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8 수요강론: 성경이 말하는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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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수요강론으로 부르시고 말씀을 사모할 수 있게 하심 감사합니다. 내일과 오늘은 2월을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지난 두 달 간 저희에게 말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시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시려는 안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수요강론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성령님을 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도 그 은혜에 감격하여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4주 간의 수요강론, 저의 마지막 시간으로 ‘성경이 말하는 안식’이라는 제목으로 ‘안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강의를 통해 알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안식’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니면 어떤 장면이나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혹시 집에서 TV나 휴대폰을 보는 것이라던지, 소파나 침대에 앉거나 누워 쉬는 것이라던지,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던지, 아니면 그냥 노동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떠오르진 않으신지요. 저는 내가 일하지 않고 그저 쉬는 것만을 안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번에 ‘희년’에 대해서 우리가 설교를 들었었는데, 읊조리기 할 때 어떤 분이 자신은 일하지 않고 집에서 쉬는 것을 안식이라고 생각했었다고 나눔을 해주기도 하셨는데요. 이처럼 우리는 노동에서 벗어나 그저 쉬는 것, 아니면 노동이 아닌 그 이상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안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성경에서도 안식하는 안식일은 노동을 금지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지 노동을 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것을 하기 위해 노동을 금지시키는데요.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짧지만 오늘 함께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안식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안식의 기원을 쭉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 때까지 올라갑니다. 가장 먼저 안식이 등장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였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하나남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요.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해와 달, 그리고 별을 만드시고, 각종 생물들을 만드신 후에 가장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총 6일 동안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에 7일째되는 날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십니까? 바로 2장 3절에서 ‘안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노동을 중단하시고 7일째되는 날에 안식하십니다. 이것이 안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으니 인간도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안식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후에 이 ‘안식하셨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인 ‘안식일’도 하나님과 연관을 지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6일동안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안식하시는데, 창조의 6일과 안식의 7일을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일곱째 날은 2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에서 새들과 바다 생물들에게 “복을 주시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을 주신 후에 하나님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꼐서 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실 때, 이 일곱째 날이 앞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적합한 번성과 충만을 특징으로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일곱째 날은 단지 쉬는 날만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는 날입니다.
그렇게 창조의 6일과 안식의 7일이 연관이 있는데, 차이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일곱째 날은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하시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이 일곱째 날은 나머지 6일과는 다르게 여겨졌음을 의미합니다. 이 “거룩한” 일곱째 날을 구별하는 것은 이날이 바로 예배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선물로 받아 마음껏 먹고 마시며 누리며, 그리고 경작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살면서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돌려드린다? 바로, 일곱째 날에 모든 노동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으로 돌려드리는 겁니다. 바로 이 일곱째 날에 노동을 중단하기 위함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째 날의 휴식은 단순한 육체적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휴식입니다. 또한 이 예배는 번성과 충만함이 포함되어 있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바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2장 1-3절에서 규정하신 예배는 자기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이 자신과 교제할 수 있게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의 정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인간이 창조의 정점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안식일에 교제를 누리는 인간이 창조의 정점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제1문답에서 인간의 주된 목적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바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뚝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안식일이 바로 그런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6일동안 일하신 하나님을 모방해야 하듯이 안식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모방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안식일이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겁니다. 이에 대한 답변 또한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삼위 안에서 완벽하고 충만한 교제를 누리고 계셨습니다. 굳이 자신을 위해 안식일을 만드실 필요가 없으신 것이죠. 또한 2장 3절의 “복되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보통 구약에서 생물에게 쓰이며 일반적으로 복을 받거나 오직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되는 것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복되게 하신 이 안식일을 자신을 위해서 복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뿐 아니라 앞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하셨다”로 번역된 단어가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관련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 사실은 인간이 일곱째 날을 이런 예배에 전념하는 날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의무는 내가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세상이 너무나 감사해서 지키는 자발적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안식일에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제하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심지어 자신과 교제하는 예배를 통해서도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은 사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가장 최상의 복인 하나님과 함께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누렸겠지만, 이보다 더 큰 행복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함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이유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적힌 출애굽기 20:8-11 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바로 앞에서 살펴본 창세기 2장 1-3절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7일에 쉬셨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도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날에 무엇을 해야 한다?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배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중요한 사실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이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날이라는 겁니다.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원리가 하나님께서 매주 안식일마다 쉬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의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매주 안식일마다 노동을 멈추고 거룩한 휴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죠.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임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시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을 가로질러 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목격하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이 안식일에 적절하다고 변호하시고, 이 안식일의 진정한 본질을 말씀하시는데요. 바로 마가복음 2:27 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바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과 “사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돕는 수단으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을 다시금 세기게 되고, 그 목적에 따라서 살아갈 것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안식일은 거룩한 휴식, 즉 노동을 멈추고 육체적 휴식을 취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진정한 휴식과 재충전을 얻는 날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것이죠.
