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대가

예레미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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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예레미야 38:14-23
“생명의 대가”
2023. 12. 27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생명의 대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무엇이든지 그에 해당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도 대가를 지불하듯이, 생명에도 대가가 있어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어제가 성탄절이었는데요. 죄로 죽을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죠.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셔서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겁니다.
이처럼 생명은 거저 얻는 게 아니에요. 대가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생명이 살려면 대가가 필요하다. 자, 어떤 대가가 필요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4절을 봐 볼까요?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 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
지금 보면, 시드기야 왕이 몰래 예레미야를 부릅니다. 아마도 지금 이 때가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밖으로 나온지 얼마 안 된 때였을 겁니다.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이 30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냈죠. 그래서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물러 있었어요. 아마도 그 때로부터 며칠 안 지나서 왕이 예레미야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불렀는가 하면,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불렀어요.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 이 문은 정확히 어떤 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문이 왕궁에서 곧바로 성전으로 통하는 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마도 이 문은 왕만 이용할 수 있는 문이었을 겁니다. VIP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한 문이에요.
여기라면 신하들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비밀회담을 하기에 딱 알맞죠. 그래서 여기로 몰래 예레미야를 부른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장면이 어딘가 낯이 익죠? 예레미야 37장을 보면, 예레미야가 첫번째로 구덩이에 갇혀있었을 때, 시드기야가 사람을 보내서 구덩이에서 끄집어냈었거든요. 그때 왕궁으로 예레미야를 데려와서 비밀히 예언에 대해서 물어봤었어요. 마치 오늘 본문에서처럼 몰래 예레미야에게 질문을 한 겁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37장 17절 내용인데요. 37장 17절에 보니까,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아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나서 예레미야가 또 구덩이에 갇혔는데, 이번에도 왕이 에벳멜렉과 30명을 보내서 구덩이에서 끌어냈어요. 그리고 다시 성전 셋째 문으로 예레미야를 몰래 데려온 겁니다. 그리고 다시 비밀스럽게 질문을 하는 거예요. 아마도 그 사이에 뭔가 예언의 내용이 바뀐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예언이 바뀐 것이 없죠. 여전히 예언은 동일합니다.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할 것이고, 왕은 잡혀갈 것이다. 다만, 만약에 왕이 항복을 하고 바벨론 왕을 섬긴다면 왕도 살고 나라도 살 것이다. 이것이 예언의 내용이에요.
예언이 바뀌었기를 바라지만 예언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돼요. 왕이 기대를 하고 있는데,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가 없거든요. 똑같은 말을 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왕이 실망을 하고 화가 나서 나를 죽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런 말을 합니다. 15절에 보니까,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내가 예언을 다시 들려주면, 나를 죽이지 않으실 겁니까? 내가 예언의 말씀으로 충고를 해줘도 왕이 듣지 않으실 겁니다. 이런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왕이 나를 죽일까봐 겁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드기야가 이제 뭐라고 말을 해요? 밑에 16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16절 시작,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하는지라.”
왕이 맹세를 합니다.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않고, 너를 원수들에게 넘기지도 않겠다. 너무 듣고 싶으니까 맹세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맹세가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하는 맹세예요.
이 맹세에는 어떤 효력이 있는가 하면, 만약에 이 맹세를 어길 시에 여호와께서 내 영혼을 다시 거둬가신다는 효력이 있습니다.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를 두고 맹세했는데, 내가 만약에 어긴다면 이 영혼을 여호와가 다시 가져가셔도 좋다는 겁니다.
이것 역시도 하나의 대가를 치르는 일이죠. 맹세를 어기면 생명으로 대가를 치러야 돼요. 오늘 본문에는 “영혼”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 말의 히브리어가 “네페쉬”라는 말이거든요. 이 말은 영혼이라는 뜻도 있고, 생명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16절 하반절에 보면, “네 생명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도 히브리어 “네페쉬”입니다. 똑같은 네페쉬인데 앞에서는 “영혼”이라고 번역했고, 뒤에서는 “생명”이라고 번역했어요.
영혼으로 번역하든, 생명으로 번역하든 다 맞습니다. 핵심은 뭐냐면, 영혼이든 생명이든 어쨌거나 이 맹세를 어기는 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왕이 자기 네페쉬까지도 담보로 걸고 맹세를 했어요.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않고, 너를 원수들의 손에 넘기지도 않겠다. 이렇게 맹세를 하니까 그제서야 예레미야가 예언을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밑에 17절과 18절이 바로 그 내용이에요.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시드기야 네가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고, 안 하면 죽는다.”
