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막 5:1-20)
Notes
Transcript
갈릴리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은 이제 바다 건너편 거라사지방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앞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 들린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군대’라 불릴 만큼 힘이 센 귀신들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고, 2천 마리나 돼는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에 빠져 몰살합니다. 이제 온전하게 된 사람은 요단강 동편 이방인 지역인 데가볼리를 다니며 예수님께서 하신 위대한 역사를 전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지역에도 가셔서 귀신을 쫓아내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도착했을때, 무덤 사이에서 사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이 당시 무덤은 가장 부정한 곳으로 더러운 귀신들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거했습니다. 또 누구도 이 사람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쇠고랑과 쇠사슬로 수차례 묶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힘이 세고 거칠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은 그 이유를 그 속에 들어간 귀신이 ‘군대 귀신’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에 상터를 내면서 살았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귀신들은 자해를 통해서 생명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9장에 보면 귀신이 소년에게 들어가 말 못하고 귀먹게 하는 것은 물론 아이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자해하는 것을 넘어서 옷을 입지 않은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귀신들린 자에 대한 이같은 묘사는 단순히 한 인간에 대한 묘사를 넘어 악한 영의 세력에 지배받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은 인간의 상황을 ‘강한 자’ 사탄에게 결박된 상태로 보는데요, 인간은 ‘강한자’ 사탄보다 ‘더 강한자’가 와서 ‘강한 자’ 사탄을 결박할때 비로소 자유롭게 되는데, 그 강한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6절을 보시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엎드려 절합니다. 왜 절합니까? 예수님이 그들 보다 더 강한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원래 자기보다 더 강한 자에게 엎드리기 마련입니다. 즉 사탄은 예수님이 그보다 더 강한분임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귀신에게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괴롭히지 말다라는 말은 귀신들이 최후의 심판을 당할 때 당할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누가 복음 8장 31절에 따르면 귀신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는데, 무저갱은 천년 왕국동안 사탄을 가두는 곳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귀신의 이름을 물어보시는데요, 이 당시의 사람들은 귀신의 이름을 파악하면 귀신을 제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의 요청과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고 악의 세력이 정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군대는 헬라어로 ‘레기온’입니다 . ‘레기온’은 로마 군인 50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로마군단 레기온이 이 거라사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로마 군인들은 돼지고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실 돼지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돼지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는 어떤 무덤도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돼지는 지하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귀신들은 돼지를 좋아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에 거라사 부유층들은 시골 소작농들을 시켜 돼지를 치게 했고, 이 돼지들을 거라사에 주둔하는 로마 군인들에게 팔았습니다.
귀신들은 거라사 지방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들이 돼지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자 2천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비탈길을 달려가 바다에 빠져 죽는 장관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바다일까요? 저번에도 잠시 말씀드린것처럼 바다는 종종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실때 광풍이 일어난 사건, 예수께서 한 밤중에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 좋은 예입니다. 계시록에서도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사탄을 상징하는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졌을 때 바다가 다시 있지 않다고 계 시록 21장 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군대 귀신이 가장 더러운 짐승인 돼지떼에 들어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은 귀신들을 그들의 본거지로 돌려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귀신들은 거처를 바꿔서라도 생존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귀신들을 멸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부정한 땅이라고 여겨졌던 이방 지역이 정화되었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으로 그 사람과 회당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방인과 그 땅까지도 당신의 거룩함과 능력으로 정화하시고 더러운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본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읍내와 여러 마을에 알립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거라사의 부유층들은 시골 소작농들을 시켜 돼지를 치게 하고 이 돼지들을 로마 군인들에게 팔아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많은 돼지떼가 죽어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봤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에 그들은 감히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의 피해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떠나가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이 들렸던 사람은 제정신을 찾은 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정신이 온전해진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 거친 풍랑을 해치고 거라사 땅에 왜 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하신 일은 딱 한가지, 군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은 모두가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돼지 2천 마리가 수장되는 것도 불사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께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사람들은 향유를 허비한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사랑은 기꺼이 행하는 허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