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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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31:18-20
“나의 사랑하는 아들”
2023. 7. 25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나의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라헬이라고 하는 사람을 등장시켜서 민족이 당한 슬픔을 강조했었는데요. 오늘 본문에서는 에브라임을 등장시킵니다.
에브라임은 라헬의 손자죠. 라헬의 아들 요셉의 아들이에요. 지난 시간에는 할머니인 라헬의 시점에서 후손들이 당한 멸망 때문에 통곡을 했다면, 오늘은 그 후손인 에브라임의 시점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인데요. 본래는 열두 지파에 속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열두 지파에 들어오게 됐고, 그 뒤에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될 때, 에브라임 지파 사람인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 되면서, 에브라임이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가 됐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에브라임이 나오면, 대부분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에브라임이 나오는데요. 에브라임을 그냥 북이스라엘로 바꿔서 읽어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처음에 어떻게 시작합니까?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지금 이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에브라임, 북이스라엘이 탄식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뒤에 “주께서” 부터 밑에 19절까지가 에브라임의 탄식입니다. 그리고 다시 20절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먼저 18절을 우리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자,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셨어요. 에브라임이 뭐라고 탄식을 합니까? “주께서 나를 징벌하셔서 내가 징벌을 받았다”고 하는 탄식이죠. 이것은 자기가 징벌을 받은 것에 대한 원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가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탄식입니다. ‘왜 내가 그런 죄를 지었을까? 왜 내가 진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까?’ 이것을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탄식이 그냥 탄식으로만 끝나지 않아요. 간절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뒤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어요.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아올 수 있도록 나를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여기서 “돌이키소서” 라는 말과 “돌아오겠나이다” 라는 말의 단어가 같습니다. 둘 다 히브리어로 “슈브”입니다.
제가 전부터 계속 말씀드리지만, 예레미야서에서 회복의 핵심이 바로 이 “슈브”라는 단어입니다. 슈브 뜻이 뭐라고 했어요? “돌아오다” 이 말을 18절에 두 번 사용했습니다. “돌이키소서” “돌아오겠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에요.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나라가 멸망하면서 이방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고, 또 어떤 백성들은 난민이 되어서 타지를 떠돌아다니고 있어요. 그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데 돌아오지를 못해요. 붙잡혀서 못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돌아올 여력이 없어서 못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타지에서 이미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어서 마음은 정말 돌아오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이것은 내가 돌아오는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고향 밖으로 쫓아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만이 나를 회복시키실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서 밑에 19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뉘우쳤는지를 말하고 있는데요. 1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자, 여기도 보면 슈브가 나오죠. “내가 돌이킨 후에” 슈브가 한 번 더 나오는데, 여기서의 슈브는 회복을 뜻하지 않아요. 배반을 뜻합니다. 내가 하나님에게서 돌이켰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서 돌이켜서 우상에게로 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뉘우쳤다는 것입니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내가 하나님을 배반한 후에 내가 너무나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뉘우쳤습니다. 그런데 곱게 뉘우친 것이 아니고, 엄청난 징벌을 받고 나서야 뉘우쳤어요. 아까 18절에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징벌을 받고 나서야 뉘우친 겁니다. 만약에 징벌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배반한 채로 있었겠죠. 징벌을 받고 나서야 그 길이 사망의 길이었음을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자기 볼기를 쳐요. 이것은 양심의 가책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내 마음을 찔러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기 볼기를 치는 거예요. 성경에는 이런 행위들이 종종 나오는데요. 자기 볼기를 친다든지, 혹은 자기 가슴을 치는 행위를 합니다. 내 죄를 깨닫게 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면서 19절을 계속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자기가 과거에 지은 죄들을 “어렸을 때의 치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어렸을 때, 즉 철없던 시절을 말해요. 우리가 정말 철없는 아이처럼 천지분간을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치욕스러운 범죄를 많이 저질렀다. 그런데 그 범죄가 너무나도 부끄럽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끄럽다, 라는 말이 성경에서 언제 처음 나오는 말인가 하면, 창세기 2장에서 처음 나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언제부터 부끄러워했습니까? 범죄하고 나서부터 자기들이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했어요.
마찬가지로, 지금 에브라임이 마치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이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했던 것처럼,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볼기를 치고 탄식을 하지만, 그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아요. 너무나 치욕스럽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서 숨고 싶은 부끄러움이 공존합니다. 도대체 자기 마음이 자기도 어떻게 컨트롤이 안 돼요. 갈팡질팡,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인데요.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왜 에브라임을 징벌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브라임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백성들을 아들로 여기시기 때문에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들이 잘 되라고 사랑의 매를 때리는 겁니다.
20절을 이어서 보면,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책망하는 말을 하실 때마다 깊이 생각했다고 하시는데요. 사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책망하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내가 그에게 말할 때” 라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개역개정 성경에는 책망하다는 말을 집어넣었어요.
이것은 번역오류라기보다는 문맥상,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과연 어떤 말씀인가를 추측해서 집어넣은 거라고 봐야 합니다. 위에서 하나님이 징벌을 하셨다고 나오고, 20절에서 하나님이 에브라임에게 말을 하셨다고 하시는데, 그 말이 과연 무슨 말이었을까? 분명히 책망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을 한 것이죠.
저는 이것은 잘된 번역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번역을 해야 뒤에 나오는 말씀과 잘 매치가 돼요. 자, 뒤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깊이 생각하노라. 이 말은 본래 어떤 의미인가 하면, “확실히 기억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확실히 기억하다. 무엇을 확실히 기억하셨을까요? 에브라임이 내 아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기억하셨다는 것이죠. 에브라임이 범죄해서 내가 그에게 책망하는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그가 내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확실히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또 뒤에 보면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시는데요.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창자가 들끓는다는 표현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낯선 표현인데요. 이 표현을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 직역을 하면 이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창자가 그를 위하여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의 창자가 백성들 때문에 소리를 질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짜로 창자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나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내 안 깊은 곳으로부터 튀어나온다는 강력한 표현이에요. 그만큼 하나님이 백성들을 마음 깊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마지막으로 말씀하셔요.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기서 불쌍히 여기리라, 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레헴”이라는 말인데요. 이 말의 뜻은 “불쌍히 여기다, 사랑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로도 번역이 돼요.
그런데 이 레헴을 두 번 연속으로 사용했어요. 한번은 완료형으로 했고, 그 다음에 미완료형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이런 말이 되는 거죠. “내가 그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 완료형과 미완료형. 사랑했고, 여전히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지, 과거에도 사랑하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던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징벌하고 책망하실 때도 사랑하셨으며, 그들이 탄식하고 부르짖을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천 년, 이천 년, 수많은 세월을 지나 오늘날에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모태에 지어지기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셨으며, 우리의 모든 인생 여정 동안에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어요.
때로는 우리가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징벌을 받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깨닫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돌이켜 주십니다. 창자가 들끓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그 깊으신 사랑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