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잠
Notes
Transcript
<새벽설교>
예레미야 31:23-26
“단잠”
2023. 8. 1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단잠”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어젯밤에 다들 단잠을 주무셨습니까? 잠자리가 평안하셨어요? 사실 잠을 잘 자는 것만 해도 복입니다. 잠을 잘 못 자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나라가 유독 불면증이나 수면부족이 많은 것 같습니다.
2019년도에 프랑스의 한 조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면시간이 가장 적다고 합니다. 미국, 중국, 일본, 영국,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여러 나라들 중에 한국사람들이 잠을 가장 적게 잔대요. 일을 많이 해서 적게 자는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잠을 자려고 누워도 잠이 안 온다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불면증이 심해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불면증이 있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잠을 못 자는 이유가 뭘까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생활습관이나 환경 문제도 있을 것이고, 지금 먹고 있는 약 때문일 수도 있고, 또 호르몬 문제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스트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약이 없어요.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면 약을 먹으면 되는데, 스트레스는 심리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약이 소용이 없습니다. 약을 써도 일시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해결을 해야 되는데, 과연 어떻게 해야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심리전문가도 아니고, 심리치료사도 아니라서 과학적인 방법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방법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가 단잠을 잤다고 말을 하는데요. 오늘 본문 26절을 먼저 봐 볼까요?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예레미야가 내 잠이 달았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식 표현인데요. 잠이 달다는 말은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어서 단잠을 잘 만큼 평안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상징적인 표현이죠.
그러데 재밌게도 우리나라도 이런 표현을 하죠. 아침에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하잖아요. “너 잘 잤어?” 이 말은 실제로 잘 잤는지를 물어보는 말이기도 하지만, 간밤에 평안했는지를 묻는 의미가 있어요.
예레미야가 지금 하는 말도 마찬가집니다.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임과 동시에, 실제로 단잠을 잤다는 거예요. 자고 일어났더니 아주 개운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예레미야의 삶을 보면, 단잠을 잘 수 있는 삶이 아니거든요.
예레미야의 별명이 뭡니까? “눈물의 선지자”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생을 한 선지자예요. 그런데 어떻게 단잠을 자겠습니까? 자려고 누웠다가도 가슴이 답답해서 못 자고, 억울해서 못 자고.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스트레스가 가장 많은 선지자 2위가 바로 예레미야였을 거예요. 1위는 누구였을까요? 모세였겠죠. 20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관리하느라 스트레스가 극심했을 겁니다. 그런 모세 다음으로 아마도 예레미야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불면증을 달고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단잠을 잤다는 거예요.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예레미야도 놀란 거죠. 평상시에 잠을 잘 잤으면 굳이 이런 말을 성경에 기록했겠습니까? 그런데 평상시에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에, 단잠을 잔 것이 너무 특별한 겁니다. 그래서 놀라서 말을 하는 거예요. “내 잠이 달았더라.”
자, 그렇다면 과연 예레미야는 어떻게 이렇게 단잠을 잘 수가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한 남유다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회복의 말씀인데요. 지난 시간까지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죠. 북이스라엘, 에브람을 향한 말씀이었다면, 이제 오늘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 2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아멘.
남유다를 향하여서 주시는 회복의 메세지인데요. 북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제가 전부터 계속 예레미야서의 회복의 핵심이 뭐라고 했죠? “돌아가다” 라는 말이라고 했어요. 돌아가다. 히브리어로 “슈브”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말은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다시 돌아갈 장소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이 과거에 본래 있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장소를 말함과 동시에 그들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살던 고향 땅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그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신앙을 다 잃어버렸어요.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우상에게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올 때에, 그들의 언어가 함께 회복이 되는데요. 23절 말씀을 다시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그들의 언어가 회복됩니다.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그들이 지금은 쓰지 않고 있는 말들을 다시 쓰게 된다는 겁니다.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이 말은 예루살렘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좁게는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우리의 고향을 다시 의로운 처소요, 거룩한 산이라고 다시 부르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직은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은 예루살렘이 우상으로 가득차 있고, 이제 조금 있으면 적군에 의해서 짓밟힌 황폐한 땅이 될 운명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8장 1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예레미야 8장 19절에,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이것은 백성들의 탄식과 하나님의 탄식이 한번씩 기록된 것인데요. 먼제 백성들이 탄식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이렇게 백성들이 탄식을 합니다.
