의 예수님을 철저하게 사랑으로 돌보고 교육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분명 우리가 최선을 다해 키워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키운다는 것은 부족함 없이 다 해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부모님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님은 격려와 지지와 사랑을 충분히 주며 키웠습니다. 그것이 후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녀에게 임하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41절 본문에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찾으셨습니까?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누가 예루살렘에 갔다고 이야기합니까? 그렇습니다.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사실상 성인 남자만 일 년에 세 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항상 동행했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자신이 키우는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키우는 무게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항상 하나님께 예수님을 잘 양육하도록 기도하기 위해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의 신앙 안에 예수님은 어떻게 자랍니까?
강해지고 지혜가 충만한 아이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함께 해야 한다. 성경적으로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의 사랑 돌봄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름답게 잘 자라나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42절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우리는 이 본문을 41절과 이어서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모님이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갔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도 동행했다는 말이구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정확하게 예수님이 언제 예루살렘 성전에 갔는지를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언제입니까? 열두 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중적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갔다. 동시에 예수님이 성인식을 하기 위해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는 13세, 여자는 12세에 성인식을 거행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12세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이야기합니다. 13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인식을 하는 것이 맞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는 마을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140km입니다. 이 길을 직선으로 가면 약 이틀이 걸립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직선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사마리아를 부정한 땅이라고 해서 밟아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회해서 가게 되는데 이러면 3일이 걸립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님의 부모님은 3일 전에 나선 것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그다음 날이 안식일이라 예수님의 성인식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인식은 아주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이것을 바르 미츠바라고 말합니다. 그 뜻이 율법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때가 되면 유대인의 법, 전통, 윤리,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인 오경을 쓰고, 읽고,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지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대인 공동체에 모든 행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한 사회에 한 구성원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한 가지 놀라운 행사를 하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저를 이 아이를 책임질 역할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이 기도에 나와 있듯이 이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성인이 된 아이들은 자신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는 모든 것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머릿속에 넣고 말씀을 더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43~45절입니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43절에서 이야기하는 그날은 바로 성인식을 마치 날을 이야기합니다. 성인식을 마친 예수님과 함께 온 부모님과 일행들은 이제 나사렛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했다고 이야기합니까? 예루살렘에 머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것입니다. 성인식이 마치면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인식을 마치고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렀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부모님이 예수님을 사랑으로 키웠다고 하는데 확인도 안 하고 자신들만 집으로 갔나? 하고 말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절기나 성인식을 지키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했습니다. 보통 앞과 뒤에는 성인 남자들이 배치됩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배치됩니다. 왜냐하면 이동할 때 위험한 곳을 지나거나 강도를 만나면 여성과 여성 노인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집단은 각자 자신의 아이들을 챙기는 방식이 아닌 모든 아이를 내 아이다 생각하고 함께 나아갑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어머니도 자신 옆에 다른 아이와 함께 이동하지만 예수님이 다른 사람과 잘 오겠지, 생각한 것입니다. 나사렛은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이제 하루 정도 이동을 하고 이동하는 어느 지점에서 쉬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백방으로 찾습니다. 없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의 부모님은 대열에서 나와 아이를 찾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하루 동안 온 거리기에 하룻길을 다시 가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46절입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예수님 부모님이 이제 성전에 도착했을 때는 예수님이 남겨지고 사흘이 지난 시간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 성전에 있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에 대해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는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선생 중에 앉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이라는 말의 원어는 중앙이라는 뜻입니다. 이 모습이 어떤지 한번 보겠습니다. (영상 보여주세요.)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을 중심으로 선생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놀라움이었을까요? 지금 예수님은 이제 막 성년식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서 토의 같은 것을 해보았을까요? 토라를 소유하고 토의할 수 있는 나이가 성년식을 딱 지난 나이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예수님은 남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어느 집에 어느 아들일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성인식을 하고 율법을 나눌 수 있게 된 아이가 말씀을 자유자재로 나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누가복음 2장 48절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가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예수님의 부모님은 놀랐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놀라다는 말은 그냥 단순하게 대단한데 놀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사용된 원어를 보면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뜻입니다. 