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방향키는 하나님께! 2024 0303 창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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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7:1–5 NKRV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홍수사건의 본격적인 시작. 방주는 완성되었음. 하나님께서 이제 방주에 탑승하라고 하심.
하나님의 깊은 슬픔과 눈물 = 홍수 사건. 그 가운데 노아에 대한 소개는 그를 당대에 의로운 자.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
동행 - 할락크 / 여기서는 히트파엘 형태로 쓰임. 히트파엘 : 피엘의 강조 및 재귀적 형태, 때로는 수동. 그리고 지속 반복의 의미도 지님.
할락크의 히트파엘 형태는 지속, 반복의 의미가 강함. : 계속 걷다, 이리저리 배회하다의 의미도 있음.
그러면, 노아흐 히트할렉크 에트(임) 엘로힘 이라는 말은 노아가 하나님과 계속해서 함께 걸었다는 의미적 강조가 됨.
단순히 그의 인생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늘 언제나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고 걸었던 것임. 동행의 의미가 단순히 하나님을 따랐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가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단순한 의미가 아님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것을 풀어서 잘 설명한 구절이 있다. 성경도 이것에 대해 강조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두 번 반복.
Genesis 6:22 NKRV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Genesis 7:5 NKRV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과의 동행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는 내 인생의 방향키가 나에게 있지 않음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때론 나의 상식과 나의 경험치와 나의 선택을 상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
지금 노아가 그렇다. 방주를 만들라니. 그리고 그 명령이 가벼운 환경에서 나온 명령이 아니다. 온 지면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시면서, 그 피할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목전에 두면서 노아가 기쁜 마음으로 방주를 지었을까?
방주가 지어지면 지어질 수록 심판의 날짜도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목이 타들어가는 긴장감 속에서 방주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에 노아에 대한 성경기자의 평가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노아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그렇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기로 작정했던 사람이다. 신앙생활이 왜 어려운가.
무엇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자연스럽되 되어지는 것들이다. 우리가 되려고 애쓰기 보다, 되어지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즉 자신의 심령 부흥에 집중해야하는 것.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 좀 더 쉽게는 성령충만이다.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좀 더 쉽게는 예수로 매일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의 은혜를 구하다 보면 내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된다.
벼락같은 은혜보다 가랑비 같은 은혜가 더 쉬운 것을 깨달아야 한다. 벼락같은 은혜는 분명하고, 명확한 감사가 나올 것 같지만, 그에 따른 벼락같은 과정을 겪어야 한다. 가랑비 같은 은혜는 처음에는 잘 모른다. 왜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지 의심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의 그 은혜에 충만히 젖어있는, 그래서 내 심령이 완전히 변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둘 다 좋다. 본인의 성정에 맞게 하나님이 알아서 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말 되어지는 은혜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주로 보는 칭의의 은혜

그러한 노아의 순종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다고 했다. 창세기 7:1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는 존재. 우리가 거룩하려고 애쓰면 얼마나 할 수 있는가? 의로울 수 있으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만족할까? 히브리어로 보다 - 라아. 인정하다는 뜻이 함께. 하나님께서 여전히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이지만, 인정해주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 믿을 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면 된다. 무엇이 되려고 애쓰다보면 신앙생활이 어렵고, 거추장스럽다.

방주 - 방향키는 하나님께!

그래서 그렇게 살다보면, 세상사람들의 기준에는,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물 위에 아무런 방향키 없이 떠다니는 표류하는 배처럼 보일 수 있다. 히11:38 처럼 광야와 산과 동굴, 토굴로 도망치며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예수쟁이.
방주는 항해하는 키가 없다. 방향을 스스로 정하지 못한다. 큰 물결과 파도에 의해 흔들흔들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침몰하지는 않는다. 배가 뒤집히지는 않는다. 배가 항해할 때 폭풍우를 만날 때 방향키를 쥐고 있는 것은 죽고자 하는 것과 같다. 크게 펼쳐놓았던 돛도 얼른 내려야 한다. 물의 흐름에 배 전체를 맡겨야 한다. 우리 인생의 방향키를 하나님께 맡기라. 세상이라는 물 위에 떠 다니는 방주. 때로는 방향키가 없어 혼란스러워 보여도, 하나님이 어느날 아라랏산에 목적하신 그 곳에 우리를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Lexham 리서치 주석: 창세기 1–11장 배경 연구: 고대 근동의 홍수 이야기

고대 근동 전역의 몇몇 문화에는 홍수 이야기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발견된다. 하급신들이 더 강력한 신들을 섬기기에 지쳤을 때, 이를 대신해 신 엔릴은 인간을 창조해 신들의 노예가 되게 했다. 엔릴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흙과 신의 피를 섞었는데, 이는 반항적인 불멸의 사람들을 낳았다. 사람들은 너무 시끄러웠고 엔릴의 잠을 방해했다. 이에 대응하여, 엔릴은 인구를 줄이기 위해 지구에 재앙과 기근을 초래했다. 이것이 실패하자, 그와 다른 신들은 홍수로 인류를 말살하기로 결정했다. 또 다른 신인 엔키는 우트나피쉬팀에게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홍수를 견딜 수 있을 만큼 큰 배를 만들라고 지시함으로써 엔릴의 계획을 전복시켰다. 우트나피쉬팀이 홍수에서 살아남은 후, 그는 불멸성을 얻었다.

아카드의 더 오래된 홍수 이야기는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이며, 이 이야기에서 영웅은 아트라하시스다. 이곳의 홍수 이야기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이야기와 거의 같다. 고대 수메르에도 에리두 창세기란 홍수 이야기가 있으며, 이 이야기에서 영웅은 지우수드라(Ziusudra)다.

이 이야기들에는 창세기 6–9장의 홍수 이야기와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점들도 있다. 첫째, 성서의 홍수 원인은 사람들이 창조주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인류의 부패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깊이 슬퍼하신다. 둘째, 아카드 신화에서는 엔릴 신이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한 번 이상 시도해야 하는 반면, 하나님의 파괴는 첫 시도로 완료된다. 또한 하나님에게는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의로운 노아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실 계획이었다. 마지막으로, 노아는 홍수에서 살아남은 후에 불멸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지시에 대한 그의 충실한 순종은 창세기 6:9에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폭력적이고 사악한 세대에서 동떨어져 있었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다. 노아가 보여 주는 본보기는 점점 더 사악해지는 문화에서 의롭게 살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실 것이다.

홍수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지만 또한 그분의 은혜로운 구원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 세계가 구원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버리지 않으신다. 대신 그분은 그것을 재창조하시고 의로운 노아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신다. 내러티브의 전환점은 창세기 8:1이며, 여기서 하나님은 노아와 방주에 있는 그분의 나머지 피조물들을 “기억하신다.” 그런 다음 창세기 1:2가 반향되는 언어가 나온다(“하나님의 영[직역하면 “바람”]이 수면 위에 맴돌고 있었다 ”). 하나님은 깨끗해진 땅에 바람을 불어넣어 다시 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전념해 오셨고, 이것이 하나님이 만물을 단번에 구원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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