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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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38:7-13
“이방인의 도움”
2023. 12. 19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이방인의 도움”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두 번째로 구덩이에 갇히고 난 뒤에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방인이 목숨을 걸고 나선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4절을 보면, 네 명의 고관들이 예레미야에게 누명을 씌워서 왕에게 고발을 했죠.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항복하자는 말을 해서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혼란에 빠트리고 있으니까, 얼른 잡아서 죽입시다. 이렇게 요구를 해요.
그러니까 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 알아서 하라고 했죠. 왕권이 약해서 신하들에게 자기 할 말을 못하고, 그냥 ‘너희 알아서 해라. 내가 너희한테 거스를 수가 있겠냐?’ 이렇게 말을 한 겁니다.
그 결과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깊은 구덩이에 가둬버렸어요. 이것이 오늘 본문 앞에 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데요. 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이 말씀에 보면,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나옵니다. 희한하게 예루살렘 왕궁에서 일하는 내시가 구스 사람이에요. 구스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를 가리킵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동쪽에 있는 나라예요. 애굽 남쪽이면서 아프리카대륙 동부에 있는 나랍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프리카 사람이 예루살렘 왕궁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왕의 최측근인 내시로. 이때 당시의 내시는 왕의 비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왕궁 내시로 있었을까? 신기한 일이에요.
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아마도 이때 당시에 왕을 비롯해서 신하들이 대부분 친애굽파였기 때문에, 애굽과 가까운 에티오피아 사람이 왕궁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이유는 몰라요.
어쨌거나 이방인이 왕궁의 내시였어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 뭐예요? 에벳멜렉. 에벳멜렉은 “왕의 하인” 이라는 뜻입니다. 왕의 하인, 왕의 종, 이런 뜻인데, 이 이름이 이 사람의 본명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사람이 가진 직분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야 무엇이든지 간에 어쨌거나 이 사람은 구스 사람, 이방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그런데 이 사람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왜 왕이 베냐민 문에 와서 앉아 있을까? 아마도 왕이 성문 앞에 앉아서 직접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왕권도 약하고 왕으로서 입지가 점점 줄어드니까 최대한 민심을 좀 끌어올리기 위해서 민생시찰을 하는 거죠.
그런데 7절을 다시 보면, 왕이 혼자 앉아 있어요. 예레미야를 고발한 네 명의 고관들은 없습니다. 백성들의 민원을 듣는 자리에 왕만 있고, 나라의 실세들은 없어요. 이것은 그들이 백성들의 삶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왕도 진정으로 백성들을 생각해서 나와 있는 것은 아니죠. 민심을 끌어올려서 자기 권력을 보전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나와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와 있잖아요. 보여주기식이라 할지라도 왕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신하들은 없다는 것이죠. 왕과 신하들이 얼마나 따로 노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왕을 찾아옵니다. 밑에 8절에 보니까,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구스인 에벳멜렉이 왕을 찾아왔어요. 그리고 밑에 9절에 보면, 왕에게 무슨 말을 합니다. 무슨 말을 했는가? 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다른 신하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이방인 내시가 혼자서 왕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들, 저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가둔 일이 악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이 내시가 하고 있는 행동은 사실 자기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혼자서 왕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사실 위험한 행동이에요. 다른 신하들은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왕에게 가면 신하들 사이에 왕따를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에벳멜렉은 이방인이라서 지금도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고 있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이 행동으로 인해서 정치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치적 부담을 무시하고 왕에게 왔어요. 그러고는 고관들의 행동을 비난을 합니다.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고관들과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게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에요. 고관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든지, 나는 내 할 말을 하리라. 저 사람들은 분명하게 악한 행동을 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합니다.
자기 할 말을 못했던 시드기야와 굉장히 비교가 되죠. 본래는 왕이 이 말을 했어야 돼요. 누명을 씌워서 선지자를 구덩이에 던지려고 하는 고관들을 왕이 꾸짖었어야죠. ‘너희가 하는 일은 악하다. 그만 둬라!’ 이렇게 말을 했어야 돼요. 그런데 그것을 왕이 하질 않고, 지금 이방인 내시가 하고 있는 겁니다.