그동안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멸망을 당하게 되니까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시온이 계시니 않는가?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로 가셨는가? 우왕좌왕 하면서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자 뒤이어서 하나님께서 탄식을 하시죠.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나님께서 시온을 떠나신 이유가 나오죠. 백성들이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기 때문에 시온을 떠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시온이 의로운 처소인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더이상 의로운 처소일 수 없어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하나님이 떠나셨고, 그래서 시온이 황폐한 처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더이상 예루살렘을 의로운 처소라 부르지 않고, 거룩한 산이라 부르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그동안에 쓰지 않던 말을 다시 사용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시 이 땅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이 땅이 다시 의로운 처소가 되고, 백성들은 다시 이 땅을 의로운 처소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말을 하게 되는데요. 23절에 끝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축복을 하고 있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이 단순히 번성하고 부흥하기를 원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영적인 회복을 갈망하는 말입니다.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했을 때 여기서 “복”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바라크”라는 말인데요. 예레미야 17장 7절에 보면, 바라크가 사용됐어요. 예레미야 17장 7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아멘.
바라크, 복을 받을 것이라. 그런데 누가 복을 받는 겁니까?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복을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말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곧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땅이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복을 받으니까.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예루살렘의 온전한 영적 회복을 의미해요. 단순히 백성들이 이 땅에 돌아와서 번성하는 차원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영적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이 이루어지는 날에 마침내 온 백성이 함께 모여 공동체의 회복을 이루게 되는데요. 24절 말씀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 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에 함께 살리니.” 아멘.
공동체의 회복은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넘어서 모든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24절에서는 농부와 목자를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들은 경제활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농부들이 와서 농사를 짓고, 목자들이 와서 양 떼를 키움으로서 나라의 가장 기초적인 경제활동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는 곧 나라가 기초부터 바로선다는 것을 의미해요. 백성들이 잠시 잠깐 고향에 돌아오는 게 아니라. 아예 머물러 살 수 있는 인프라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 모든 회복의 말씀을 듣고 나서 아주 마음이 평안해졌어요. 스트레스가 사라진 거죠. 25절 말씀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아멘.
예레미야의 심령이 상쾌하게 되고, 또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가 사라지니까 너무나도 상쾌해진 겁니다. 그동안에 예레미야의 스트레스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아서 멸망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 스트레스였죠.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핍박과 조롱을 당하는 것도 스트레스였어요.
그런데 이제 그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사로잡힌 땅에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을 경배하며 신앙을 회복하고, 다시 거룩한 언어로 고백하며 다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그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니까 자연적으로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단잠을 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단잠을 잘 수 있는 성경적인 비결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바로 그 비결입니다. 예레미야는 확신을 가졌어요. 반드시 이 민족이 회복되리라.
사실 아직 그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심지어 아직 남유다가 멸망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멸망을 하고 또 그 뒤로 70년의 유배생활이 끝나야만 회복이 이루어져요. 아직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있습니다. 이 긴 동굴을 몇 십 년을 더 가야 돼요. 하나님이 회복의 메세지를 주셨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죠. 아직도 동굴 속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그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믿게 되니까 그의 심령에 쌓여있던 근심과 걱정이 사르르 녹아버리고, 자기도 놀랄 정도로 단잠을 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을 때에 단잠을 잘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의뢰할 때에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를 회복시키겠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상쾌한 심령으로 아주 달고 맛있는 단잠을 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