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롬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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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롬 2:1-16)
'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롬 2:1-16)
<서론>
운전자들이 종종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아니겠지' '나는 괜찮겠지'입니다.
과속운전 졸음운전 법규위반 등에 의한 사건사고 뉴스들을 보면서도, '나는 아니겠지!' '나는 괜찮겠지!'하며 방심하는 사람은 언젠가 큰 사고를 내고야 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첫 장에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라는 것은, 많은 이들 심지어 교인들까지도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선고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덜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잡힌 강도까지 ‘흉악범이 얼마나 많은데, 재수 없어서 걸렸다구요!’하기도 합니다.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내가 사형 죄라니요. 도저히 수긍 할수 없어요! 나는 아닙니다! 항변합니다.
본문 2:1-16절은, 이렇게 '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는 착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다!」 “그러므로”(1)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있어!」라고 시작합니다.
<본론>
1. 누군가를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합니다(1).
'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은, 「나는 누군가를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판단하다」(κρίνω)는 「비판하다」 「험담하다」 「정죄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흠을 「남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공주병 왕자병과 비슷한 판사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보다 선하기 때문에 너희들을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결점은 보이지 않고, 남의 약점이나 잘못은 항상 크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기이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비판함으로 자기가 누군가보다는 선하다는 것을 내보이려합니다. 자기가 상대적으로 더 의로운 사람임을 과시하려합니다.
그 사람과 비교할 때 자기는 다른 차원에 있다는 자부심의 갖습니다. 나는 그와 같지 않다는 우월감에 빠집니다.
그들의 결론은 언제나 같습니다. ‘나는 언제나 옳다, 그러나 너는 언제다 그르다!’
사람이 이보다 더 교만할 수 없습니다.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는,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중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
판단하는 사람은 핑계치 못하고 스스로를 정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자신도 똑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그가 판단한 사람이 실패하는 것처럼 똑같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필립스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죄인들을 심판하려는 여러분, 확실히 말하지만 여러분이 누구든 간에 그럴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다른 이들을 정죄하면,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정죄하는 꼴이 됩니다. 심판하는 여러분이 똑같은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1)「필립스성경」
메시지성경도 “그러나 여러분이 그들을 손가락질 할 만 한 고상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누군가를 비판할 때마다 여러분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1)「메시지성경」
「판단하지 말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공의를 세우지 말라」의미가 아닙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들 중 누가 실패했을지라도 서로 비판하고 험담하고 서로를 경멸하며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비난하고 험담하는 모든 혀를 침묵시키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서로를 회복시켜주고 구해주려고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어떤 사람을 판단할 만한 자격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보다 선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판단할 자격이 있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영적으로 치명적인 병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 법관 판관이 되려하지 말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갈 6:1)「그리스도의 법을 세우라」(갈 6:2)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 죽어 마땅한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그리스도의 법」을 명령하셨습니다.
바라기는 「판단할 수 있다」는 착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법에 붙들려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신의 죄에 대하여 둔감합니다(2-5).
'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두 번째 특징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둔감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둔감하다」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관대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에 비한다면, 내 죄는 그리 무겁지 않아!」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도 나는 예외야, 아니야! 나는 괜찮아!」
여러분,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생각하고 느낄 만큼, 둔감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실 것입니다.
30대 초반에 저는 두 번의 교통사고로 한번은 허리척추 5번 6번 시술을 하고, 한번은 오른쪽 무릎연골제거와 인대 복원시술을 했었습니다.
시술에 들어가기 전 의사 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환자분, 시술할 때는 모르는데 끝나고 마취가 풀리면 통증이 심할 수 있으니 무통 주사를 추가하는 것이 좋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할게요.’하고 수술대에 누웠습니다. 하반신 마취 후, 기계가 다리 속을 헤집고 다니며 자르기와 빨아들이기(썩션), 그리고 핀을 박아서 고정하는 모든 과정을 모니터를 통해 보았습니다.
신기한 건요, 하나도 안 아파요. 기계음이 귀에 들리고, 기계진동이 배꼽까지 전달되어도, 심지어 간호사분들이 제 다리를 멍이 들도록 꽉 붙들고 있어도 아무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자...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그 때서야 ‘하~ 의사 쌤 말을 들을걸...’
바울은 죄와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둔감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4)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5)
지금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확히 「우리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인간의 「회개를 위한 것」이지, 결코 계속 「죄를 간과하고 봐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계속 「죄를 간과하고 봐 주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멸하는 불신앙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묵상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므로 우리의 죄를 그냥 눈 감아 주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처음부터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좋으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은 만만한 분은 아니십니다. 죄에 대하여서는 단호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얼렁뚱땅 우리 죄를 무마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죄에 대하여 관대하게 생각하는, 영적 둔감; 영적 불감증은 불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아니야 나는 괜찮아, 그래도 남보다는 선하시니까,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진노하지 않으실 거야!'라는 생각은 「영적감각」을 무디게 하는 '마취제 '입니다.
영적 마취에 들어간 영혼은, 죄가 몸과 마음을 갉아 내고 찢어 발겨도, 자신의 죄에 대하여 ‘나는 아니야, 그래도 나는 괜찮을 거야’하며,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키워갑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바르게 이해함으로, 죄는 미워하고 단호하게 성경대로 믿음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한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2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7절은 그렇게 참고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사람”(7)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는데, 행동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곳으로 가지 않고, 내 마음과 삶만 좀 편하게 하는 곳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13절은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되라”(13)고 말씀합니다.
내가 선하다는 것은 누군가를 판단하여 내 우월함을 드러냄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서 삶으로 증거를 남기는 것입니다.
<적용>
'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는 생각은, 구원 받고, 성도로 사는데,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나는 아니야,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는 교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물론, 심지어 태어나보니 기독교인이었다는 오래된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나가서 온갖 못된 짓을 한 탕자는, 자신이 죄인인 줄 알아서 아버지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아들 될 자격도 없으니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으로 부려 달라고 자복했습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죄인’(못된 놈)이라 하지 않고 ‘내 아들’(눅 15:24)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집에 있던 큰 아들은,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화(노) 내며, 돌아온 동생을 창녀와 놀아난 죄인 취급 했습니다. 나는 아니고 쟤만, 죽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선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타락한 이후로 이 땅에는, 「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용서 받은 죄인으로,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아멘」으로 인정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선이고, 선해지는 방법입니다. 나의 의와 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와 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