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죽음(막 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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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전도로 예수님의 소문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자신의 불의한 결혼을 지적하다가 참수당한 요한이 살아나 예수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의 최후가 어떻게 될지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몇 명의 왕에 의해서 분할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그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때의 통치자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주전 20년에 태어나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로 생각하거나 혹은 선지자 중 하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헤롯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헤롯 역시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는 항간의 소문을 듣고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에 요한을 참수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의 불의한 결혼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이복형제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티파스는 자기 아내였던 아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했습니다. 그러자 헤로디아 역시 자기 남편 헤롯 빌립과 이혼한후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하였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이 비판하자 그는 요한의 말을 듣고 번민하였지만 달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요,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헤로디아는 달랐습니다. 요한을 원수처럼 여겨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성화에 못 이겨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어 요한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로디아는 매우 사악하고 영리한 여자였습니다. 요한을 죽이기 위해 간교한 계략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그렇다면 그 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 새”
여기서 기회가 좋다는 말은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의미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어서 22절에 보면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며 헤롯과 그와 함께한 자들을 기쁘게 합니다. 그 결과 헤롯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대답하지요. 오늘 본문에는 헤로디아의 딸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지만, 요세푸스라는 유대 역사가에 따르면 헤로디아의 딸의 이름은 살로메였습니다. 지금 헤롯이 베풀고 있는 생일잔치는 남자들만 참석하는 잔치였습니다. 술을 잔뜩 마시며, 질펀하게 노는 자리였기에 춤을 추는 여인들은 주로 노예였습니다. 아마도 선정적인 춤을 추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노예가 아닌 살로메가 들어와서 춤을 추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살로메가 자발적으로 춤을 췄다기 보다는 헤로디아가 시켰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죽이기 위해 딸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살로메 역시 보통 악녀가 아니어서요, 엄마가 시킨대로 곧바로 서둘러서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합니다. 결국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기 싫었지만 딸과 손님들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거룩하고 의로운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다가 무덤에 안치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순교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이 내용의 위치가 제자들의 복음 증거와 귀환 후 보고 사이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요한이 순교한 것과 같이 복음을 담당한 자들도 이와 같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만사형통이 예비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복음 때문에 고통을 겪을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에 가면 이러한 핍박과 고통 때로는 순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와 이슬람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나이지리아의 북부지대나, 여전히 복음을 탄합하는 북한과 같은 공산 국가나, 이외에도 극단적인 종파들이 판치는 곳에 가면 이런 고통과 핍박과 순교는 일상적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으면 다 잘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고통을 받아야 할 때도 있고, 목숨을 버려야 할 때도 있고,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즉 복음에도 대가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고통과 핍박을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인을 고쳐준 일로 매 맞고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과 실라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찬송했다는 말은 기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다가 핍박도 당하고 고통도 당할 수 있습니다. 왜요? 사탄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라 백성인데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때 핍박은 당연 한 것입니다. 그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한의 억울한 죽음, 로마식 처형 방식, 주변의 강압에 따른 헤롯의 사형 결정, 매장을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 떠오르는것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로마식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주변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사형 선고를 내렸고요, 예수님도 죽으셔서 무덤에 매장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죄가 있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맞이하기 두려워하는 죽음을 직접 맛보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이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