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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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으로 잘 알려져있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어요. 내가 너에게 아들을 줄 것이고, 그 아들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이셨습니다. 창세기 15장 4-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사라가 낳은 이삭과 세운 언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주셨고,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크게 기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장 6절). 너무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노년에 아주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고, 오직 하나뿐인 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이 볼 때 하나님의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하나님의 시험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부르셨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야기는 아주 덤덤하게 흘러 갑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심정이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자세히 기술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두 명의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나귀에 번제에 쓸 나무를 가지고 모리아로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삼 일 째에 거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 근처에 도달했던 것 같아요.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나귀와 함께 있으라고 말하고 이삭과 함께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 종들에게는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돌아오리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를 이삭에게 지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에 올라갑니다. 그랬더니, 이삭이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던 것 같아요.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희생 양이 없거든요.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그 번제에 씌일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묵묵히 번제를 드릴 곳으로 걸어갑니다.
마침내 번제를 드릴 장소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합니다. 그리고 나무 위에 올려놓고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그 찰나, 여호와의 사자가 극적으로 말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 대지 말아라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이제 네가 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칠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줄 알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보니까 한 수양이 수풀에 걸려있어서 그 숫양을 이삭 대신에 번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고, 또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반복되어 설교되었던 말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이야기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아브라함이 이 이야기를 가지고 아브라함의 믿음과 부활 신앙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음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실 것이라는 놀라운 믿음 때문이었다라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이미 부활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생긴 것인 아니라, 구약의 창세기부터 이미 우리 믿음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며, 우리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잘 믿어야 된다는 교훈과 또 부활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면 아마 순종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것은, 그가 이삭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던 것은 오로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이삭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그에 따라 순종한 것 뿐이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에서는 이삭의 순종도 빛이 납니다. 이 말씀의 큰 맥락을 보았을 때, 이 시기의 아브라함은 매우 노쇠하여 약했던 시기였을 것이고, 번제에 쓰일 나무를 지고 산을 올라갔던 이삭은 장성하여 신체능력이 좋았을 것이라고 예상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반항하지 않고 아버지를 믿고 따르며 순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새하늘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부활의 소망도 이삭의 순종도 중요하지만, 이 본문의 이야기는 그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이 이야기를 통해 믿음과 소망과 순종만을 말할 것이었다면, 여기에서 이삭은 죽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완성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이삭을 죽였고, 이삭은 그에 순종하여 죽었으며, 결국 이삭이 부활한 후에 이야기가 끝이 나야하는 것입니다. 늘 구약의 성경이 전하듯 큰 시험을 통과한 후에 큰 복을 받으며 이야기가 끝나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이삭을 죽이는 것을 멈추라고 하시고 그를 대신하여 숫양을 준비하시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아주 잘 알려진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혹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과연 왜 이 이야기는 이삭이 죽고 부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레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는 왜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하시고 아브라함을 테스트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이 시험이 좀 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아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까? 만일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은 너희의 자녀를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 과연, 그 말씀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길 수나 있으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믿음 만을 이야기하는 본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본문은 그 이상의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분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창세기를 썼던 모세도 이 본문 말씀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이야기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숫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이미 그를 예비하셨음을,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읽으시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이라면 절대로 나는 내 자녀를 바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여러분이 순종하지 못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만큼,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를 수 없는 만큼 이 명령이 어렵다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 잊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교회를 10년 20년 다니게 되면 아무 감흥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매주 교회에 나와서 설교말씀을 듣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마치 이해해 버린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가 목사로서 새하늘교회 성도님들에게 꼭 전해야겠다는 단 한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너무 좋아하는데요 함께 읽어볼까요? 에베소서 3장 18-19절 말씀에,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새하늘교회 성도님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전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소망보다 사랑이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말을 잘 하지 못하여 이 사랑의 크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마 바울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크기를 깨닫기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우리는 이미 그 사랑의 크기를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번제로 올려지셨고,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멈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오늘 창세기 본문을 덤덤하게 기록해 나가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침묵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