담대하게 왕을 찾아와서 고관들을 고발하는 거예요. 아무 죄도 없는 선지자를 구덩이에 가두는 것은 악한 일이다. 그리고 또 9절을 보면, 또 무엇을 악한 일이라고 말을 합니까?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지금 예루살렘 성에 먹을 양식이 떨어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구덩이에 갇힌다면 그냥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성에 먹을 양식이 떨어진 이유는 바벨론 군대가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바람에 외부에서 곡식을 사 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다들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런데 이런 때에 구덩이에 가둔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냥 굶어죽으라는 것 밖에 안 돼요. 본래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는 형벌을 마칠 때까지 의무적으로 음식을 제공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 앞에 37장 21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혀 있을 때는 매일 떡 한 개씩을 줬거든요? 그러다가 성에 떡이 떨어지니까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죄수한테 음식을 못 주니까 풀어준 거예요. 음식도 못 주는데 가둬놓으면 굶어죽으니까,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풀어준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풀려났던 예레미야가 다시 구덩이에 갇힌 거예요. 이미 성에 떡이 떨어진 상황에서 다시 갇힌 겁니다. 지금 떡이 없어서 갇혀 있는 죄수들도 풀어주는 마당에, 거꾸로 감옥에 가둔 거예요. 이것이 너무나도 악한 짓이라는 겁니다. 에벳멜렉이 지금 그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죠.
그가 고발했더니, 왕이 이제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밑에 10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왕이 에벳멜렉에게 30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고 명령을 내리죠. 고작 내시 한 사람의 요청을 듣고, 단번에 명령을 내렸어요. 사람이 굉장히 우유부단하죠.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죽이겠다고 할 때는 알아서 하라고 하더니, 내시가 와서 구해주자고 하니까 또 구해주라고 그래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너무나 우유부단해요.
왜 사람이 이렇게 왔다갔다 할까? 우리는 시드기야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추측하기로는, 에벳멜렉이 한 말에서 어떤 찔림을 받았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구하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자, 그 말이 어떤 말이냐?
오늘 본문 9절을 다시 보면,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선지자 예레미야” 라고 부르고 있죠.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불렀어요. 바로 이 말을 듣고, 왕이 아차 싶었을 겁니다. ‘아차! 예레미야가 선지자지? 아무리 매국노 같더라도, 그래도 선지잔데 굶겨죽이면 안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반면에, 앞전에 고관들이 찾아왔을 때,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38장 4절에 보면,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이 사람”이라고 불렀죠. 이 사람.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은 “이 사람”이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이것”이라는 말로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로 물건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을 썼어요. “이것, 이것을 죽이소서.” 예레미야를 물건 취급하면서 죽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왕이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예레미야를 선지자가 아니라 그냥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게 됐을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예레미야를 그냥 죽여도 되는 일개 죄수로 인식을 한 것이죠.
그런데 나중에 에벳멜렉이 와서 “선지자 예레미야”라고 부르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겁니다. ‘아차! 예레미야는 선지자지! 그러면 굶어죽으면 안 되는데! 큰일 났다!’ 이렇게 마음이 다급해져서 얼른 에벳멜렉을 보낸 겁니다. 그것도 30명을 같이 보냈어요.
30명을 같이 보낸 이유는 혹시라도 고관들이 에벳멜렉을 방해할까봐 방해하지 못하도록 딸려 보낸 겁니다. 확실하게 살리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요. 두 가집니다. 첫번째는, 우리가 시드기야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내가 불리하면 하나님을 외면했다가, 아차 싶어서 다시 돌아오는 그런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아까 우리가 찬송했잖아요. 3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확실히 믿기는. 확실히 믿으라는 거예요. 간 보지 말고, 확실히.
그러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고난중에도 확실한 믿음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내가 고난중에 있을 때, 예상할 수 없는 기묘한 도움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은 예레미야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물론 왕궁에서 오며가며 얼굴을 본 적은 있겠죠.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방인이에요. 그런데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단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쓴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예상할 수 없는 놀라운 도움의 손길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난중에,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기도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