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는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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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일이 있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음악소리와 함께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비상시 대피로 안내’에 대한 방송이었습니다. 안내방송이 끝나고 불이 꺼졌습니다. 방송을 들어서인지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상구’ 유도등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던 그 유도등이 하필 그 날에 아주 밝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영화가 마친 뒤에 영화도 즐겁게 보았지만, 비상구라는 단어가 계속 생각이 나서 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찾아보니 비상구에 대한 법령이 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비상구는 재난상황 시에 30m 이내로 접근 가능한 구역에 설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남녀노소를 불문한 누구든지 쉽게 출입할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항상 개방해놓아야 합니다. 제 눈에 환하게 들어왔던 유도등은 보기 편한 초록색으로 하며 정전상황에서도 볼 수 있도록 상시 전원을 공급해놓아야 한다는 법령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로마서는 흔히들 성경의 축소판이라고들 말합니다. 내용이 방대한 만큼 이해도 어렵고 섣불리 건드리기 두려운 성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비상구를 묵상하면서 문득 이 본문이 떠올라 함께 은혜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죄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피는 죄로 인하여 끊어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화목케 만들어주셨습니다. 뒤이어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화목케 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것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믿을 때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인 우리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칭의에 대하여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바울은 인류의 시작이자 대표였던 아담의 타락사건을 통해 인류의 타락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담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이라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불순종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죄는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사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 사건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아담으로 시작된 인류 전체는, 그리고 인간이 다스리고 있었던 모든 세계는 죄와 사망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기 전까지는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죄인지 모르고 지으면 죄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바울은 이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먼지를 볼 수 없습니다. 먼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먼지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햇빛이 비치면 많은 먼지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먼지를 비추는 햇빛과 같이 우리의 죄를 비추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 자체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졌기 때문에 선 자체를 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모세의 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율법을 어기거나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반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죄를 저질렀고 때문에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저지르지만 그것이 죄인 줄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형법도 범죄를 저지르고 범죄에 대한 법률이 있는지 몰랐다는 법률 조항에 대한 부지는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은 못 할지언정 자신이 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시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거나 피난처를 찾아보려 노력합니다.
보통 건물에는 문이 많습니다. 특히 영화관과 같이 어둡고 문이 많은 시설에서는 재난상황 발생 시 당황한 마음에 비상구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상구가 아닌 다른 문으로 나가게 되면 오히려 출구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이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을 취해봅니다. 누군가는 순간의 쾌락이나 종교적 신념으로 이겨보려 하고 누군가는 선행으로, 봉사로 피난처를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망의 권세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상구를 통하지 않으면 출구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듯이 죄의 시작인 아담의 범죄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다른 해결책을 찾는다면 우리는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됩니다.

확실한 비상구가 되시는 예수님

바울은, 그리고 성경은 아담의 죄를 해결하고 사망의 권세로부터 피할 수 있는 올바른 피난처, 비상구를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아는 이름이자 또 다른 인류의 대표인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바울은 14절 후반부부터 또 다른 아담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아담은 하나의 범죄를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순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아담과 예수님의 유사점을 찾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은혜가 범죄보다 더욱 넘쳤다는 것입니다. 정죄는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으나, 예수님의 은사(선물)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심에 이릅니다. 아담 한 명이 지은 죄로 말미암은 정죄를 모두 해결하신 예수님의 은사가 훨씬 더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가리켜 말씀이라고 정의합니다. 말씀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세기의 창조주시요, 출애굽기의 구원자이시요,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 속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예비 된 어린 양이십니다. 또 수많은 역사서 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왕이시요, 수많은 선지자들이 보이고 증거 한 구원자이십니다.
시편과 욥기를 비롯한 많은 시와 노래 속 고난과 한숨들의 응답이시요 요새이시며 피할 바위이시며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이시요, 잠언의 지혜가 되십니다. 이어서 이러한 예수님을 요한은 생명이시요, 빛이라고 증거 했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가리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보다 더 확실한 비상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토록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육체를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더욱 은혜인 것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장사된 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셨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아무도 이기지 못했던 사망의 권세를 꺾으신 우리 인생의 확실한 비상구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 삶에서 더 이상 다른 문으로, 다른 길로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면 우리는 사망 대신 생명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더하여지는 은혜

바울은 20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여 줍니다.
이전에는 이유도 모르고 죽었던 수많은 원인모를 불치병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연구를 통하여 그 병을 일으키는 병균들이 밝혀졌고 또한 병의 이름도 지어졌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과 병명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죄가 죄인 줄 몰랐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이것이 죄이구나! 라는 깨달음과 통찰을 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이 범죄를 더하도록 들어왔다는 것은 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말합니다. 이전 절에 말하였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이 율법이 정죄하는 수많은 죄를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비상구의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비상구는 언제나 열려있으며 찾기 쉽고 유도등이 빛나고 있음에도 우리가 재난상황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에게 비상구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그렇게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 앞에 여러분의 삶을 한 번 대어보시길 소망합니다. 저의 경우 신앙생활이 오래되고 삶이 평탄할수록 죄에 대하여 둔감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구원의 감격이 처음만 못하다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율법 앞에 가만히 제 삶을 대 보았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제 삶의 1%조차 대어보지 않았는데, 제가 기억나는 율법을 채 다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죄로 가득한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 주님 이처럼 죄인인 저는 당연히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어야 할 놈이군요. 제 삶은 겉으로는 평탄해보였지만 재난 그 자체였습니다.
재난상황인 제 삶에 참 다행인 것은 언제나 비상구처럼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계시는지조차 몰랐던 곳에 말씀이요 빛이요 생명이신 분께서 항상 그 자리에서 저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 제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권세 아래 생명이 왕노릇하는 그 곳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읽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영화관에서 제가 들었던 비상시 대피로 안내방송 같았습니다. 제 삶에 가득한 죄로 인하여 어둠이 찾아오고 사망으로 가득할 때에 빛을 잃지 않고 이리로 피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비상구를 묵상하듯 예수님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망의 권세에 놓인 저를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이런 나조차 사랑하셔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그 구원을 향한 은혜의 강물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길 소망합니다. 구원의 감격이, 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면 우리는 어둠 가운데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방황하게 됩니다. 비상시 대피로를 알려주는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이 가리키는 비상구인 예수님께로 피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삶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단히 믿음에 뿌리를 박고 단단히 서 있으려 노력하지만 어느 정도 섰다 싶으면 부지 간에 넘어지고 죄책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 때에 기억할 것은 동시에 우리에게는 비상구처럼, 그 옛날 이스라엘의 도피성처럼 항상 열려있으며 접근하기 쉽고 차별 없이 모두를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넘어지지만 예수님은 항상 이기십니다. 죄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은혜가 왕 노릇 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항상 예수께로 피하여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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