또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때 안식일을 갑자기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실 때부터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이 안식일을 현재 우리 인간은 잘 지키고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봅시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어떻게 지키고 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기보다 안식일을 망쳐버리고 있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다음으로 우리가 왜 안식일을 잘 지키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와 그 범죄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단지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강의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의 범죄로 안식도 오염되었습니다. 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리고, 우리를 위해 존재했던 안식일이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오염되어 버렸고, 이것의 영향으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우리의 의지대로 최선을 다해 지키기 싫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키기 싫은 저변에 깔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아담의 범죄가 우리를 안식일을 지키기 싫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마음껏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유는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싫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으신 하나님은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영원한 분으로서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시간은 하나님의 고유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고, 그 범죄로 시간조차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 이 안식일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따라서 내 시간이니 누군가가 내 시간을 침범하는 것이 싫은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고, 나를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고 싶어집니다. 사실 우리가 안식일에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 힘든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타락 전에는 노동도 선한 것이고,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이었지만,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노동이 힘들어진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거룩한 휴식을 취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고 의무이지만 자발적으로 지키는 의무였는데, 죄는 이 모든 것들을 망쳐버렸습니다. 우리가 매주 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힘들어할 때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기보다 집에서 쉬고, 다른 여가 생활을 하는 것을 더 기뻐하고, 가기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야 할 때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죄가 얼마나 우리의 깊숙한 곳에까지 침투해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뿐만 아니라 사회만 봐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떼어놓고 인간이 시간의 주인이 되어버린 바람에 주일에 노동을 멈추고 쉬어야 함에도 계속해서 일하려고 하고, 고용주는 알바를 고용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하고, 또 주말에 예배보다는 어떤 여가생활을 즐길지 고민하는 우리의 사회에 죄는 너무나 깊숙히 침투해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의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이 죄로부터 벗어나 안식에 이르게 할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이것을 맛보게 하기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이 복을 누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십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족을 포함하여 “남종과 여종, 그리고 문 안에 머무는 손님”까지도 이 복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휴식을 취함으로 누리게 될 복을 다른 민족들이 보고 이 복이 얼마나 귀중하고 기쁜 것인지 알게 하여 이방 민족들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같이 안식일을 통해 거룩한 휴식을 취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바라셨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바로 ‘룻’입니다. 룻은 이방 민족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인도로 보아스와 결혼하여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 룻기 3:1 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서 “안식할 곳”이 등장하는데, 1차적 의미는 육체적 휴식 또는 안정된 곳을 말합니다. 하지만 룻기 전체 맥락상 이 안식할 곳이 보아스였고, 이 보아스와 결혼을 통해 교제함으로 룻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거룩한 휴식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정한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맡기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합니다. 우리가 희년에 대한 설교를 통해 알게 되었듯이 안식일에서 파생된 희년을 이스라엘이 지켰다는 것을 구약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휴식을 취해야 함에도 우상을 두어 이방신을 예배함으로 오히려 다른 이방 민족에 동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여 거룩한 휴식을 취하고 이 휴식에 이방 민족들도 참여하게 해야 했지만, 이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장 에서 하나님께서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에서 자신에게 나오는 것에 대해 이사야를 통해 고발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발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피가 가득한 손”으로 자신에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11-15 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말씀에 따라 살지 않고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라고 고발하십니다. 또한 손에 피가 가득한 채로 안식일에 자신에게 예배드리려고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가 14절에서 자신에게 “짐”이 되었고, 그 짐을 지기에 “곤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를 더럽힌 이스라엘을 심판하기로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안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그것을 자신이 직접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5:1-3 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이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에게로 나아오라고 죄인을 값없이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55장은 이런 구속을 받은 자들이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라는 12절의 약속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 다음의 56장은 그동안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할” 분 아니라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충만함을 인내로 기다리라는 요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 하나님은 이 정의와 의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실 때 안식일 준수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오늘 강의의 핵심인 안식에 대해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이 복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고 더럽히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속함을 그 뒤의 절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 이방인들이 드리는 예배인 제단에서 드리는 번제와 희생제사를 받으실 것이라고 7절에서 약속하십니다. 