이런 놀란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은 어머니가 이제 예수님에게 다가가 이야기합니다. 아이야 이게 무슨 일이니?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느라고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 예수님의 어머니가 등짝 스매싱이라도 하는 정도의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아이들을 대할 때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주 정중하게 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누가복음 2장 4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어찌하여 저를 찾으셨나요. 어머니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앞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었는데요.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인식이 끝나고 처음으로 하는 발언입니다. 이게 왜 의미가 있을까요? 이 말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돌아갈 집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하나님의 나라라는 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려온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누가를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은 모든 예수님의 생은 어디에 초점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태어나심, 예수님을 드리심, 예수님의 성인식, 모두 죽음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생이 죽음이라는 초점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과연 언제부터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인지했을까? 분명 아기 때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것이 바로 성인식을 통해 한 남자로 인정될 때인 13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한 가지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누가'는 왜 이렇게 예수님의 성인식에 있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누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연 누구의 자녀입니까? 당연히 우리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이게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우리의 신분 변화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 속했지만 이제 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아주 놀랍게도 친절하게 하나님은 기록해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 20절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다시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까? 명예를 가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까? 높은 권력을 가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정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들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자녀들이 가득하고, 지옥은 텅텅 비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아무리 세상에서 다른 것으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가 해도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서 기록될 때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이라고 기록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을 살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바로 전도로 연결합니다. 분명 전도하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우리의 영혼이 살아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생명력으로 가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우리가 힘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우리는 활동하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합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 앞에 있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 우리 교회 청년들과 시작한 일인데 1년 동안 성경 통독을 해보려고 합니다. 갓피플이라는 기독교 회사에서 너무 좋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성경통독방을 만들어서 매일 주어진 분량을 교회 성도들이 함께 읽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분량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루에 5장씩만 읽어가면 됩니다. 우리는 본래 약해서 누가 보지 않으면 그것을 지속하는 힘이 약합니다. 그래서 함께 권면하면서 읽어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읽는 일은 영혼의 양식을 채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 한 우리는 영혼을 살리기는커녕 우리 자신도 힘이 없이 삽니다.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으면 나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연관된 가정, 학교, 직장에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꾸 말씀을 통해 영적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영적 양식을 충분히 공급받으면 이제 영적 에너지가 생깁니다. 이 영적 에너지는 써야 또 새로운 에너지를 생기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영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섬기는 것인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5장 40~41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서 임금은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어떤 좋은 일을 해도 돌려받을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을 하고 한 가지 함정에 빠집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이 사람에게 해야지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옵니까?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저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하겠지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선한 일을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일 중에 가장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통 예수를 전하고 그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 전도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나는 심었다. 유대인들은 농부들이 씨를 심지 않습니다. 뿌립니다. 그러기에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복음을 전하는 전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후에 아볼로는 전도한 곳에 무엇을 주었다고 이야기합니까? 물을 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뿌리는 사역에 대해 하나님은 상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예수를 전하기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극히 작은 자, 복음을 전한다고 우리 교회에 벌컥 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상이 있습니다.
우리 잠깐 매우 중요한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제가 저번 주에 나누어 드린 전도 대상자 카드가 있을 것입니다. 다 기재하셨나요? 안 쓰셨다면 지금 쓰시기를 바랍니다. 음악을 틀어드릴 테니 지금 쓰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름을 다 쓰셨다면 이렇게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예수님 제가 이 영혼에 복음을 전할 때 지금 당장 어떤 엄청난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전하겠습니다. 내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완전히 사용되게 인도하옵소서”- 시간이 흐른 후 – 다 적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뜻을 이루는 방법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이제 죄에서 놓임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내 뜻을 이루고 살다 다시 만나자고, 매일 영적 양식인 말씀을 채우고, 복음을 전하고 살다 주님께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결단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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