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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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4:19-22
“선지자의 고통”
2022. 6. 3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선지자의 고통”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예레미야가 선포한 세 가지 심판 예언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레미야가 세 차례에 걸쳐서 유다 땅에 임할 심판에 대해서 선포를 했는데요. 각각 다른 언어와 표현으로 선포했지만, 결국에 그 핵심은 동일합니다. 재앙이 이제 곧 들이닥친다는 내용이에요. 재앙이 정말 이제 곧 올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재앙에 대항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을 세 차례에 걸쳐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마친 후에는 예레미야가 자신이 선포한 그 내용으로 인해서 슬퍼합니다. 첫번째 예언을 한 후에 한번 슬퍼했었죠.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에 속아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다가 심판을 당하게 된 현실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슬퍼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예언을 연달아서 했습니다.
이제 예언을 마친 예레미야가 다시 또 슬퍼합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창자가 아프고 심장이 뒤틀리는, 그만한 고통과도 같은 슬픔이에요. 그래서 오늘 제목이 “선지자의 고통”입니다. 성경에는 오늘 본문 위에 소제목이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선지자의 탄식” 그런데 오늘 본문은 탄식 정도가 아니에요. 고통에서 나오는 비명입니다.
오늘 본문을 봐 볼까요? 19절에 선지자가 이렇게 비명을 지릅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여러분 지금 예레미야의 고통이 느껴지십니까? 잘 안 느껴지죠. 왜냐하면 번역이 잘못됐어요. 문장 자체가 지금 별로 와닿지를 않아요. 예레미야의 고통이 이 문장으로는 제대로 전해지지가 않습니다.
먼저 “슬프고 아프다” 이 말이 완전히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메아이 메아이” 라는 말입니다. 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됐어요. “메아이 메아이” 메아이는 “나의 창자”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두 번 반복됐죠? 그래서 이 말은 “나의 창자야, 나의 창자야”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배가 아프면 이렇게 소리를 지르잖아요. ‘아이고 내 배야, 아이고 내 배.’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상황의 긴급함을 바로 알 수 있죠. ‘아, 정말 배가 아픈가 보구나. 얼마나 배가 아프면 저럴까.’ 상황의 긴급함, 심각성을 즉각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상황이 지금 너무나 심각해요. 자기 배가,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겨워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의 창자야, 나의 배야’ 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자기 배를 움켜잡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떠올라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뭐라고 돼 있어요? “슬프고 아프다” 완전히 감정이 다르죠. 마치 선비가 뒷짐 지고 하늘을 보면서 얌전하게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슬프고 아프구나....’
왜 우리말 성경이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이로 인해서 예레미야가 느낀 그 고통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영어성경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뜻을 그래도 제대로 전달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마이 바월스, 마이 바월스” 이렇게 번역이 됐습니다. 바월은 창자라는 말이에요. 나의 창자, 마이 바월스, 마이 바월스. 제대로 번역을 했죠.
NASB 버전을 봐도 단어는 다른데 표현은 비슷합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My Soul, my soul!” 내 영혼아 내 영혼아! 창자라는 말에서 더 나아가서 내 영혼이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은 좀 번역상에 오류는 있지만, 그래도 선지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잘 전달이 되고 있죠.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전달이 잘 안 돼요. 그것이 참 아쉽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선지자가 극심한 고통 중에 있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19절을 또 이어서 보면,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가 없다.” 이 말도 보다 히브리어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내 심장이 뒤틀리고, 내 심장이 시끄러워서 잠잠할 수가 없다.” 이런 말입니다.
내 심장이 뒤틀려요. 그리고 심장이 너무도 시끄럽게 쿵쾅거려서 도저히 잠잠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십니까? 배가 너무 아파서 배를 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그 와중에 심장이 막 쿵쿵쿵쿵 빠르게 뛰는 겁니다. 100미터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곧 숨이 넘어가도록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예레미야가 겪고 있는 고통입니다. 예레미야의 고통, 선지자의 고통. 그런데, 여러분. 예레미야가 왜 이토록이나 고통스러워할까요? 왜 창자가 아프고, 심장이 뒤틀릴까요? 19절 후반절에 그 이유가 있죠.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예레미야의 심령, 예레미야의 영혼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시판의 재앙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그 두려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바벨론의 막강한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멸망을 시키는 그 심판이 귀에 들리는 겁니다. 물론 실제로 귀로 들은 것은 아니죠. 환상중에 들은 겁니다.
그러나 어찌 됐든 피할 수 없는 심판이 다가왔어요. 그리고 그 심판을 받아 백성들이 파멸될 것이 너무도 슬프고, 두렵고, 가슴이 아파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니까,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바벨론 군대에 휩쓸리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21절에는 또 어떻습니까?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바벨론 군대의 저 깃발, 저 나팔 소리를 어느 때까지 보고 들을꼬. 제발 좀 저 군대가 전쟁을 멈추고 물러가 줬으면 좋겠는데, 이 유다 땅을 철저하게 짓밟고 멸망을 시키는 장면을 예레미야가 환상으로 다 보고 있는 겁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고통인 거예요. 내가 핍박을 당하면서까지 살리고 싶은 백성들이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멸망에 삼켜지는 것이 예레미야에게 고통입니다.
여러분 그런데요. 유다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는 것이 예레미야에게만 고통일까요? 여러분, 선지자가 고통스러워한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백성을 창세 전에 택하시고 지금까지 돌보아 주신 하나님은 과연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요? 내 백성, 내 신부, 내 아들. 그토록 사랑했던 백성들이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멸망에 처하는 것을 모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오늘 본문 19절부터 21절까지는 선지자의 고통에 대한 내용이라면, 마지막 22절은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하나님게서 탄식하시는 내용이에요.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22절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아멘.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탄식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지켜주셨는데, 정작 백성들은 그것을 몰라요.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돌보심,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악을 행하는 데는 지각이 있어요. 우상을 숭배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데는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기가 막히게 잘 알아요. 그런 백성들이 바로 유다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것을 잘 아는, 그런 백성들이 바로 내 백성이다. 하나님이 탄식을 하시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너무도 고통스러워하면서 소리를 지를 때 하나님이 그렇게 탄식을 하신 거예요.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도 고통스러워요. 예레미야보다 더 고통스러우시죠. 내 백성이니까. 22절에 말씀하시잖아요. “내 백성은” 아무리 그래도 내 백성이에요. 하나님의 백성.
그러나 아무리 내가 아끼는 백성이고, 내 마음이 아프다 할지라도, 이 백성은 구원의 여지가 없습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는, 나를 알고, 나에게 돌아와야만 돼요. 회개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죠.
여러분, 만약에 백성들이 회개를 안 했는데, 구원을 한다면, 이 백성들이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도 영원히 회개를 하지 않겠죠.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오늘도 평강이고, 내일도 평강이고, 계속 평강이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우상 숭배하고, 마음껏 범죄하면서 살아도 되는구나. 계속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이 백성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회개하지 않는 백성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서 창자가 끊어지고 심장이 뒤틀리는 것만 같은 그러한 슬픔과 고통을 느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도 탄식하시며 괴로워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죠.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가족들, 친구들.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여러분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을 위하여서 기도하십시오. 그 가운데 혹시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속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고,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데 지각을 가진, 거룩하고 신실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생이 끝나는 날에 영원한 유황불에 던져지지 않도록, 참된 평안과 기쁨이 있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서 오늘도, 내일도 힘써 기도하며, 그 기도에 응답받는 은혜를 체험하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