다시금 원래의 안식일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이사야 58:13-14 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오락”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을 일체 금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원래 의미는 그보다 더 큽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제정한 안식일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를 삼갈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 말로든 행동으로든 간에 안식일을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선 안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인이시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이죠.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안식일을 사용하지 말고, 안식일을 준수하여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안식을 취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얘들아, 그것이 너희에게 기쁨이 되는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겠지만, 사실 그것은 가짜란다. 나만이 너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진정한 안식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어디까지 뻗칩니까? 바로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이스라엘이 하지 못했던 안식일을 충실히 지키십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시고,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선을 행하십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안식일을 완벽하게 성취하십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서 설교를 하시는데요. 그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4:18-19 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신 것으로써 “주의 은혜의 해”, 우리가 흔히 아는 희년을 전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희년은 안식일의 가장 정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희년을 전파하여 포로된 자와 눌린자를 위해 자유를 선언하시고, 선언할 뿐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최종적으로 성취가 됩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성취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의해 포로가 되고 억눌려 있는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심으로 주의 은혜의 해를 선언하시고 자유롭게 만드셨습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심으로 “일”에서 “안식”으로 하나님께서 옮기셨듯이, 죄의 종이 되어 안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나의 유익, 나의 만족이라는 일을 하고 있던 우리를 “안식”으로 옮기셨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취하심으로 자신이 진정한 안식처가 되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모든 이방 민족들을 들어오게 만드심으로 안식에 이르길 원하셨음에도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이 일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 모든 것들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 덕분에 진정한 안식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6장에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복을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백성들은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신약 교회는 참된 안식을 주신 그리스도를 예배하기 위해 일요일인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예배함으로 안식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복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약속된 복이 안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세상에서 죄로 인해 생긴 사망과 애통, 곡하는 것이나 아픔이 없어져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안식입니다.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켜 쉼을 얻는 안식을 제공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영원히 예배하는 그 날에는 우리에게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어지고 우리의 모든 눈물을 그리스도께서 닦아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베푸실 복입니다.
오늘 강의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함께 ‘성경’이 ‘안식’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안식을 하나님과 떼어서 생각해선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안식은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날이며 이 날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휴식을 취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로 인해 이 안식일은 더럽혀지게 되었고, 안식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본성에 의해 시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안식일을 떼어놓고, 이 안식일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내 시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함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지키지 못한 그 안식일을 자신이 직접 지키시기 위해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을 완전히 성취하시고,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의 안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원히 예배하는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안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강의를 통해 단순한 안식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안식일은 교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아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고 싶으신 것은 삼위 안에서 누리고 있던 그 교제가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나의 시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날로 삼으려고 합니다. 저 또한 그런적이 정말 많습니다. 주일에 쉬고 싶고, 주일에 그냥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예배드리러 몸을 억지로 일으켜 가야하지만 예배가 따뜻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영혼은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에 힘을 쓰곤 있지만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함으로 한 주간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새순교회 모두가 이런 마음을 알아 진정한 안식에 이르게 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강의를 생각하며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안식을 주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고, 자신과 교제하는 특별한 날로 안식일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고자 하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런 저희를 용서하시고, 안식일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진정한 안식에 이르게 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저희를 통하여 주변에 아직 이 안식에 이르지 못한 많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내 마음대로 쉬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진정한 안식임을 알게 하셔서 그들도 진정한 안식에 동참하게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돌아오는 주일도 진정한 안식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휴식과 재충전을 하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한 주간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안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