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27-36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3 viewsNotes
Transcript
기도.
기도하시겠습니다.
찬송가 359장(새 325) 예수가 함께 계시니
우리 이시간 예배를 위해서
선포될 말씀을 위해서
우리 마음 밭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코로나 전염병과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전쟁 속히 종식시켜달라고 기도하시고
몸이 불편한 우리 산성 식구들과 장기 결석하는 식구들 위해서 우리 나라를 위해서
주여 한번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1.성전에서의 폭동과 바울의 환난
지난 본문에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면에 따라,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특히 유대인으로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의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정결예식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네 명의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들이 서원을 지키는 일에 바울이 돈을 대주도록 권면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그들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그들을 위해 돈을 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7절)
그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의 소동에 잡혀서 끌려 나갑니다. 이것은 물론 야고보가 언급한 사람들, 즉 율법에 열심을 가진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벌인 소동이 아니라, 27절에 나오는 것처럼 유대인들, 특히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아시아’는 지금의 아시아가 아니라 그 당시의 아시아 주인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통 ‘아가야’는 그리스 남부의 고린도를 말하고, ‘아시아’는 에베소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바울을 보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의 조언이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바울을 체포한 후,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뭐라고 소동을 일으킵니까?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8절)
그들이 선동한 내용을 보십시오. ‘이 사람(바울)은 곳곳에 다니며 우리 백성, 즉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들을 모욕하고 율법과 성전을 비방한 자’라고 합니다. 6장에서 교회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이 바로 이런 죄목으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과 똑같은 비난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그 자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똑같은 죄목으로 고발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들까지 성전에 데려 왔으니 이는 성전을 더럽힌 거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성전의 이방인 뜰이 있고 거기를 넘어가서는 안 됐습니다. 그래서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이 이 구역을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붙잡히면 누구라도 죽음을 당할 것이며, 그것은 그 자신의 책임이다.’라는 경고문을 헬라어와 로마의 라틴어로 돌에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1871년에 발굴되었고, 지금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규정, 즉 이방인 뜰을 넘어 성전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돌로 쳐 죽여도 좋다고 한 규정은 로마 사람들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로마 총독도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그것을 어겼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그런 고발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29-30절)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왜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까?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에베소 출신인 드로비모를 알고 그가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 드로비모가 지금 예루살렘까지 와서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자기들이 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약간 떨어진 저 아래 시내에서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지금 이 성전에도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나는 저기서 그 사람을 봤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여기도 있는 게 틀림없다.’ 이게 맞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저쪽 시내에 있던 사람이 당연히 여기도 왔을 것이라고 어떻게 자동으로 추정합니까? 그런데 너무 확신하고 있습니다. 틀림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성전 안에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도 바울과 같이 있었다면 분명히 같이 잡아들였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드로비모는 거기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온 게 아닙니다. 이처럼 증거도 없고 확인되지도 않은 모함으로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냅니다.
이때 이 폭력적인 사태에 당황한 성전 안의 자체 수비대가 성전 문을 잠근 것으로 보입니다. ‘문이 닫혔다‘(30)고 되어 있는데, 자동으로 닫힌 게 아니라 수비대가 닫은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소동이나 폭력이 일어나서 피를 흘리는 일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문지기 레위인들이 성전 문들을 닫아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유혈사태로부터 성전의 거룩함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전에 바울이 여러 성들, 특히 마게도냐의 여러 성들을 돌아다닐 때 여러 차례 성령님이 알려주시고 또 선지자들도 예언해준 것처럼, 사도 바울은 결국 결박되어 체포되고 끌려가는 환난을 정말로 당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이 알려주셨다’고 한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언은 성취되었고,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처럼 그 길을 선택해서 간 것입니다.
