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키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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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새벽설교>
예레미야 4:23-28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2022. 6. 7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본 환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위에 소제목을 보면, “혼돈의 환상”이라고 되어 있죠. 혼돈의 환상을 본 겁니다. 그런데 그 혼돈이 어떤 혼돈인가 하면, 태초의 혼돈이에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 우주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혼돈하고 공허했어요. 창세기 1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 이것이 태초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예레미야가 보았다고 오늘 본문에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봐 볼까요?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예레미야가 땅을 봤더니 혼돈하고 공허하며 빛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그 혼돈과 공허가 지금 이 땅, 유다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 땅이 완전히 뭉개지고 파괴되어서 다 사라져버리고 빛까지 사라져버린 혼돈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유다를 멸망을 시키다 못해서 아예 태초의 공허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셨을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예레미야서나 다른 선지서를 읽을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선지자가 보는 환상이 실제로 본 그대로를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비유나 상징적인 표현을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 모습을 도저히 어떻게 형언할 수가 없어서 문학적인 기법을 통해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내용도 그런 경우입니다. 예레미야가 실제로 태초의 혼돈을 본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환상으로 본 유다의 모습이, 멸망을 당해서 너무도 참혹하고 처참해서, 그 모습이 마치 태초의 혼돈과 공허한 모습과 같다고 문학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예레미야가 21세기 사람이라면, 어쩌면 이렇게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땅을 본즉, 핵폭탄이 터진 듯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더라.” 이런 표현을 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는 자신이 아는 가장 최선의 표현을 한 겁니다. 유다가 바벨론 군대에 휩쓸려서 파괴된 그 모습이 마치 태초의 혼돈과 같이 너무도 처참하고 적막하였다고 묘사한 겁니다.
그러면서 밑에 23절에는 또 이렇게 표현을 하죠.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이것 역시도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산은 일반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안정의 상징이거든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안정과 든든함의 상징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흔들린다는 겁니다. 산이 흔들려요. 큰 산뿐만 아니라 작은 산들까지. 모든 산이 다 흔들립니다. 실제로 지진이 난 게 아니에요. 유다에 임하는 심판이 너무도 무서워서 산들까지도 두려워 떤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25절도 보면요.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사람도 없고 공중의 새까지 한 마리도 없이 다 날아갔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아까 23절에서 태초의 혼돈을 비유했던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과 대조하기 위하여 하는 표현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 사람에게 무슨 명령을 하셨어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렇게 명령을 하셨죠. 사람은 우선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 없다는 겁니다. 유다에 임한 심판이 너무도 강력해서 사람들이 죽고, 또 포로로 잡혀가고 하면서 유다 땅에 남은 사람이 없어요.
물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건 아니죠. 실제로는 화를 피해서 연명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어요. 다만 표현이 그렇다는 겁니다. 전에는 사람이 번성하여 활기찼던 땅이 이제는 가까스로 소수의 사람만 살아남은 황폐한 땅이 되었다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그만큼 심판이 무섭다는 겁니다.
실제로 밑에 27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죽이시지는 않으셔요. 2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사람을 다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남겨둘 자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처럼, 예레미야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하여서 자신이 본 환상을 최선을 다해서 묘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로 유다 땅이 태초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정말로 다 사라진 것이 아니에요. 예레미야의 문학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다에 임하는 심판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겠죠. 예레미야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서 유다의 그 참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유다에 임하는 심판이 너무도 끔찍합니다.
특히 28절 말씀이 너무도 두렵고 떨리는데요. 28절 말씀을 다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다에 임하는 심판이 어찌나 끔찍한지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는 거예요. 그만큼 두려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더 무서운 일은요.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후회하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이 확고합니다. 유다는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너무도 확고해요.
태초의 혼돈과도 같은 멸망이 다가오는데,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지 않으셔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 결과 유다는 실제로 멸망을 당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유다의 이 어리석은 최후를 통해서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오래 참으시지만, 반드시 그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선하심에 기대어서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에이, 선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도 봐주시겠지. 이번에도 용서해주시겠지.’ 하고 헛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일에 고현종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었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주님과 함께라면 지금이 바로 천국이다. 여러분,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행복하고 평안해도,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때가 바로 지옥입니다. 죽어서만 지옥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음을 믿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또한 보혜사 성령이 오늘도 우리를 돌보며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믿는다면, 당연히 믿는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믿기는 믿는데, 사는 모습은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죠.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납하고,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남을 위하여 양보하는 삶. 바보 같다 비웃음을 당할지라도, 여러분, 지는 것이 진정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 내 욕심 다 내려놓고 주님이 사신 그대로, 말씀하신 그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 앞에는 혼돈과 공허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도 끔찍해서 산들이 흔들리며 떨 정도로 두려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결단코 그 심판에 휩쓸려 멸망하지 않으리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로만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으로, 믿는 자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