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표를 세우라

예레미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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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31:21-22
“이정표를 세우라”
2023. 7. 28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이정표를 세우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보통 우리가 어딘가를 찾아갈 때 이정표를 보고 가죠. 요새는 네비게이션이 잘 돼있어서 이정표를 잘 안 보기도 하지만, 길을 찾는데 있어서 이정표가 있고 없고가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납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여기서는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이정표가 없이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정표를 세웁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정표를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정표를 세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는데요. 먼저 21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정표를 세우라고 하시고 또 푯말을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정표는 본래 비석을 가리킵니다. 비석이 뭡니까? 돌에다가 글씨를 써논 것이 비석이죠. 큰 돌이나 바위에 글씨를 써서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는 겁니다. 이것을 세우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보고 길을 찾을 수 있게 하라는 겁니다.
또 푯말은 히브리어로 “타므루림”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기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둥을 세우라는 거죠. 그것도 그냥 기둥이 아니에요. 방향을 알려주는 표시가 새겨진 기둥입니다. 그런데 이 타므루림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 하면, “타마르” 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타마르. 타마르는 종려나무를 뜻해요. 종려나무의 특징이 있죠. 키가 크고, 줄기가 곧게 쭉 뻗었어요. 종려나무가 야자수의 일종 아닙니까? 여기 옆에 있는 게 야자순데 종려나무가 비슷하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본래 고대사회에서는 종려나무를 푯말로 사용을 했던 겁니다. 종려나무가 키가 커서 눈에 잘 띄니까. 아마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어, 거기 가면 키 큰 나무가 하나 있을 거야. 그 나무에서 해 지는 쪽으로 반나절 가면 돼.’ 이런 식으로 종려나무를 길을 찾는 기준으로 삼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종려나무처럼 키가 큰 기둥을 만들어서 보다 정확하게 방향을 표시하게 됐겠죠.
지금 하나님께서 이 푯말을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정표를 세울 뿐만 아니라 푯말까지 만들라는 거예요. 이것은 너희가 길을 잃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세워주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연 이 이정표와 푯말이 어디를 가도록 하는 것인가, 입니다. 이정표와 푯말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21절 후반절을 다시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이 말씀에 보면, 이정표와 푯말이 어디를 가게 합니까? “전에 가던 길”이죠. 전에 가던 길. 전에 가던 그 길을 통해서 성읍들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봤을 때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가리킵니다. 포로에서 풀려나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방황하지 않고 잘 돌아올 수 있도록 이정표와 푯말로 그 길을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진 영적인 의미를 봐야 돼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에게, 아세라에게, 온갖 잡신에게 가서 방황하던 인생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린 거죠. 너무 멀리 가서, 또 너무 오래돼서. 길을 잊어버렸어요. 이때 뭐가 필요합니까? 이정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길을 잊어버려도 이정표가 있으면 금방 다시 찾을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정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이정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이정표,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죠. 오직 말씀만이 우리 인생의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이정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정표 하나로는 안 돼요. 또 푯말을 만들어야죠.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가 말씀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정표를 세우고 푯말을 만들듯이,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어야 돼요. 그래야만 올바르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씀을 이정표 삼아서 나에게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을 다시 보면, 맨 처음에 이스라엘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처녀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셔요. 이 말은 예레미야 31장 4절에서 부르셨던 이름입니다. 예레미야 31장 4절을 봐 볼까요?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아멘.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과거에 처녀와 같았던 순수하고 순결한 영으로 회복시키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음란한 여인과 같이 되어버렸지만,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려주겠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도 네가 이정표를 따라 나에게 돌아오면, 네가 순결한 영으로 회복되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돌아가야겠죠. 이정표만 세워놓고 안 돌아가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또 돌아가려고 해도 이정표가 없으면 돌아갈 수가 없어요.
반드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서 나아갈 방향을 알고, 또 의지를 가지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돌아갈 수 있어요.
만약에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반역한 딸”이라고 부르시는데요. 2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아멘.
반역한 딸. 이스라엘의 이름입니다. 아까 21절에서는 뭐였어요? “처녀 이스라엘” 똑같은 이스라엘인데 한번은 처녀라고 부르고, 또 한번은 반역한 딸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과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스라엘을 의미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났었죠. 그래서 반역한 딸이 됐어요. 이것은 현재의 모습입니다. 아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어요. 여전히 떠난 그대로 방황하고 있어요. 그래서 반역한 딸이라는 이름은 지금 이스라엘이 가진 이름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때 처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다시 갖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계속 반역한 딸로 살다가 반역한 딸로 죽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죠. 하나님도 애가 타서 말씀하시잖아요.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이제 그만 방황을 끝내고 돌아오라는 거예요.
만약에 너희가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리라고 뒤에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인데, 특별히 “새 일을 창조”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창조죠. 하나님께서 세상에 새창조를 이루셔요.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는 일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는 일을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해석상의 문제가 생기는데요. 도대체 여자가 남자를 둘러싼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 달라요. 크게 네 가지 견해가 있는데요. 시간관계상 다 다룰 수는 없고 그 중에 가장 문맥상 자연스럽고, 정답에 가까운 견해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이 말은 여자인 이스라엘이 남편인 하나님께 돌아와 관계가 회복되리라는 말입니다. 반역한 딸, 집 나간 아내가 돌아와서 남편을 둘러싸는 거예요. 끌어 안는 거죠.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라는 말에 아무런 수식어나 관사를 붙이지 않았어요. 그냥 일반명삽니다. 여자. 그런데 여기에 앞에 무슨 말이 붙느냐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거예요. 처녀라는 말이 붙을 수도 있고, 반역이라는 말이 붙을 수도 있어요.
처녀가 붙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온 순결한 여자가 되는 것이죠. 반대로 반역이 붙으면요? 여전히 하나님을 반역한 여자로 남는 겁니다. 만약에 계속 방황하면서 돌아오지 않으면 끝까지 반역한 여자로 남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창조를 체험하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새창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시제가 완료형입니다. “창조하였나니” 이미 창조를 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창조를 이루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독특한 어법이에요. 전에도 몇 번 설명을 드렸는데요. 이것을 “예언적 완료”라고 합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인데,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완료형으로 쓰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하고 일본하고 축구시합을 한다고 했을 때, 한국이 5:0으로 이기고 있다고 해볼까요? 그런데 지금 후반전 40분입니다. 5분만 있으면 경기가 끝나요. 그러면 이때 사람들이 뭐라고 말을 합니까? “한국이 이겼네? 이거는 한국이 이겼어.”
아직 시합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다 끝난 것처럼 말을 하는 거죠. 아직 시간이 5분 남았어요. 그런데 그 5분 안에 일본이 5골을 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한국이 이기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한국이 이겼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새창조를 아직 이루시지는 않았지만, 새창조를 이루실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완료형으로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셨다.” 선언하는 겁니다. 이것을 예언적 완료라고 하는 거예요.
자,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새창조를 누가 체험할 수 있느냐?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온 처녀 이스라엘만 체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그 새 일을 돌아온 여자만 맛볼 수 있어요.
내가 과거에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던 그 길을 마음에 두고, 이정표를 따라 푯말을 따라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님께로 돌아오는 그 사람만이 신랑되신 주님의 신부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짓고, 얼마나 파렴치한 모습으로 살았든지, 그 모든 것은 새창조 앞에 다 사라집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반역한 여자에서 처녀로, 깨끗한 심령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주의 길을 마음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정표로 삼고 푯말로 삼아서, 혹시라도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로 빠지지는 않는지, 말씀에 비추어 다시 방향을 점검하고, 오늘 하루도 말씀을 따라 주님 계신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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