2.로마군의 개입으로 보호되는 바울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1-32절)
성전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들이 더 이상 성전 안으로 들어갈 경우 어떤 죽임을 당해도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돌판을 붙여 놓았다고 했습니다. 로마 당국도 그것을 허용해주었습니다.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유대인들은 정말 싫어했습니다. 이전에 성전 내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 군대 일부가 성전에 들어갔다가, 군인들이 돌을 맞고 도망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가 큰 군대를 출동해서 진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린 겁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출동합니다. 이렇게 신속한 출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 당시 로마 군대가 성전 바깥뜰과 계단으로 연결된 안토니오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가보았을 때 보니까, 안토니오 요새 터가 성전 터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천부장은 보병 760명과 기병 240명, 즉 천 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린 사람입니다. 로마에서는 군대 호민관과 같은 급의 고위 군사직, 즉 높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천부장은 나중에 나오는 23장 26절을 보면 그 이름이 글라우디오 루시아였습니다. 성전 주변에서 자주 발생하던 소요를 비롯한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던 고위급 장교였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출동했는데(32), “백부장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휘하에 100명을 거느린 백부장이 두 명 이상이라는 말이니까, 최소 200명에서 수백 명의 군인들이 출동한 것입니다. 성전에는 유대인 자체의 경비대가 있었지만 동조를 한 것인지 통제를 못한 것인지, 수백 명의 로마 군대가 출동하니까 비로소 소동을 일으키던 사람들이 바울을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고 나와 있습니다(32).
그러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뭘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폭행을 한 겁니다. 노년기에 접어든 바울이 얼마나 많이 다쳤겠습니까? 굉장히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군대가 출동하니까 그때에야 멈췄습니다.
문제는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은 28-29절에 나온 것처럼 바울이 성전에 헬라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헛소문으로 인한 소동이었습니다. 진짜 문제 때문이 아니라 선동으로 인한 헛소문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사람과 시내를 다녔다는 것만 보고 그렇게 한 것이고, 바울이 평소에 가르친 것을 봐서는 틀림없이 같이 갔을 것이라고 추정한 데서 비롯된 오해였습니다. 추측으로 이렇게 된 겁니다. 추측만 하고 일을 벌이면 항상 이렇게 억울한 피해자들이 나옵니다. 바울이 지금 그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3-34절)
바울이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을 천부장이 보았으니까, 우선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우선 바울을 잡아, 12장 6절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양쪽에 로마 군사 한 명씩 붙어 두 명에게 쇠사슬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결박했습니다. 12장에서 베드로가 잡힐 때도 그런 식으로 결박되었는데, 바울도 한 명씩 양쪽에 두 명의 군인들에게 쇠사슬로 연결되어 잡혀가게 됩니다.
또 이 장면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쓴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 22장(52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물론 성전 경비대장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갔던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그 차이점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로마군 경비대에 직접 체포되어 결박당해 끌려간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경비대 호민관인 로마 천부장은 피의자를 우선 확보하고 보호한 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다음 단계로 그의 신원과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폭행을 했는데, 오히려 로마 천부장은 합리적으로 절차를 지켜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흥분하면 막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안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회에서 질서대로 나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종종 있어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진상 파악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여기서는 이러고 저기서는 저러며 막 소리를 지릅니다. 히브리어로 소리치고 헬라어로 소리쳐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진상 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 수비대가 있던 안토니오 요새로 데려가라고 명합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5-36절)
흥분한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이 바울을 데리고 갈 때 따라가면서 옆으로 달려들어 바울을 뒤에서 또 옆에서 계속 때리며 갔다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 칼로 찌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그래서 군사들이 아예 바울을 들고 보호하면서 갔습니다. 계단에서 들어메고 갔습니다. 바울은 정말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여기서 떠오릅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네가 그리스도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묻고, 23장을 보면 빌라도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그때 무리들은 “없애버려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던 장면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바울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를 죽여라’ 하는 사람이었을 텐데, 지금은 ‘바울을 죽여라’ 하는 예수님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색의 선동에 의해 폭동이 일어났을 때, 에베소의 서기장이 폭동을 진정시켰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여러분이 이러면 좋지 않습니다. 당신들에게 손해가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무마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서도 완전히 근거 없는 누명을 쓰고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아마 바울이 속으로 ‘아,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에베소 서기장이,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로마군 예루살렘 수비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와 그의 군인들이 와서 보호해주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다 주님께서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로마까지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제국의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때로 결박과 환난과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보호의 손길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호의 손길이 같은 믿는 사람들일 때도 있지만, 이처럼 세상의 권력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굉장히 힘들었을 2차 전도여행 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18:10)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는 사람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상황에서 뭐가 내게 유리한가 하며 그리로 가는 게 아니라, 내게 불리하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좁은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갈 때 분명히 고난이 있지만, 고난 속에서 지켜주시는 손길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으로 갈 때는 전혀 알지 못하던 놀라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큰 은혜와 놀라운 유익을 얻게 됩니다.
찬송가 268장(새 505) 온 세상 위하여
권사
우리 이시간 주여 한번 더 부르짖고 각자 주신 은혜 붙잡고 기도하시다 돌아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