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39-5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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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질문

저는 오늘 8장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힘을 내어 집중해주시길 부탁을 드리면서 8장 시작은 간음한 여인의 사건을 기록하고 난 후 12절부터 59절까지는 크게 4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로 시작하여 20절까지 2) 21절에 ‘다시 이르시되’부터 30절까지 끝나는데 마지막 절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앞서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리고 30절에는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었다’ 로 마무리한 후 3) 3번째 단락은 3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렇게 믿는 사람을 보다 심화해서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시작한 말씀은 죄 그리고 종을 자유롭게 된다는 비유로 연결을 합니다. 이말씀이 47절까지 유대인들과 연결되는데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31절부터 말씀은 앞서 믿는다는 사람에게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인데 듣는다는 의미는 단순하게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마지막 단락을 살피기전에 먼저 여러분 ‘거하는 것’ 하면 생각나는 의미 같은 것이 있습니까? 우리 말 번역으로는 앞서 1장에서 구약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막과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거하는 의미에서 ‘거한다’라는 단어로 사용되었는데 히브리어에서는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기 거한다는 의미는 요한복음에서는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발견되는 단어인데요 요한복음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입니다. 의미는 ‘남아 있다’ ‘머물다’는 의미로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듣는 저와 여러분에게 ‘남아 있다면’ ‘거한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죠.
저자 요한은 요한일서에서도 요한1서 2:24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명령이죠. 앞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려서 본문 31절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은 들은 말씀이 우리 마음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자신 스스로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오해하는 것은 들었으면 자연히 우리에게 남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학생은 수업시간에 들은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복습을 하는 행동이 있듯 신자 역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내 말이 거하도록’ 듣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3:35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누가복음 6:46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그래서 ‘거한다’는 의미는 자연스럽게 45절에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는 것은/ 들었지만 ‘거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서 43절에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서 분명한 의미는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들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앞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들어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 즉 ‘공부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분석이 있듯 우리가 살펴야 할 부분이 ‘들을 수 있는 상태’ 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득 찬 잔을 비워야만 채울 수 있듯이 말입니다. 비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바로 ‘나’입니다.
더 자세하게 살피기 전에 4) 4번째 단락은 48절 /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라고 시작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렇게 단정지어 말합니다. ‘너를 사마리아 사람, 귀신이 들렸다’는 말로써 즉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요즘 말로 ‘딴 나라’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딴 소리하는 사람, 뭔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죠. 들어보자는 의미가 아니라, 강하게 부정하는 마음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그들은 결국 예수를 59절에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했다고 행동적인 결론 지으면서 저자 요한의 긴 쟁론을 마칩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3번째 단락의 일부까지 그리고 오늘 가능하다면 마지막까지 다루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7장의 시작과 더불어 예루살렘의 명절인 초막절을 지내러 굳이 올라오신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자신을 드러내고 이렇게 긴 쟁론을 끌고 온 내용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많이 지쳤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혹시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될 우려도 있기 때문입니다. 3월에는 부활절이 있습니다. 명절을 지켜야할 이유는 없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에 소홀히 여길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에 부활사건과 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말 그대로 기독교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12–14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라고 이어서도 길게 바울은 변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저자 요한은 긴 글을 통해서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이 예수와 대결하고 결국은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가 ‘믿는다’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거하는’ 자인데 예수께서는 듣지 못하는 또는 안듣는 유대인들을 향해 43절에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고 하신 말씀을 저자 요한 시대의 사람들과 2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여전히 ‘너희는 들으면서 듣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들을 줄 아는가?’라는 요한의 질문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치면 안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논쟁의 흐름 속에서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당시보다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이 지난 시점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여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은 드라마나 또는 실제 연애를 다루는 예능을 보면서 현실감에 빠져 듭니다. 방속국의 목적은 그런 편집을 통해 여러분이 채널에 머물고 시청율을 높여 프로그램을 성공시키는게 목적입니다. 