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히 죽으라

예레미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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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34:1-7
“평안히 죽으라”
2023. 10. 2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평안히 죽으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회복의 책이 끝난 뒤에 다시 예루살렘이 처한 현실과 그들의 최후에 대한 예언이 시작되는 단락입니다.
지금 배경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해놓고 그 주변의 다른 도시들을 먼저 하나하나 함락시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황이죠. 그런데 이때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슴을 전합니다. 과연 무슨 말씀을 전할까요?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리라는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그게 아니죠.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불탈 것이며, 시드기야 당신은 바벨론 왕 앞에 끌려가서 죽으리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을 왕 앞에 가서 전해요.
자,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봐볼까요? 지금 상황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말씀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바벨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 겁니다. 이때 당시에 바벨론과 유다는 비교가 안 되는 격차가 있었어요. 바벨론이 갖고 있는 군대의 10퍼센트만 보내도 충분히 유다는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전군을 다 동원했어요. 자기 군대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속한 속국의 군대들까지 동원을 했습니다. 남유다 하나를 함락시키기 위해서 그야말로 절대적인 군대를 투입한 겁니다.
그래서 유다는 어떻게 손도 제대로 못 써보고 계속 져요. 도시들을 다 뺏기고 뺏기고 하다가 결국에는 딱 세 개의 도시가 남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7절을 봐 볼까요? 7절에 보니까, “그 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
도시가 딱 세 개 남았어요. 예루살렘, 라기스, 아세가. 이 외에는 다 뺏겼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누가 봐도 승패가 명확해요. 누가 봐도 바벨론이 이긴 게임입니다. 유다가 이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승산이 없다고 해도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는데,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봐야죠.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싸워봐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때 당시에 시드기야가 애굽에 사자를 보내서 원군을 요청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또, 또 예레미야가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전부터 계속 예레미야가 전했던 말씀을 또 똑같이 전하는 거예요. 그 말씀이 듣기 싫어서 전에 예레미야를 어떻게 했었습니까?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가둬버렸잖아요. 이것이 예레미야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32장 3절부터 5절까지 보면,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또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이런 말을 왕의 면전에 대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왕이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고 화를 내면서 가둬버렸어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또 와서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봐 볼까요? 2절에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가서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이것이 무슨 말씀이에요? 패배예언이죠.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어간다. 그리고 이 성이 불탈 것이다. 이런 말을 시드기야 앞에 가서 하는 겁니다.
또 밑에 3절에는요, “네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손에 넘겨져서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의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
전쟁에 패배하고 나면 왕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거기서 바벨론 왕을 대면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네 눈으로 직접 바벨론 왕을 보고, 그와 직접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이전에 했던 예언과 똑같아요. 그런데 이 다음 내용부터는 다릅니다. 원래는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칼에 맞아 죽으리라고 예언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으리라고 예언을 해요.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러나 유다의 시드기야 왕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조상들 곧 선왕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슴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시드기야 왕의 최후에 대한 예언이 상당히 좋게 바꼈습니다. 비록 바벨론에서 죽게 되겠지만,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으리라는 거예요. 여기서 “평안히” 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베 샬롬” 이라는 말인데, “평강 속에서”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평강 속에서 죽으리라는 거예요.
이것은 그가 고문을 당한다거나 수치를 당하는 일 없이 나름대로 왕으로서 대우를 받고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으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패망한 나라의 왕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대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죠. 또 어떤 대우를 받습니까? 바벨론에 잡혀간 백성들이 시드기야를 위해서 분향을 해주고 애통해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가 죽어서 시체를 장사 지내는데, 조상들 곧 선왕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분행을 해요. 남유다의 역대 왕들 중에서 악한 왕들은 분향을 받지 못했거든요. 대표적으로 여호람이 그랬어요. 역대하 21장 19절에 보면, 그가 심한 병으로 죽었는데, 백성들이 그에게 분향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어떻습니까? 분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또 백성들이 애통하며 곡을 한다는 겁니다. 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마지막 왕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좋은 대우를 받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은혜입니다. 평생 악을 행하여 나라를 멸망에 처하게 만든 왕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이 예언은 성취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어요. 바로 지금이라도 바벨론에 항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항복한다면, 평안히 죽을 수 있고, 또 분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거예요. 시드기야로서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연히 이 기회를 잡아야 돼요. 만약에 이 기회를 놓치면 죽는 것도 고통스럽게 죽고, 죽은 뒤에도 분향을 받지 못하고 영원히 불명예로 그의 이름이 저주받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하나님은 시드기야에게 평안히 죽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벨론에 항복함으로써 백성들이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게 한다면, 왕으로서 마지막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씀하셔요. 항복하기만 하면 백성들이 죽을 필요가 없죠. 성문을 열어주고 바벨론 군대 앞에 엎드려서 항복하면 왜 죽이겠습니까? 비록 바벨론의 멍에를 메고 노예로 살기야 하겠지만, 목숨은 보존할 수 있어요.
이것은 유다를 아주 멸하시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심판이 닥치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계속 기회를 주셔요. 회개할 기회, 재앙을 돌이킬 기회, 다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기회.
예수님 옆에 같이 매달렸던 강도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정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지금 그래도 예루살렘, 라기스, 아세가, 세 도시는 남았어요. 지금 기회를 잡으면 그래도 이 세 도시는 보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그 기회를 놓쳤어요. 끝내 항복하지 않고 불쌍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그리고 본인은 구차하게 도망쳐서 여리고 평지에서 붙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눈앞에서 아들들이 죽는 것을 보고, 그 뒤에 두 눈이 뽑히고 놋사슬에 결박된 채로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혔습니다. 끔찍한 최후죠.
그러나 그것을 어디다 하소연하겠습니까? 다 자기가 선택한 결괍니다. 그는 분명히 평안히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 그 전에도 무수히 많은 기회가 있었어요. 회개하고 돌이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기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예레미야가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서 말씀을 선포했잖아요.
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선지자를 가두고 조롱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말씀을 등한시한 결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합니다. 이번 버스 놓치면 다음 버스 타면 되지. 이게 아니에요. 어쩌면 이 버스가 내 인생의 마지막 버스일 수 있습니다. 다음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마지막일 수 있어요.
우리는 항상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인생의 종말이 닥칠 수 있어요.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절반도 못 살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담임목사님도 항상 말씀하듯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내 인생의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앞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말씀이든지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붙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마지막을 생각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충성하며, 하루를 일년처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지혜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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