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4주일예배_약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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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교감의 중요성

야고보서 5:13–16 NKRV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성경의 좋은 말은 다 알고 있지만, 그것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매주 반복해서 예배를 드리고 수시로 기도를 하지만, 정말 신앙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박해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던 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박해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 때문에 회의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곧 오시리라던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고 시련은 계속되는 상황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벽에 부딪힌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신앙의 의미에 대해 회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는 형식화되고, 따라서 신앙 또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그 무엇이 되지 못하는 상황...,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그러한 상황을 절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공허해진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강조했던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힘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셈인데(전반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정황이 있었다는 것을 말함), 그렇다면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다른 접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동시에 신앙의 확신을 주고자 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이름으로 기록된 이 서신은 아마도 야고보 당대의 친서라기보다는 다소 후대, 곧 앞서 말한 정황이 발생한 국면에서 야고보의 이름을 빌러 기록한 서신으로 보입니다. 서신의 저자는 그저 참으라든지 그저 믿으라고 함으로써 그 난관을 돌파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시련의 의미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공허해진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충족시키라고 권함으로써 그 난관을 돌파하도록 안내를 했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써 완성된다는 큰 뜻,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재삼 일깨운 야고보서의 말씀은 그런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야고보서의 교훈의 말미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사람들이 흔히 처할 수 있는 몇 가지 상황 가운데서 어찌해야 할지를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받았을 때, 기쁠 때, 병들었을 때, 이렇게 세 가지 상황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상황과 그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언뜻 보기에 그저 병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하나의 초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도의 능력이라고 할까요? 중심이 되는 초점에 거기에 있습니다.
고난을 받는 사람, 즐거운 사람, 고난을 받을 때, 즐거울 때는 아주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곤경을 겪을 때가 있는가 하면 즐거움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일반적인 상황으로서 그 두 가지 상황을 기본 전제로 하여 각각의 경우 어찌 해야 할 것인지를 일깨우고 나서, 정작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로서 세 번째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고난을 겪을 때 기도하고 기쁠 때 찬양하라는 교훈은 크게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 같지만 또한 의미심장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곤경에 처할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고, 기쁠 때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 점에서 이 교훈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훈이 또한 의미심장한 것은 그 당연한 감정의 발로를 올바른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행위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고난을 이길 힘을 구하는 것을 뜻하고,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지금 자신이 누리는 삶의 기쁨을 감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어떤 경우든 하나님과 교통함으로써, 슬픔과 곤경 앞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기쁨으로 오만에 빠지지 않는 삶을 누리도록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 전제에서 야고보서의 저자는 그 다음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과 기쁨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병이 든 상황, 그것은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를 일러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요즘 같으면 병원에 가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일반화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로서도 의원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도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전문적인 의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 민중들이 병에 들었을 때 어찌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병자를 치유했고, 사도들도 병자를 치유했다는 이야기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빈번할 뿐 아니라 사역의 중심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일반 민중들이 전문적인 의사를 접할 기회가 드물었다는 것을 말하고 종교적 지도자들이 병자의 치유를 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 역시 여전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사도들의 시대가 마감되고 난 이후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바로 이 점이 야고보의 친서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 이들은 치유의 은사가 따로 있는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지도자들일 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병자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기름을 바르는 것과 기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당시 근동에서 환자를 치유할 때 널리 쓰이던 방법입니다. 그것은 생명나무의 기름으로 생명을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기도 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생리학적 치료방법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딱 문제가 되는 병인에 대해서만 치료를 하는 현대 서양 의술의 관점에서 보면 얼토당토 않는 방법일지 모르지만, 첨단 의술이 발전해 있는 오늘날에도 몸 전체의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한방 의술이 유효한 치료방법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의술이 분화되지 않은 당시에 기름을 바르는 치료방법은 그렇게 황당한 방법만은 결코 아닙니다. 그 다음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은 동시적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병자를 치유하는 또 하나의 차원입니다. 기름을 바르는 것이 생리적 치유의 측면을 말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심리적 내지는 정신적 치유의 측면을 말합니다. 현대 의술에서는 정신과라는 특화된 차원에서만 이 치유방법이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다른 일반 치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성서 시대에는 이 차원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요즘 의술에서 도무지 인정되지 않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 차원의 중요성을 압니다. 상담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의사를 만나면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데, 상담만으로도 치유되는 경험을 적지 않게 경험하지 않습니까? 전인적 인간 이해가 실종된 오늘 현실은 정말 심각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인적 인간이해입니다. 사실은 성서 전반이 그렇지만, 이 점은 야고보서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개별 인간이 몸과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전인적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이해는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전반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도의 능력을 역설하는 마지막 강조점은 그 점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이 대목에서 특별히 소통과 교감의 능력으로서 기도를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음을 받게 하십시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이 말씀이 기도의 주술적 효과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통과 교감의 능력으로서 기도의 효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소통행위라는 것은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그저 간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정말로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놓고 그 상황 가운데서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차원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과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보기도, 오늘 말씀은 그 차원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장로들, 곧 교회 지도자들만의 기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스스로의 허물을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통과 교감, 신뢰와 의지의 차원입니다. 그것이 병든 사람을 온전하게 치료해줍니다. 인간이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바로 그 차원을 상실한 것이 오늘 사람들의 삶입니다. 어떤 면에서 개별적인 몸뚱어리는 병 없이 살고 있다 할지라도 다들 병든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기도는 병든 바로 그 삶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마지막 구절은 새겨야 할 내용들이 더 많지만, 말씀을 줄이고자 합니다. 소통과 교감의 능력으로서 기도의 효력을 재삼 확인하면서, 또 다른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환기하는 것으로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번역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가운데 “기도에 대하여”의 한 대목입니다. “너희는 어려운 일이 있고 부족이 있을 때 기도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기쁨이 넘치고 넉넉할 때에도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체 기도가 무엇이냐? 너희 자신을 생명의 하늘 속에 활짝 펴는 것 아니냐? 너희의 어둠을 허공에 쏟는 것이 시원한 일이라면, 또 너희 가슴에 트는 새벽빛을 쏟아내는 것도 즐거움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혹 너희 혼이 너희를 불러 기도하게 할 때에 너희가 눈물을 흘려 기도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또 너희를 몰아치고 몰아쳐 울다 못해 마침내 웃고야 마는 데까지 이르게 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는 일어나서 바로 그 시각에 기도하는 이들, 기도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는 그들을 공중에서 만나도록 하라.” 한 구절 한 구절 모두가 와 닿지만, 오늘과 말씀과 관련하여 특별히 마지막 구절이 와 닿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는 일어나서 바로 그 시각에 기도하는 이들, 기도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는 그들을 공중에서 만나도록 하라.”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에서까지도 이 차원을 실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기도를 드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병으로부터 건강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기도로 스스로 얼어서고, 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며, 나아가 이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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