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예레미야 되어

예레미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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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설교>
예레미야 1:1-3
“한 사람의 예레미야 되어”
2022. 3. 22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한 사람의 예레미야 되어”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예레미야가 시작되는데요. 예레미야가 총 52장입니다. 굉장히 길어요. 이 긴 내용을 우리가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어떤 메세지들을 우리에게 주시는지 함께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가 누구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출신성분이 나와 있죠. 예레미야의 고향은 베냐민 땅 아나돗이고, 그의 아버지는 그 땅의 제사장인 힐기야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셨는데, 하필이면 아나돗 땅의 제사장의 아들을 택하셨어요. 먼저 아나돗을 살펴보면, 아나돗은 예루살렘 바로 위에 있는 땅입니다. 예루살렘하고 상당히 가까워요. 약 4키로에서 5키로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거리는 가까워도 예루살렘과 아나돗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났습니다. 규모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차이가 컸습니다. 예루살렘은 왕이 살고 있는 수도로서, 정치의 중심지였고, 반면에 아나돗은 일종의 유배지였습니다. 좌천되어서 밀려난 사람이 사는 땅이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과거 다윗 시대에 이제 다윗이 늙어서 왕위를 물려줘야 하는데,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켰다가 죽었고, 또 여러 아들들이 죽었어요. 그래서 남은 두 아들이 유력한 후보였는데, 한 명은 솔로몬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도니야였습니다. 그런데 이 둘 중에 아도니야가 더 정치적으로 앞서 있었습니다. 계승서열도 아도니야가 더 형이었기 때문에 솔로몬보다 계승서열도 높았고, 또 따르는 사람도 더 많았어요. 지지기반이라고 하죠. 이 지지기반에는 군대장관 요압도 있었고, 또 제사장 아비아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기세등등해서 자기 마음대로 왕위에 오르죠. 다윗 허락도 안 받고 내가 왕이다, 선포를 해요. 하지만 다윗이 나서서 그것을 뒤집어버리죠. 다윗이 아도니야가 아니라 솔로몬을 지지함으로써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쫓겨나고,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좌천되어서 뿔뿔이 흩어져요. 이때 제사장 아비아달도 쫓겨나서 유배를 가는데, 어디로 가는가 하면 아나돗으로 갑니다. 사실 아비아달의 고향이 아나돗이에요. 그래서 언뜻 보면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정치싸움에 패배하고 고향으로 쫓겨난 것이죠. 정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정치의 변방으로 쫓겨난 겁니다.
거리상으로는 4킬로 5킬로밖에 안 되지만, 정치권력상으로는 거의 수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 바로 아나돗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바로 이 변방 땅 아나돗에서 선지자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아나돗 땅, 그 땅의 제사장들 중에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상징성을 가집니다. 어쩌면 예레미야는 아비아달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이 볼 때 예레미야가 아비아달의 후손으로 보였다는 점입니다. 아비아달이 추방된 바로 그 땅에서 제사장의 아들이 선지자가 됐는데, 이것은 누가 봐도 정치적인 움직임이거든요.
그래서 불안했을 거예요. 몰락한 아비아달의 후손이 혹시나 백성들을 선동해서 정치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불안감이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활동하는 내내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를 받아요.
그래서 우리가 예레미야를 부를 때 이렇게 부르죠.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일입니다. 내가 무슨 정권을 뒤엎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선거에 나갈 것도 아니고, 청와대를 나와서 국방부에 들어가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치적으로 계산을 하고, 무슨 다른 속셈이 있는 것 아닌가 의심을 하고, 끊임없이 예레미야를 괴롭힙니다.
그러니까 이미 출신성분에서부터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기득권층과 섞일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아마도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을 겁니다. 기득권층과 어울릴 수 없고, 정치와 예배의 중심지에서 살짝 비껴진 곳에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기득권층의 유혹이나 핍박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은 필요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이미 선택하셔서 그가 아나돗 땅의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물론 여기에 예레미야의 생각은 반영되지 않죠.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그것을 한번 거부했어요. 다음 시간에 볼 텐데요. 6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거부해요.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 일을 시키지 마십시오. 이렇게 거부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예레미야의 의견은 애초에 들어있지 않아요. 싫든 좋든 이미 다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예레미야가 순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때가 바로 요시야 십삼 년이었어요.
오늘 본문 2절에 보니까,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밑에 3절에 보면, 말씀이 언제까지 임합니까?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합니다.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한데요.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이라는 말은 구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입니다. 왜냐하면 이 해가 바로 남유다가 멸망하는 해이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의 왕조가 완전히 끝나는 해입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잡혀가요. 그래서 3절 끝에 보면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라고 기록되어 있죠. 백성들이 잡혀갔어요. 언제요? 시드기야 십일년에.
그런데 바로 그 멸망하는 해까지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곧,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미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레미야가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백성들에게 외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든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서 하나님께 돌아와 멸망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 그 이유 아니겠어요? 이 백성이 멸망하지 않고 평안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한 것이죠.
요시야 십삼 년부터 시드기야 십일년 말까지. 그 기간을 계산하면 약 40년입니다. 40년 세월을 눈물을 흘려가면서 목회를 했는데, 교회가 무너지고 교인들은 잡혀간 겁니다. 얼마나 그것이 통탄스럽고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누구 탓으로 돌릴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다 백성들의 잘못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결국 멸망을 한 겁니다. 비록 예레미야가 백성들을 살리고자 했던 그 사명에는 실패를 했지만, 그러나 누구도 예레미야를 실패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예레미야를 탓할 수 없어요.
그는 위대한 선지자였고, 마지막까지 한 점 부끄럼 없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며 눈물로 사명을 감당한 위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국동제일교회에 예레미야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이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그 길을 가는 결단과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세워져서 30년 40년, 오랜 세월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고 정결한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레미야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40년 세월은 아무런 의미 없는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과 헌신의 본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우리가 결단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우리가 한 사람의 예레미야가 되어서 긍휼한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나라와 민족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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