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두 번째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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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12:1-6
“예레미야의 두 번째 탄식”
2022. 10. 18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예레미야의 두 번째 탄식”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두 번의 탄식 중에 오늘은 두 번째 탄식인데요. 첫 번째 탄식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자기 고향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보복하여 주시라는 하소연이었죠.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고향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해요. 그것도 그냥 죽이는 데서 끝이 아니라, 아예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말살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처참했겠습니까?
예레미야가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보복하시는 것을 내가 보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칼과 기근으로 죽여서 남는 자가 없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레미야가 이어서 두 번째 탄식을 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탄식인데요.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정하심과 정의로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아래에서 모든 사람은 공정하고 공평한 심사를 받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시편 106편 3절을 보면, 시편 기자가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노래처럼, 복을 받는 자는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만약에 공의를 어긴다면, 그 자는 절대로 복을 받지 못해요.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공의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어요. 오늘 본문 1절을 봐 볼까요?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을 무슨 까닭이니이까?”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죠? 하나님은 분명히 의로우신 분이신데, 왜 악인들이 형통합니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으 벌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도대체 왜 악인들이 형통하며 평안함을 누립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예레미야의 두 번째 탄식이에요.
도대체 세상이 왜 이런가? 여러분, 왜 그럴까요? 왜 악인들은 죄를 범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의인들은 왜 고통을 당할까요? 사실 이런 질문은 옛날부터 계속 있어 왔습니다. 예레미야만 한 게 아니고, 과거에 하박국 선지자도 했고, 그보다 더 먼 과거에는 욥도 했어요. 욥기 12장 6절에 보면, 욥이 이렇게 탄식을 하는데요.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욥이 무슨 말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강도의 손에 후히 주셨기 때문에 강도가 형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했어요. 하나님이 강도를 형통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성모독적인 말이에요. 하나님이 강도에게 형통함을 주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강도를 사랑하신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이 이어지게 되거든요.
여러분, 하나님이 강도를 사랑하실까요? 하나님이 악인들을 아끼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악인들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오직 공의를 지키는 자들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러면 왜 악인들이 형통할까? 예레미야가 답답한 것이 바로 이겁니다. 왜 지금 악인들을 망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 하도록 내버려 두실까? 지금 빨리 악인들이 망해야 이 땅에 정의가 바로세워지고, 의인들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이 나라가 멸망할 일도 사라질 텐데, 왜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실까?
예레미야는 사역을 시작한 뒤로 쭉 모든 관심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하는 탄식도 나라를 살리기 위한 거예요. 이놈의 악인들이 빨리 정리가 돼야 나라가 살 텐데, 그렇지를 않으니까 나라가 희망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개입을 하셔서 좀 손을 봐주셔 되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답답하죠.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악인들을 고발합니다. 빨리 처벌을 받게 하려고 고발을 해요. 2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아주 신랄하게 고발을 합니다. 주께서 악인들을 땅에 심으셔서 그들이 장성하여 열매를 맺으면서 형통하는데, 그들은 입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위선자들이라고 고발을 해요.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입으로만 찬양하고, 예배하고, 그러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밑에 3절에서 그들을 처벌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예레미야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요청을 하죠.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마치 양떼 속에서 도살할 양을 구별하듯이, 이 땅에서 악인들을 구별하여 죽이시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3절을 다시 보면,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먼저 하는 말이 있죠.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여기에 보면, 동사가 세 개 있어요. 아시고, 보시며, 감찰하시오니. 이것들은 모두 뭔가를 심도 있게 살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부터 아셨어요. 그리고 지금도 보고 계시며,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낱낱이 감찰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에 2절에 있는 악인들과 자신을 대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에요. 2절에서 악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입으로는 주께 가까우나 마음은 먼 자들이죠. 겉과 속이 달라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지 않죠. 그의 속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보시며 감찰하심으로 말미암아 속속들이 알고 계셔요. 절대로 겉과 속이 다를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당당한 겁니다.
‘하나님, 저는 악인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입으로도 주께 가깝고 마음으로도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악인들을 처벌해달라고 하는 이유는 저의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어서 속히 저 악인들을 구별하여 주십시오.’
이러한 마음으로 예레미야가 오늘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죽어야 나라가 살아요. 악인들이 망해야 민족이 회복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 그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예레미야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지극히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와 질서가 제대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가 아니잖아요. 당연히 들어주실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예레미야의 요구를 들으신 하나님이 어떤 대답을 하십니까? 굉장히 뜬금없는 대답을 하셔요. 5절을 봐 볼까요?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뜬금없는 대답을 하시는데, 굉장히 듣는 사람 복장 터지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쉽게 말해서 이런 말이에요. ‘너, 겨우 이런 것 같고 그렇게 힘들면 나중에는 어떡할래?’이런 말이에요.
사람이랑 달려도 그렇게 피곤하면 나중에 말하고는 어떻게 달릴래? 또 평안한 땅에서도 그렇게 불만이면, 나중에 요단 강물이 넘칠 때는 어쩌려고 그래? 이런 말씀을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앞으로 예레미야에게 닥쳐올 더 큰 고난들을 암시하는 말씀이에요. 지금 예레미야는 고향 사람들의 살해위협을 알고 괴로워하는 상황인데, 이보다 더 큰 일들이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 많은 일들 중에서 구체적으로 한 가지 예시를 하나님이 드시는데요. 6절을 봐 볼까요?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갈 수록 가관이죠. 고향 사람들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가족들이 내 뒤통수를 친다는 겁니다. 고향사람들이 배신한 걸로도 그토록 괴로웠는데, 가족들이 배신하면 얼마나 더 마음이 찢어질까요?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더 기다리고 있어요. 민족을 살리고자 하는 사역의 길이 너무나도 험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역의 길이 그렇습니다. 험난한 길이에요. 의인들이 망하고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서도 의인들과 함께 망하는 길을 가는 겁니다. 그냥 믿음 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교회 때문에 보는 손해 안 보고, 지금보다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감수하고, 심지어 가족들의 핍박까지도 감내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자의 사명을 가졌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사역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섬기는 봉사자. 모두가 다 사역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역자로서 험난한 이 길을 끝까지 경주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우리는 보행자와 달리고 있어요. 지금 내가 당한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이 이 뒤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말과 경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능히 말보다 빨리 달려 승리하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보시며 우리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악인들이형통할지라도, 겉과 속이 다른 악인들은 반드시 흩날리는 겨와 같이 멸망할 것이고, 우리들은 욥과 같이 갑절의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공의 아래에서 반드시 악인들은 멸망하고, 의인들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마음속에 들어있는 믿음을 지키고, 악인들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한 명의 사역자로서 공의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