아주 심플하죠? 항복하면 살고, 안 하면 죽는다. 여기에도 분명한 대가가 있어요. 살기 위해서는 항복을 해야 돼요. 이것이 생명의 대갑니다. 아주 심플한데, 그만큼 책임도 무겁습니다. 항복이라는 게 그냥 시드기야 한 사람만 한다고 끝이 아니잖아요. 시드기야는 왕이에요. 그냥 개인의 항복이 아니라, 한 나라의 항복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요. 더구나 지금 나라의 고관들은 다 친애굽파거든요. 조선시대에 친일파가 있었던 것처럼, 남유다의 고관들은 대부분이 친애굽파였습니다. 그들이 애굽과 힘을 합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는데, 왕이 항복을 해버리면 신하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대번에 반역이 일어나겠죠. 왕으로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왕이 걱정을 하는 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무엇을 걱정하는지가 나와요.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지금 말씀에 보면, 왕이 누구를 두려워해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죠. 이 사람들은 이미 바벨론에 항복한 유다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항복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나팔” 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떨어지다, 내던져지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갈대인의 손에 내던져진 사람들이에요. 갈대아인의 손에 떨어진 사람들.
이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바벨론 1차, 2차 포로들을 비롯해서 바벨론 군대에 붙잡히거나 또는 스스로 바벨론에 항복한 사람들을 다 포함할 겁니다.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어쨌거나 지금 바벨론에 속해 있는 유다인들이에요.
그런데 왜 시드기야는 그들을 두려워할까? 이것이 문제인데요. 이 이유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9절 끝에 보니까, 왕이 조롱 당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겁니다.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여기서 조롱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알랄”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더럽히다” 라는 뜻입니다. 더럽히다, 혹은 가혹하게 괴롭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구약에 보면, 사사기 19장에서 쓰였습니다. 사사기 19장에 보면, 어떤 레위 사람이 첩을 맞이했는데, 그 첩과 함께 기브아에 있는 한 노인의 집에서 유숙을 하죠. 그런데 그 밤에 마을 불량배들이 와서 레위 사람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려요. 이때 노인이 레위 사람의 첩을 그들에 내어줍니다. 그래서 불량배들이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아줬어요. 결국에 이 여자가 어떻게 됐습니까? 죽고 말았어요. 너무나 심한 괴롭힘을 당해서. 이것이 사사기 19장 25절의 내용인데요. 여기에는 “능욕하다” 라고 쓰여있어요. 이 말이 바로 히브리어 “알랄”입니다.
사무엘상 31장 4절에 보면, 사울이 블레셋 군대에게 쫓기다가 자기 부관에게 명령을 내리죠.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렇게 부관에게 나를 찌르라고 명령을 해요. 블레셋 군대에게 붙잡혀 모욕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차라리 지금 깨끗이 죽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모욕”이라는 말도 “알랄”입니다.
그러니까 이 “알랄”이라는 말이 단순히 말로 모욕을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굉장히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괴롭힘을 뜻하는 말이에요. 사람이 죽을 정도로. 또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이 말을 지금 시드기야가 사용하고 있어요.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도대체 이미 항복한 유다인들하고 어떤 원수를 졌길래 왕이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정확한 내막을 알 수는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왕이 항복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간에 왕이 험한 꼴을 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드기야 혼자만의 걱정이에요. 혼자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을 해요. “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 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아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바벨론 군대가 왕을 유다인들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다시 한번 강조를 하죠.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지금 왕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안 해도 될 걱정을 하면서 머리가 어지럽다보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요. 그러나 상황은 복잡해도, 본질은 간단합니다. 항복하면 살고, 안 하면 죽는 겁니다.
항복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어요. 조롱당할 것을 지금 걱정할 게 아니라, 당장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항복을 해야죠. 심지어 항복을 하면 복을 받는다잖아요.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복을 받은 사람을 누가 감히 조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시드기야는 애초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면 그 뒤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셔요. 항복하면 살리라. 항복하면 복을 주시고 생명을 보전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항복할 것을 걱정할 게 아니라, 항복하지 않을 것을 걱정해야 돼요. 마찬가지로, 말씀대로 살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복을 받는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해요. 그러나 이 간단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죽는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죠. 시드기야가 결국에 항복하지 않아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되겠죠. 생명에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합니다. 아무나 생명을 얻지 못해요. 바로 어제가 성탄절이었는데, 예수님은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어요.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 예수님은 모든 백성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나를 믿는 백성,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백성, 나의 말에 순종하는 백성. 여러분, 믿음으로서 그 대가를 바친 백성에게만이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생명의 대가를 치르시기를 바랍니다. 뭐가 두렵고 걱정이 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나에게 복을 주실 주님을 신뢰하는 확실한 믿음으로 승부하시기를 바랍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모든 염령 다 떨쳐버리고 오직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인도하심을 받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한 복되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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