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의인

예레미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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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5:1-6
“한 명의 의인”
2022. 6. 1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한 명의 의인”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를 담고 있는 단락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어서 예레미야가 대답을 하는 형식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이 하나님의 말씀인데요.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아멘.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은 굉장히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놀랄 수밖에 없는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전에, 하나님이 ‘내가 돌이키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셨거든요. 예레미야 4장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미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유다를 명망시키는 일을 돌이키지 않겠다. 반드시 멸망시키고 말 것이다. 이런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내가 뜻을 돌이키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만약에 의인 한 사람이라도 찾는다면, 기꺼이 내 뜻을 돌이키겠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뜻을 깨트리겠다는 말씀이거든요.
딱 한 사람, 열 명도 아니고 스무 명도 아니라, 딱 한 사람의 의인만 찾는다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깨트리면서까지 마지막으로 주시는 기회입니다. 딱 한 사람, 의인 한 사람만 있다면 용서하리라. 여러분, 지금 주시는 이 기회가 여러분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어려워 보입니까? 아니면 쉬워 보입니까? 한 명이면 됩니다. 유다에 수십만 명이 사는데, 설마 한 명이 없겠어요? 이때 당시 남유다의 인구는 30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 사람들 중에 한 명만 있으면 되거든요. 너무나도 자비로운 조건이잖아요.
과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는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용서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명입니다. 십분의 일. 그만큼 조건이 좋아요. 너무 쉽죠. 한 명이면 되는데.
그런데, 여러분. 그 한 명이 과연 있을까요? 유다 전체를 통틀어서 의인 한 사람이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정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는데, 너무나 허망하게도 이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놓치고 말아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을 수가 있을까? 대단하다면 이것도 참 대단합니다. 그만큼 나라가 완전히 타락했다는 것이죠.
과거에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는 열 명의 의인을 찾으셨지만, 유다에 대해서는 한 명의 의인을 찾으셨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보다, 유다가 더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못해요. 유다에 의인이 열 명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열 명을 기대하지 않으셔요. 그럼 아홉 명? 여덟 명? 아니요. 한 명. 한 명의 의인,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으셔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얼마나 유다에 대해서 기대감이 없으신지를 아시겠죠.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기대가 없으신 거예요. 그만큼 유다가 패역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예레미야는 한 명의 의인을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래서 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이리 찾고 저리 찾고, 의인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해요. 그런데 아무리 찾고 찾아도, 의인이 없어요. 오히려 실망과 좌절만이 차오릅니다.
그래서 3절부터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실망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쏟아냅니다. 3절을 봐 볼까요? 3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이 말씀에 보면, 예레미야가 의인을 찾기 위해서 돌아다니다가 의인은 찾지 못하고, 백성들의 악한 모습만을 발견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백성들의 악한 모습 세 가지를 지금 말하는데요. 하나는 백성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훈계하기 위해서 회초리로 때리는데, 때려도 아파하지를 않습니다. 이방나라의 침략과 가뭄과 기근이 와서 나라가 힘이 들어도, 아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환난이 오면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두려워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어차피 이 환난이 금방 사라지리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항상 평안하다고 거짓 예언을 하느데, 그 예언을 믿기 때문에 환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웬만한 환난 갖고는 이 백성들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악한 모습은, 이 백성들이 징계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여기서 멸하신다는 말은 정말로 멸망을 시키신다는 말이 아니라, 과장법이에요. ‘죽도록 때리다’ 정도의 의미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도록 때리실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이렇게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환난 갖고는 안 되니까 더 큰 환난을 주시는 거죠. 죽을 만큼 힘든 환난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마땅히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이 말은 다시 번역하면, “징계를 받기를 싫어하다”라는 말입니다. 3절 끝에 보면,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라는 말씀이 있는데, ‘싫어하므로’, 라는 말과 ‘받지 아니하고’ 라는 말이 같은 말이에요. 히브리어로 “메아누” 라는 말인데, 싫어하다, 거절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받기를 싫어하다, 징계를 받기를 거절하다’ 라는 말이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를 싫어하고 거절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의 메세지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는 맞기는 맞겠지만, 죄를 뉘우치지는 않겠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엄마가 자식을 회초리로 때리면서 ‘너 잘못했어 안 했어?’ 물어보잖아요? 그런데 대답을 안 해요. 회초리를 때리니까 맞기는 맞아도.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해요. 오히려 대들어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대들고 화를 냅니다.
