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33-38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8 views
Notes
Transcript

진정한 자유

요한복음을 마지막으로 살핀 날이 1월 마지막이었습니다. 기억을 하고 계실까요? 잠깐 기억을 되짚어 보면 1장의 시간은 18절 말에 하나님의 계심과 창조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께서 함께 하심을 선포하였습니다. 19절부터 제자들이 예수께로 나옵니다.
2장부터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셔서 믿게 하셨습니다. 그런 반면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유대인들의 성전에서는 기능을 상실한 체 바쳐질 제물을 거래하는 현장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중에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3장의 니고데모 같은 자들이죠. 하지만 눈 앞에 예수를 결코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드릴 수 없는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의 그리스도의 통치는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사람으로 역사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를 중심으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을 예수를 통해서 알게하십니다. 이는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역사의 현장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진 바로 그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러한 거부는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경고가 유효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8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리서 믿는다는 것은 바로 믿는 내용이 중요한데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믿는 내용’이 없는 겁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른 분들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요한복음을 집중해서 차례대로 자세히 볼 수 있는 계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리를 하고 그들의 수준이 우리와 같지 않다면 지난 시간처럼 다른 본문과 조금은 쉬운 말씀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인원의 적음보다는 그럼으로 인해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깨달아가는 감사의 마음을 갖기를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죠(요 4:29.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은 그녀의 삶은 일순간 변화되었습니다. 즉 세상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니 그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억압된 자는 억압의 공포를 모릅니다. 자유를 맞본 자많이 자신의 상황 즉 세상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죠.
아이가 사탕 한 잎에 ‘달다’는 작음이 아이 전체를 삼키는 것으로 아무리 달아도 ‘사탕’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힘들게 돈을 벌었지만 돈이 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마치 무궁무진장한 것을 느껴 계속해서 ‘돈 있음’을 향해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도 ‘진리를 알고 얻는 자유’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요한복음은 ‘진리와 자유’를 찾는 보물지도와 같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직접 이렇게도 길게 이야기를 끌고가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록 인간 설교자(저를 말합니다)에 의해 그 의미를 다 전하지는 못하지만 저와 여러분에게 제공된 이 짧은 지식으로 시작해서 여러분이 인생 항로를 어떻게 정하고 정말로 자유할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20 “20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마음이 상할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시편 107:9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고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맛본 자는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시편 42:1–2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는 고백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셨다고 성경은 ‘이제 끝 행복 시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가르침은 마치 보화가 다이아몬드의 원석처럼, 각종 보석이 원석으로 흙이 묻고 모양이 울퉁불퉁하듯 역사의 시간에 예수님도 같은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5장부터 시작합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점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스스로 고난의 길로 곧장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야 말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하는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유대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 배경이 유월절이라고 했던 기억도 하셔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단독적인 판단과 결정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세우고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것이 유월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모세가 백성을 이끌어 내듯 예수 앞으로 나온 오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은 이러한 연관성을 저자인 요한이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움직이심은 재창조의 사역 즉 새로운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이자 이끄시는 ‘메시아’이심이 드러난 것이죠.
