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예레미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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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38:1-6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2023. 12. 15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앞 장인 37장 11절부터 21절의 내용과 굉장히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구덩이에 갇혔다가 시드기야 왕의 명령으로 구덩이에서 나오게 되는 내용인데요. 이 내용이 38장에 거의 비슷한 형태로 다시 나옵니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해요. 어떤 학자들은 37장과 38장이 같은 사건을 두고 각각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고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두 사건이 서로 다른 별개의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을 하는 쪽인데요. 37장의 사건과 38장의 사건을 같은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세부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요. 예레미야가 붙잡히게 된 이유도 다르고, 갇힌 구덩이의 이름도 다르고, 구덩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과정도 다릅니다.
똑같은 사건을 굳이 이렇게까지 다르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따라서 이것은 하나의 사건을 두 번 반복해서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각각 다른 별개의 두 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예레미야가 서기관 요나단의 집 웅덩이에도 갇혔었고, 그 이후에 또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도 갇힌 겁니다.
이렇게 유사한 두 사건을 연속으로 기록을 해놨어요. 아마도 이 두 사건은 시간적으로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을 겁니다.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갇혔다가 빠져나와서 곧바로 다시 다른 구덩이에 갇혔던 것은 아닐 거예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다른 구덩이에 갇혔을 겁니다.
그런데도 마치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가 곧바로 다시 갇힌 것처럼, 두 사건을 바로 이어서 기록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볼 수가 있어요. 첫번째는, 예레미야가 사역을 하면서 얼마나 심한 고난과 핍박을 당하였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시드기야 왕의 우유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갇힌 사건을 연속으로 기록을 한 겁니다. 저는 오늘 이 두 가지 이유 중에서 두 번째 이유에 초점을 놓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얼마나 우유부단한 왕이었는가? 우리는 시드기야의 모습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을 함께 살펴볼 텐데요.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가서 보면, 예레미야가 다시 구덩이에 갇히게 된 배경이 나오는데요. 1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그것을 듣고 있는 네 명의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맛단의 아들 스바댜,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 셀레먀의 아들 유갈,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 이렇게 네 사람이 가만히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있었어요.
예레미야가 무슨 말씀을 선포했습니까? 밑에 2절과 3절이 그 말씀이죠. 짧게 간추리면 이런 말씀이에요. ‘우리가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고, 안 하면 죽는다. 우리는 반드시 바벨론에 패배한다.’
여러분, 이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정말 누가 들어도 매국노의 말 아닙니까? 과거에 일제시대 때 누가 국민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일본에 항복하면 살고, 안 하면 죽습니다. 우리가 다같이 일본에 항복하고, 일본을 섬깁시다!’
이러면 국민들이 그 사람을 가만 두겠습니까? 몰매를 때려 죽이겠죠. 저 친일파 앞잡이를 죽이자고 난리가 날 겁니다.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가 그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 뿐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이 듣기에는 나라를 팔아먹는 말로 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1절에 등장한 네 사람이 왕에게 가서 예레미야를 매국노로 고발을 합니다. 그게 4절 내용이에요.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네 명의 고관들이 시드기야 왕에게 찾아가서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요청을 해요.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런데 여러분, 지금 고관들이 하고 있는 말에 보면, 예레미야를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이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런데 사실 히브리어 단어를 보면, “이 사람”이라고도 안 했어요. 정확한 뜻은 “이것” 입니다. 이것.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죠.
그러니까 예레미야를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거예요. “이것을 죽이십시오.” 하나님의 선지자를 어디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 취급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시드기야 왕이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5절에 보니까,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왕의 대답히 상당히 힘이 없어 보이죠.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왕이 굉장히 무기력해요.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시드기야의 왕권이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도 그럴 게, 시드기야는 정상적으로 왕이 된 사람이 아니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와서 무단으로 세운 왕이에요. 바벨론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왕권이 약할 수밖에 없어요.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그런데 이 말 바로 앞에 왕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이미 예레미야의 목숨이 너희 손 안에 있다는 말이에요.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예레미야를 죽이는데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려면 죽여라. 이미 너희 손 안에 있지 않냐. 하지만 나는 거기에 관여하지 않겠다.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런 의미인 것이죠.
우리는 여기서 그의 우유부단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왕으로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스스로 뭔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신하들에게 다 맡겨버려요. 아무리 왕권이 약하고 내가 힘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왕이잖아요.
신하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재판도 없이 무단으로 사람을 하나 죽이자고 하는데, 그것을 그냥 놔둡니까? 그러면서 또 자기는 피해를 받고 싶지 않으니까 슬그머니 그 책임에서 빠져요. ‘나는 몰라. 너희가 알아서 해. 너희 손에 있잖아.’ 이것은 왕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럴 거면 차라리 그냥 밑으로 내려오든가. 그렇지 않습니까?
시드기야가 나 몰라라 하니까 결국에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6절 말씀인데요.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졌는데, 그 구덩이가 무슨 구덩이입니까?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죠. 여기서 왕의 아들이라는 말은 시드기야 왕의 친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왕실에 속한 왕족이라는 말이에요. 왕궁에 왕족이 많이 있었겠죠. 그 왕족 중에 말기야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집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바로 그 구덩이에 예레미야를 가둔 겁니다.
그런데 그 구덩이가 너무 깊어서 던지면 죽을 것 같으니까 줄로 달아서 내렸어요. 또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구덩이는 본래 우물이었는데, 지금은 물이 다 마르고 질척질척하게 진창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거기에 예레미야가 갇혔어요.
이전에 갇혔던 구덩이와 거의 흡사한, 깊고 습한 구덩이에 다시 또 갇힌 겁니다. 분명히 이전에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빼내주었었거든요. 왕의 명령으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빼냈는데, 그 명령이 내린지 얼마나 됐다고, 신하들이 무시하고 다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가둔 거잖아요.
아무리 힘없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죠. ‘야, 내가 직접 예레미야와 얘기를 나누고 혐의가 없어서 구덩이에서 빼냈는데, 왜 니들 맘대로 누명을 씌우고 구덩이에 가두느냐’, 라고 말을 해야죠.
어차피 내가 왕이 된 것도 바벨론 왕이 세워서 된 건데, 왕의 자리에서 내려온다고 해서 아까울 것 있습니까? ‘에인, 왕 그까짓 것 안 하고 말지. 그래도 내가 할 말은 해야 겠다.’ 이런 용단이 시드기야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7장 17절에서, 예레미야는 몇 날 며칠을 구덩이에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밖에 나왔음에도 분명하게 자기 할 말을 했습니다.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아무리 내가 죽다 살아나고, 두렵고 떨린다 할지라도 할 말을 했어요.
하지만 시드기야는 할 말을 못 해요.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봐, 불이익을 당할까봐,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떡할까, 목숨이 아깝고 권력이 아까워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할 말도 못 하는 왕이 왕입니까? 그것은 왕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할 말을 못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리스도인인으로서 정체성을 지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무서워서 예배를 못 드리고, 기도를 못 하고, 전도를 못한다면 우리가 시드기야하고 뭐가 다르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담대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며, 세상의 그 어떤 핍박이 오고, 그 어떤 구덩이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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