이런 것처럼, 유다 백성들이 죽을만큼의 환난을 당해도 전혀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더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발견한 두 번째 모습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요. 그들이 돌아오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싫어해요. 자신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서 아무런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죄송한 마음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있을 텐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으니까 흔들림이 없어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이것을 발견한 거예요. 의인은 못 찾고, 백성들의 사악함을 발견한 것이죠. 맞아도 아픈 줄도 모르고, 죽을 만큼 세게 맞아도 뉘우치지 않고, 하나님에게 돌아오기는커녕 더 악한 길로 나가는 그런 악한 모습을 발견한 겁니다.
처음에는 의인 한 명을 발견하기가 쉬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한 명이 없습니다. 악인은 득시글거리는데, 의인은 없어요. 찾으면 찾을 수록, 기대감은 사라지고, 좌절감이 커져 갑니다.
그래서 4절에 예레미야가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이 백성은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다. 의로운 것은 하나도 없고, 무지와 죄악뿐이다. 탄식을 하는 겁니다.
5절에도 봐 볼까요?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좀 나은 줄 알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어요. 그들은 입으로는 여호와의 길을 알고 하나님의 법을 안다고 말해요. 하지만, 그들 역시도 이미 하나님의 멍에를 꺾고 하나님의 결박을 끊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소가 멍에에서 풀려나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죠. 정확하게 밭을 갈아야 하는데, 밭을 갈지 않고 자기 멋대로 풀을 뜯으러 가고, 나무 그늘로 가버려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일반 백성들이나 지도자들이나 도찐개찐이에요. 다 똑같은 악인들입니다. 예레미야가 그것을 깨닫고, 오늘 마지막 6절에서 모든 기대를 잃고,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마지막 6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본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함이니이다.” 아멘.
사자와 이리와 표범이 유다를 죽이며 멸하며 찢어 버릴 것이라고 탄식을 합니다. 여러분, 소가 얌전히 주인의 멍에를 메고 있다면 주인의 보살핌 아래서 평안을 누릴 수가 있을 겁니다. 물론 힘든 밭일을 해야 하지만, 주인은 자비로워서 그 이상의 대가를 줘요.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며 극진히 대접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어서 멍에를 끊고 도망쳐 버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자가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멸하며 표범이 찢는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명의 의인을 찾아서 유다를 구원하려고 노력하던 예레미야가 오죽했으면 이런 무서운 말을 하겠습니까? 어떻게 의인이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을까? 한 명만 있었더라면 그 한 명에 기대를 걸고, 그 한 명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인데, 어떻게 그 한 명이 없을까.
그런데 여러분, 유다만 그럴까요? 우리나라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의인이 몇 명 있을까요? 여수에는 몇 명 있을까요? 우리 교회에는, 의인이 몇 명 있을까요?
저는 우리 교회에 많은 의인이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과신해서는 안 되겠죠. 환난이 올 때, 우리 교회는 평안할 거야, 라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아까 3절에서 유다 백성들이 그랬잖아요.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였다. 여러분, 환난을 우리가 잘 이겨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를 맞았는데 별로 안 아프다고 좋아해서는 안 돼요.
내가 왜 이 매를 맞았는지, 아버지 하나님이 왜 나를 때리시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안에 담긴 메세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에게 찾아오는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지금 나의 가는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인지를 다시 살펴보고, 우리의 신앙의 끈을 다시 바짝 조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멍에를 지고,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나의 가정을 구원하고, 나의 교회를 구원하고, 이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 그 한 사람의 의인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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