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밑바닥

예레미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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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20:7-18
“신앙의 밑바닥”
2023. 2. 28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신앙의 밑바닥”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신앙의 굴곡”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는데요. 누구나 신앙에 굴곡이 있죠. 신앙의 그래프가 위로 올라갈 때가 있고, 또 밑으로 내려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특히 아래로 내려갈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도 그냥 밑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신앙의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오늘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첫 번째 단락은 7절부터 13절까지 단락입니다. 이 단락을 보면, 처음에는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하소연을 하죠. 백성들이 내가 선포한 말씀을 가지고 나를 조롱하고 수군거리는 게 너무 괴로워서 하소연을 합니다. 그러던 중에 회복이 돼요. 지금 내가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고백으로 단락이 잘 끝마칩니다.
그런데 그 바로 뒤에 14절부터 보면, 갑자기 예레미야의 심경이 돌변합니다. 갑자기 그의 신앙이 밑바닥까지 추락을 해요. 오늘 여기에 대해서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4절을 봐 보겠습니다. 14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예레미야가 갑자기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좋았을 것을, 또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금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겁니까?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아서 그날 내가 태어나지 못하게 됐어야 했는데....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이렇게 힘들게 할까?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또 밑에 15절을 보면요.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예레미야가 자기 생일을 저주하더니 이제는 출생 소식을 알리는 자를 저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레미야가 너무한 거죠. 아들이 태어났다고 소식을 전한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저주를 합니까?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은 예레미야가 태어나는데 아무런 관련이 없잖아요. 그냥 예레미야 아빠한테 가서 당신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한 것뿐인데, 저주를 해요. 그것도 아주 심각한 저주를 합니다.
16절을 보면요.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이렇게 엄청난 저주를 하는데요.
그 사람이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으면 좋았겠다고 말을 하죠. 여기서 성읍은 ‘소돔과 고모라’를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않으셨어요. 바로 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 사람도 망했으면 좋겠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저주를 한 거예요.
소식 한번 전했다가 이런 저주를 받았으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이 아니겠습니까?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 이런 끔찍한 저주를 받아야 할까? 이런 너무한 처사를 한 예레미야에 대해서 우리가 의혹의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경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예레미야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단순하게 소식을 전한 사람이 미워서 이런 저주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소식을 전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백성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재앙이 온다는 소식, 멸망이 온다는 소식, 회개하면 회복되리라는 소식. 이러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지금 아버지에게 출생 소식을 알린 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바로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재앙의 소식을 전한 내가 차라리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해버리는 것이 좋겠다. 왜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굳이 전하지 않아도 될 소식을 전하고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가? 차라리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돼.’ 이렇게 자기비관을 하고 자기저주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레미야의 밑바닥입니다. 더 내려갈 곳 없는 절망의 밑바닥이에요.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자기의 선지자 사명까지 저주를 하는, 절망의 밑바닥. 지금 거기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이 사명을 때려치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서 발광을 하고 있어요. ‘내가 이 정도로 힘듭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겠다고 나를 저주할 정도로 힘이 듭니다.’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예레미야와 같은 절망의 밑바닥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밑바닥을 경험해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누구나 밑바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눠집니다.
한 사람은 그 밑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을 저주하고, 남을 저주하며 살아갑니다. 또 한 사람은 그곳에서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와 회복을 맛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의 무엇이 달라서 이렇게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걸까요?
여러분 그 비결은, 사실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에요. 예레미야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또 소식을 전하는 자를 저주했지만, 가만히 보면, 그는 지켜야 할 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선을 넘지 않아요.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낳던 생일은 저주했지만, 자기 어머니는 저주하지 않았어요. 또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한 자는 저주했지만, 자기 아버지는 저주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은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신앙의 그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지켜야 할 선을 분명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 밑바닥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하나님을 원망했죠.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고기가 없다고 원망하고, 길을 멀리 돌아간다고 원망하고. 수도 없이 원망했어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을 저주할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밑바닥에서 다시 올라오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환난과 시험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에게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원망할 수가 있습니까?
잠시 잠깐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서 육신이 곤고하고 괴롭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절대로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선을 지켜야 돼요. 우리는 중심을 지켜야 됩니다.
우리가 바닥을 치고 다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수도꼭지에 잠깐 물이 안 나온다고 성질이 나서 수도관을 끊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영 물이 나오지 않아요. 가만히 물이 나오기를 기다려야죠.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수를 주실 때를 기다려야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생수가 옵니다. 콸콸거리면서 수도꼭지에서 생수가 쏟아지는 때가 와요. 여러분, 그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이 저 밑바닥에 곤두박질쳐 있을 때, 우리가 다시 일어날 길은 오직 생수의 근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회복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가 회복되는 모습이 나와 있진 않지만, 우리는 그가 이 밑바닥에서 다시 바닥을 치고 올라와 온전환 회복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이냐면, 오늘 본문 이후로, 예레미야서가 끝날 때까지 다시는 예레미야가 저주하거나, 탄식하거나, 원망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상황은 변화가 없고, 백성들의 조롱과 핍박이 계속되지만,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시는 신앙의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에,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시험을 이기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심장이 뛰면 심장 그래프가 위로 올라가는 때가 있고, 아래로 내려오는 때가 있어요. 그 그래프가 밑바닥에 있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오잖아요. 여러분, 사람이 언제 죽습니까? ‘띠.....’ 심장이 멈출 때 죽는 것입니다. 위로도 올라가지 않고, 아래로도 내려가지 않고, 가만히 멈춰 있을 때 죽는 겁니다.
위로 올라가든지 밑으로 내려가든지, 반응이 있어야 돼요. 은혜를 받아서 은혜의 보좌 앞에 올라가든지, 혹은 시험이 들어서 예배를 멀리하고 세상으로 내려가든지. 여러분, 이것은 자연스러운 신앙의 굴곡입니다. 언제나 올라가지만은 않아요. 내려가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굴곡이 사라지고 정지해 있는다면, 그는 죽은 것입니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수도 있죠. 자기 자신을 저주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을 넘을 때 우리의 신앙이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여러분 주위에 신앙의 박동이 멈춘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의 신앙이 다시 뛰게 만들어야 합니다. 병원에서 심장이 멈춘 사람을 어떻게 살립니까? 전기충격을 줘서 살리죠. 심장이 다시 뛰라고 전기충격기로 충격을 줘요.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이 신앙이 멈춰있다면 그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는 기도충격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오직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기도로써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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