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지도하시는 분
Notes
Transcript
<새벽설교>
예레미야 10:23-25
“걸음을 지도하시는 분”
2022. 9. 30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걸음을 지도하시는 분”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누군가가 여호와께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기도를 하고 있을까요? 예레미야죠. 오늘 본문 바로 위에 19절은 유다 백성들의 탄식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까요? 먼저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사람의 길, 인생길이죠. 인생길이 사람에게 있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사람이 자기 인생길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 사는데, 사실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23절 말씀을 이어서 보면,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걸음을 지도한다는 것은, 걸어갈 방향을 가르친다는 말이죠. 내 인생길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을 가르쳐주는 자가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르쳐주는 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인데 누가 나를 가르치냐?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지. 내가 좌 하고 싶으면 좌 하고, 우 하고 싶으면 우 하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다수에 포함되지 않아요. 예레미야는 내 길이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 걸음을 지도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고 말해요.
그러면 내 길이 누구 것이라는 말일까요? 누가 내 갈 길을 가르쳐줄까요?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만 말해요.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알죠. 여러분, 누가 내 인생의 주인입니까? 누가 내 갈 길을 가르쳐주십니까?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내 길을 가르쳐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9절에 보면, 잠언 기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사람이 계획을 세우죠.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겠다. 계획을 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요. 그런데 인생이 계획대로 됩니까? 계획대로 안 돼요. 예기치 못하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병이 날 수도 있어요. 농사를 지을 때도 갑자기 가뭄이 온다든지, 또는 태풍이 온다든지 해서 한 해 농사가 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내 인생이라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요, 내가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예요.
내가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해요. 내가 길을 가면서 자기 스스로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그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른 채로 무작정 가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면, 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그 길이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라 해도, 그 길의 끝은 낭떠러지예요. 세상 사람들이 그 낭떠러지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길이 좋으니까, 편하니까 그 길을 그냥 가요. 그러다가 인생길의 끝에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 속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에요. 오늘 본문 위에 22절을 보면, 그런 위급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어요. “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니 유다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승냥이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북방에서부터 적군이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와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군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가 내 인생의 주인이 여호와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 급박한 때에 그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에 우리가 당하게 된 고난이 바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죠. 우리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길을 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따라가고 내 욕망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이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나를 징계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이런 요청을 합니다. 나를 징계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나를 징계하되 너그럽게 징계해달라는 요청을 해요.
24절을 봐 볼까요?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요청입니다. 징계를 하시되 너그럽게, 아예 죽을 정도로 때리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살살 때려달라는 요청이에요.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는 겁니다. 백성들이 살 길은 하나님의 자비뿐이에요. 하나님이 봐주시면 사는 것이고, 여전히 진노하시면 죽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겁니다.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징계를 조금이라도 약하게 해주시라고. 그러면서 예레미야가 또 어떤 기도를 이어서 하는가 하면,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을 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25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요. 25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
주의 백성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진노를 거두어달라고 하더니, 이방 사람들에 대해서는 분노를 부어달라고 요청을 해요. 언뜻 보기에는 마치 유다 백성들에게서 이방 사람들에게로 하나님의 분노를 옮기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다는 좀 봐주시고, 이방인들이 진짜 나쁜놈들이니까 저놈들을 혼내주세요! 하고 중상모략을 하는 것 같죠.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의 기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지금 공정하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요청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지신 속성이죠. 공명정대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세상을 통치하셔요. 악한 자는 벌을 주고, 의로운 자는 복을 주는 것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공의입니다.
그 공의로 이방인들을 심판해달라는 거예요.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이방인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차고도 넘치죠. 주를 알지도 못하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도 않아요. 이것만 해도 심판받아 마땅한데, 여기에 더해서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는 죄를 지었어요. 야곱은 그냥 세상의 흔한 족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죠. 예레미야 10장 16절에 보면, 야곱은 어떤 족속입니까? “하나님의 기업의 지파”입니다. 그냥 흔한 족속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것을 감히 이방인들이 씹어 삼켰어요. 이것은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로 이것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동시에 유다 백성들에 대해서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하는 이유도 바로 이겁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업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의 분깃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멸하지 마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지금까지 참된 목자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잘못된 길을 따랐지만, 이제라도 저들이 누가 내 걸음을 지도하시는 분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예레미야의 이 기도가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방인은 가차없이 심판하라고 하면서 자기 민족은 봐달라고 하는 것이 공평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불공평한 게 아닙니다. 이것 역시도 하나님의 공의예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집 나간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여는 것은 그 아들에게만 있는 특권이에요. 아버지가 품꾼을 위해서 잔치를 열지는 않죠.
분명하게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은 권한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세상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겠죠.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차별을 하실 수가 있냐?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관점이죠. 하나님의 공의 아래서, 의인은 형통하고, 악인은 멸망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시편 1편 6절을 보면 명확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그들을 너그럽게 봐주시라는 요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특권이 있어요. 그 특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특권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축복을 받을 수 있어요.
우리가 그 특권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은 그 특권을 버리는 바람에 이방 사람들과 같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그 특권을 지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모든 은혜와 복을 받아서 당대가 잘 되고, 후대가 잘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