하지만 유대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예수가 등장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였고 이렇게 운집한 군중은 언제든 지금의 상태 즉 로마의 통제에 있지만 그럼에도 자치권을 인정받아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럭저럭 유대인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다행스러운, 그럼에도 불안한 상황을 일순간 무너뜨리는 위험 천만한 민중 봉기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변증은 7장부터 길게 이어집니다. 단순한 가르침만으로도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은 권위를 갖지만 유대인들이 지키는 명절 그리고 명절의 의미에 해당되는 상황에 맞닥뜨려져 군중들은 보다 더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믿는 반면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더 위험한 인물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생명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호흡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생명’ 즉 또 다른 생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점에 가보시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발견합니까? 이 세상을 살다보니 세상이 그렇게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빛을 본 것이 아니라 그저 빛으로 인해 전해진 밝음의 일부를 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유명한 철학자와의 대화가 아닙니다. 또한 설득을 위한 어떤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빛이 닿는 부분에 일어나는 불꽃 같은 것을 사람의 이해 안에서 설명하는 것 같은 것이죠. 아이가 엄마에게 아이가 어떻게 생겨요 하면 아이에게 맞는 말로 설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의 다양한 정보를 유튜브를 통해 접해 ‘나는 알만큼 안다’고 할텐데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었다면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씀을 듣지 못한 마음 상함이 일어날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지금은 안쓰는 말이 있는데 ‘당달봉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봉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우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에 당달을 붙이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를 직접 보았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즉 ‘나’라는 인간의 실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고 기적 행하심을 통해서도 충분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런 내용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 꽂힌 수많은 책보다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지금도 우주학자가 찾으려는 우주 공간의 생명체처럼 찾기 어려운 것이지만 어린아이처럼 예수께로 다가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지는 것처럼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알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의 무기는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내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그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이것은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고, 나는 이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일면 들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죠. 그들이 주장하는 ‘아브라함’은 앞으로도 꽤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부정할 수 없죠.
진리가 자유케 한다니 그들에게 자유란 종과 대비되는 언어적 한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한계는 시대의 한계, 나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죠. 그렇게 갖는 수명의 한계는 결국 인생이 갖는 유한성을 특정짓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를 그저 매여 사는 종과 대비했다면 인생이 갖는 유한성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8장의 범죄한 여성이 정죄함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알았을 것입니다.(10절)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자유란 어쩌면 부모의 집을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사는 것, 또는 학교를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만큼 불쌍한 여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라는 조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더 크신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진정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해석해주십니다. 이미 여러분께 몇 차례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어렴풋한 이야기를 했드랬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나는 것, 틀어진 것, 하나님과 관계 없는 것이죠. 예를 들어 우리가 쉽게 말하는 죄를 짓는 것을 신호등을 어긴 것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법과 틀어진 관계, 법이 정해놓은 규칙을 벗어난 것이라고 해석되듯, 성경이 말하는 죄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틀어진 것’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에서 벗어난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큰 것 즉 종은 영원히 거하지 못한다는 다른 표현을 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진리와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종은 ‘진리가 없는 상태 즉 매여 있는 상태’라는 것에 대한 대비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자유의 상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상태인 죄 없는 상태,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와 관계가 괜찮은 자녀는 부모의 방에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합니다. 그건 부모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관계가 틀어지면 아무리 문이 열려 있어도 쉽게 들어가지 못합니다. 서로에 대한 껄끄러움이 한켠에 있다면 스스로가 이미 서로에 대해 ‘들어감’에서 부자연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로 그렇게 다가오기를 기대하십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마치 아이가 아빠를 부르듯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시는 것이죠. 마태복음 6:9–10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표현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관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한계에서 한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번지 점프는 내가 뛰겠다는 의지보다 더 중요한 나를 묶고 있는 줄에 대한 것입니다. 줄에 대한 믿음이 안죽는다부터 눈에 보이는 높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지 내 의지만으로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잡은 줄은 ‘아브라함’ 즉 조상을 붙잡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아버지가 내 할아버지가 그렇게 올라가서 보이는 아브라함이야 말로 확실한 줄이라는 자기 의지로 굳어진 ‘위선’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께서는 ‘진리와 자유’의 관계가 우리가 매여 있는 육신의 줄이 아니라 ‘영원의 관계에서 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것 즉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같이 읽어 보자)
이렇듯 진정한 자유를 이해의 면에서 본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관계 속에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부모 자녀의 관계에서 형제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늘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차선책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사람은 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고 예전에는 자신을 abc혈액형으로 구분했는데 지금은 복잡한 mbti로 바꿔 붙였을 뿐 다르지 않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혈액형 구분보다 더 간단하게 t and f로 단순한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예로 들은 가정이 자유로운 곳은 곧 가족 구성원이 얼마나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는가에서 시작하듯 요한복음에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진리’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고 예수께서는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랫만에 요한복음의 지난 내용을 살피면서 다시 우리의 마음을 요한복음 앞에 쏟고 기다리며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