즉 요한의 목적은 예수님의 당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한 사건만 주목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요한은 ‘예수께서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글을 쓰려는 의도를 밝혔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것과 ‘그 사실을 믿어 영생 즉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믿는다’고 말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대상으로 저자 요한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드라마처럼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앞서 4장에서 예배가 무엇인지 정의했던 말씀이 기억이 나실까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4개의 큰 단락에서 쟁론과 9장 이후로 이어지는 고난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과정만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예수를 대하는 말과 행동 그들의 자세를 ‘태도’라고 말합니다. 말과 행동이 ‘나’를 규정하죠. 즉 ‘그리스도인’으로 규정된 ‘나 스스로가’ 긴 쟁론의 유대인과 비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이렇게 긴 논쟁의 글을 만나면 결과론적으로 ‘어려워서 모르겠다’, 잠시 눈감고 시간을 보내면 짧은 예배시간은 지나갑니다. 그렇게 지나간 ‘모르는 시간’은 다음에 이어질 본문의 말씀과 연결되지 못하고 마치 하나의 장면안 사마리아 여인/ 오병이어/ 병자들의 고침만 기억하여 그 기억으로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고 한다면 저자 요한이 말하고자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말씀과 결코 맞을 수 없고 그런 결과는 45절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59절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는 경고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가까운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비록 부모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부모의 말이 맞고 틀리는가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자녀’라는 태도의 문제이고, 부부의 관계에서 서로가 주고 받는 말과 태도 역시 맞고 틀림이라는 내용보다 서로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면에서 일어납니다. 학교에서는 선생과의 관계, 일을 할 때는 함께 일하는 사람과 또 직장의 상사와의 관계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선택할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전통을 선택했습니다. 앞서 살폈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래동안 지켜온 ‘안식일’ 기준, ‘할례’ 기준을 자신들의 철저한 기준으로 잡았습니다. 42절에 말로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진단은 이들이 결코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내지 못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특히 ‘아버지’ 앞서 말씀드린 비유처럼 ‘아버지와 자녀됨’의 관계로 살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원인이 4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여러분은 ‘마귀’가 읽혀지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귀가 갖는 특징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첫째, 욕심대로, 둘째 살인한 자 그리고 세째 진리가 없는 자, 마지막으로 거짓을 말하면서도 진리로 믿는 행동을 하는 자입니다. 이를 가장 쉽게 드러내는 표현이 ‘거짓말 쟁이’입니다. 거짓말은 가장 쉽게 자기를 숨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기 뿐만 아니라 주변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아주 좋은 예화는 ‘양치기 소년’입니다. 주제는 당연히 거짓말이겠지만 거짓말이 불러올 예측되지 못한 결과는 전멸이라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 바로 거짓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죠.
마치 마귀라는 씨앗에서 자라나는 뿌리와 열매처럼 거짓말의 뿌리를 통해 우리 마음의 욕심을 먹으며 자라서 살인하는 자, 진리가 없는 자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인과 진리 없음이 우리의 평상시 말과 행동과 별개라고 보이십니까? 성경은 형제에게 ‘바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지옥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22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지적합니다. 예레미야 17:9–10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는 표현이 부패한 마음에서 출발하여 자라난 결과 즉 행동이 결국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49절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른 채 할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나를 무시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결국 아들로 아버지와 연결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51절에 예수께서는 여전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52절에 그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가장 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1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것이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제1원인이요. 결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 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 000에게 임하시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54절의 해석은 바로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것’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기쁨은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의 관계에 있습니다. 자녀된 여러분을 가스라이팅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56절에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가운데 결국은 자식을 얻고 이를 기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메시야를 기다리고 사모하며 열심으로 율법을 지켰지만 오신 메시아를 받아들임으로 기쁨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크다고 믿는 아브라함 조차도 예수께 비교될 수 없지만 이런 예수의 말씀이 총의 방아쇠처럼 예수를 향한 유대인의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이고 거한다는 것은 들은 것이 마음에 머물러 마음의 작용이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어떠 기준에 의해서 움직이며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를 예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 아래서 말씀하시며 아버지의 말씀대로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 같아도 결국 내 새끼 손가락 아픈만큼의 경험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함께 살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동참할 때 슬퍼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뿐만 아니라 기쁨 역시 그렇게 동참되어 나의 즐거움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명절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바로 내 옆에 계시며 때론 삶의 문제로 쟁론하듯 울부짖으며 고군분투할 때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믿는 다는 것은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보내신 또 다른 보혜사의 붙잡아 주심이 저와 여러분에게 여전히 작동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붙잡은 부모의 손은 약할 수밖에 없지만 부모가 잡은 손은 아이의 손을 능가하는 능력이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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